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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ㄱ> 가쉬미 - 국제연합안전보장이사회 결의안 5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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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ㄱ>
*가쉬미, 아흐마드 후세인 Ghashmi, Ahmad Hussein (1938∼78) :

예멘(Yemen)의 군 장교이며 정치인. 1977∼1978년 대통령 역임. 하쉬드(Hashid) 부족 연합의 가계(家系)에 속하며, 하마다(Hmada)에서 출생한 가쉬미는 바그다드 군사학교에서 장교 훈련을 받았다. 1962∼1970년, 예멘내전동안 그는 사나(Sana)의 공화주의 정권과 북부의 하쉬드(Hashed)와 바킬(Bakil) 부족연합 사이의 연락책 역할을 수행하였다. 그와 하쉬드의 족장 압둘라 알 아흐마르(Abdullah al-Ahmar)의 관계는 늘 긴장상태였다. 1974년 6월, 이브라힘 함디(Ibrahim Hamdi) 대령에 의한 쿠데타 발생 시에, 중령 가쉬미는 군사령부회의(MCC) 위원이자 부 참모장으로 임명되었다.
진보주의자인 가쉬미는 친사우디 인물이었다. 1977년 10월, 함디가 암살된 직후, 그는 총사령관이자 3인 군사령부회의의 위원장이 되었다. 그는 함디가 금지했던 헌법인민의회(CPA)를 부활시켰고, 알 아흐마르와의 긴장관계를 개선하려고 노력하였다. 하지만 그의 정부는 좌익 민족주의 세력을 탄압하였다. 사우디아라비아의 권고에 따라, 가스미는 친함디파 소속 군인들과 공무원들을 숙청하였다. 1978년 3월, 그는 MCC를 해체함으로써 이전의 MCC의 위원이며 함디의 충성파였던 낙하산 부대 사령관인 압둘라 압둘 알림(Abdullah Abdul'aalim) 공군소령의 권력을 무력화시켰다. 1978년 4월, 헌법인민의회는 MCC의 역할을 대통령 위원회로 대체하였고 가쉬미를 대통령으로 선출하였다. 그는 6월, 남예멘 대통령 살림 루바이 알리(Salim Rubai Ali)의 밀사에 의해 서류가방에 숨겨져 있던 폭탄의 폭발로 암살 당했다.


*가일라니, 라쉬드 알리 Gailani, Rashid Ali (1892∼1965) :

이라크의 정치인. 수상(1933, 1940∼41년) 역임. 바그다드의 저명한 순니파(al-Sunni)에서 출생한 가일라니는 바그다드 법률학교에서 학위를 취득하고 그곳에서 법률업무를 시작하였다. 잠시동안, 판사로 재직한 후, 그는 정계에 입문하였다. 1924년 법무부장관, 1925∼1928년까지 내무부 장관으로 재직하였다. 민족주의자였던 그는 1930년 영국-이라크 협정을 반대하였다. 1933년 잠시 수상직에 있었으며, 2년 후 내무부 장관으로 재임명되었고 1936년 후반에 내각의 총수가 되었다.
2차 세계대전 기간 중, 정치가들과 군 장교들이 친영파(親英派)와 반영파(反英派)로 나뉘어 있을 때, 가일라니는 반영파인 민족주의 진영을 이끌었다. 그는 1940년 3월 수상이 되었다. 3개월 후, 이탈리아가 영국과 연합군에 대항하여 전쟁을 선포하였을 때, 그는 영국과 연합국측이 요구한 이탈리아와의 우호 관계의 단절을 거부하였다. 또한 그는 전쟁발발 시, 영국에게 주둔권과 통과권의 특혜를 명기한 영국-이라크 조약 4항의 준수도 거부하였다. 그는 1941년 1월, 사직할 때까지 영국의 압력을 잘 견디었다. 그러나 그의 뒤를 이어 수상직에 오른 친영파 타하 하쉬미(Taha Hashimi)는 군장교들과 여론의 거센 압력에 직면하였다. 1941년 4월초, 하쉬미는 수상직에서 물러났고 가일라니가 다시 수상직에 취임하였다. 그는 친영 섭정 통치자인 압두 일라흐(Abdu Illah), 누리 알사이드(Nuri al-Sa'id) 그리고 어린 왕 파이잘(Faisal) 2세를 권력에서 몰아내는데 성공하였다.
이러한 상황을 지켜보고 있던 영국은 즉각 바스라(Basra)에 군대를 상륙시켰고 5월 영국과 가일라니 군대 간의 전투에서 그는 패배하였고 독일로 망명하였다.
전쟁 후, 그는 사우디와 이집트, 시리아에서 수년간을 보냈다. 1958년 7월, 파이잘 2세 국왕에 대한 쿠데타 발발이 있은 후, 가일라니는 이라크로 돌아왔다. 범아랍민족주의자였던 그는 압둘 카림 카심(Abdullkarim Qasim)의 정책에 크게 반발하였고 1958년 12월, 통일아랍 공화국과 연합하여 카심에 대한 쿠데타를 시도했으나 실패하고 말았다. 그는 사형을 선고받았으나 카심이 그의 형량을 감하여 1961년 10월 그를 석방했다. 그 후, 그는 정계에서 은퇴했다.


*가자 Gaza :

가자지역의 중심도시. 2009년 통계로 인구는 약 45만. 가자가 최초로 역사에 기록된 시기는 B.C. 15세기경이었다. 번창하는 무역항이었던 가자는 삼손(Samson)에 의해 파괴된 다곤(Dagon)사원의 자리로 유명했다. 알렉산더 대왕(B.C. 336~323)은 가자주민의 활발한 저항이 계속되자, 그들을 노예로 만들어 징벌하였다. 가자는 A.D. 635년 아랍무슬림들에 의해 정복되었고, 예언자 무함마드의 증조부인 하쉼 빈 압둘 마나프(Hashim Bn Abdul Manaf)가 이곳에 묻혀있다는 이유로 종교적 중요성을 지니고 있다. 가자는 십자군 원정동안에 기독교의 지배로 들어갔다가, 1517년에 오스만 터키의 통치로 바뀌어 1917년까지 그의 통치하에 있었다. 가자는 5년 후인 1922년 영국의 위임통치하에 들어가 팔레스타인의 일부로 편입되었다. 1948~1949년의 팔레스타인 전쟁 후, 가자는 가자지역의 중심도시가 되었다. 1994년에 팔레스타인 행정당국은 가자를 자치정부의 본부로 만들었다.


*가자지역 Gaza Strip :

팔레스타인 영토로 면적은 360㎢에 이르며 2012년 추산으로 인구는 약 170만여 명. 1948~1949년의 팔레스타인 전쟁에서 아랍군대는 이스라엘에 패하여 지중해 해안을 따라 위치한 반 사막지역인 가자지역과 요르단 강 서안의 고립된 장소 서안지역(West Bank)만을 유지∙존속시켰다. 1949년 1월부터 가자지역은 이집트에 의해 통치되었고, 1956년 10월~11월 수에즈전쟁 동안 이스라엘의 침략으로 이스라엘의 수중으로 넘어갔으나 이스라엘이 1957년 3월 가자지역으로부터 철수하였다.
1967년 6월 아랍-이스라엘전쟁에서 가자지역은 다시 한번 이스라엘의 수중으로 들어갔다. 1981년 12월 1일 가자지역은 군사령관이 통제하는 지역이 되었으나 행정력은 민간의 행정가들이 운영하였다. 1993년 9월 이스라엘-팔레스타인 해방기구(PLO) 간 협정이 서명되기 전날 가자지역의 1/3이 19개의 유대인 정착촌(4,500명의 정착민)과 군사지역으로 편입되었다. 1994년 5월 이스라엘과 PLO 간 협정의 결과로 가자지역에 완충지역이 만들어짐으로 이스라엘의 이 지역에 대한 영향권이 더욱 팽창되었다. 따라서 가자지역의 약 60%만이 팔레스타인 당국의 통제하에 있게 되었다.


*가지 빈 파이잘 Ⅰ 알하쉼 Ghazi ibn Faisal Ⅰ al Hashem (1912∼1939) :

1933∼1939년 이라크 국왕 역임. 파이잘Ⅰ 빈 후세인 알하쉼의 유일한 아들인 가지는 오스만제국의 통치하에 있던 히자즈에서 출생하였다. 그의 아버지가 1921년 이라크의 왕으로 취임함에 따라 그는 아버지의 법적인 후계자가 되었다. 바그다드와 영국에서 교육받은 가지는 1933년 그의 아버지의 왕위를 계승하였다. 그의 통치 기간에 군 장교들 가운데 내분이 발생하자, 그는 1936년 10월 총사령관 바크르 시드끼(Bakr Sidqi)로 하여금 평판이 나빠진 야신 알하쉬미(Yasin al-Hashimi)의 문민정부를 전복하도록 격려하였다. 가지의 민족주의적이고 반영국적인 시각은 국민들로부터 인기를 얻었다. 스포츠카 운전을 좋아했던 그는 나이 27세 때 자동차 사고로 사망하였다.


*가할 Gahal (히브리어-Gush Herut Liberalism의 약성어, Herut-Liberals블럭) :

이스라엘의 정당. 가할은 메나헴 베긴(Menahim Begin)이 이끄는 자유주의자들과 헤루트 정당과의 합병으로 1965년에 구성되었다. 데이빗 벤 구리온(David Ben Gurion)이 마파이 (Mapai)로부터 탈당하자 1965년 11월 총선거에서 정권 승리의 기회를 노리고 있던 헤루트당과 자유주의자들이 합당을 하였는데 이는 정권 승리라는 정치적 목적에만 합의했을 뿐, 여성에 대한 동등권 부여와 국가와 종교간의 관계에 대한 양측의 의견차이는 그대로 묻어둔 채였다. 26석을 획득한 가할은 새 이스라엘 의회에서 제2의 정당이 되었다. 가할은 1967년 6월, 제 3차 아랍-이스라엘 전쟁 발발 전날, 국민 통일정부에 합류하기로 결정하였는데 이로인해 가할과 베긴은 정치적으로 높은 평가를 얻었다. 1969년 총선에서 가할당은 26석을 계속 유지하였고 총선에 뒤이은 국가통일 내각에도 참여하였다. 내각의 모든 다른 정당들이 받아들인 로저스(Rogers)의 휴전안을 거부한 가할은 1970년 7월 정부를 떠났다. 1973년 12월 선거 전날, 가할은 리쿠드(Likud)당을 조직하기 위해 소규모의 3개 우익그룹과 연합하였다.

* 강경파 성직자 조직 Organization of Militant Clergy (Iran)

1975년 강경파 성직자 조직(Organization of Militant Clergy, OMC)는 아야툴라 무함마드 후세이니 베헤티(Ayatollah Muhammad Hesseini Beheshti)와 무슬림 성직자들에 의해 정치정당으로써 설립되었고, 정당의 구성원들은 모두 무슬림 성직자들로 구성되었다. 1977~78년 이란 혁명 운동이 커짐에 따라 OMC는 점점 더 활발해지고 조직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OMC는 지역 혁명 위원회를 설립하는데 핵심 역할을 했다. 혁명 후에는 이란을 정치•종교적 조직체로 만들기 위한 전통적인 종교적 기반을 형성하는데 주요한 매개체가 되었다.
성직자의 정치적 무기로써 OMC는 선거와 국민투표(총선거)에서 활발하게 이슬람 공화당을 지원했다. 극단주의자인 정통 성직자들이 매일같이 정치에 관여한 결과 OMC는 급진주의의 기반을 획득했다. 1981년 베헤티가 암살당한 후 아야툴라 후세인 알리 몬타제리(Ayatollah Hussein Ali Montazeri)가 OMC의 리더가 되었다. 그는 많은 안건에 대해 급진적 입장을 유지했다. 1982년 몬타제리가 업무상 압박감으로 물러나고 OMC의 리더는 무함마드 레자 마흐다비카니(Muhammad Reza Mahdavikani)가 맡게 되었다. 그는 국토 수호 위원회(Guardians Council)의 중요회원으로서 OMC의 급진적 이미지를 벗기 위해, 비-이슬람적인 토지 개혁과 해외 무역 국유화 법안을 선언했다.

*개혁 유대주의 Reform Judaism :

18세기 중반 이후, 동부와 중부 유럽거주 유대인 사이에서 전통적 가치관을 배격하고 개인과 공동체적인 성취감을 추구하는 유대계몽주의 할라스카(halaska)가 발생하였다. 유대계 독일인 모세 멘델손(Moses Mendelssohn)은 1783년, 그의 저서 『예루살렘』에서 유대주의와 이성의 세속종교 사이에 아무런 모순이 없다고 주장하였다. 이 운동은 1789년 프랑스 혁명 이후, 확장되다가 프랑스를 비롯한 서유럽 유대인의 종교 개혁으로 번졌다. 이들은 유대주의를 예언자 전통으로 강조하고 랍비법(rabbinic law)의 구속적 성격을 거부함으로써 개혁노선을 강화했다. 개혁 유대주의는 종교의례와 의식용어 할라차(Halacha)에 대한 많은 제약들을 거부했다.


*걸프 Persian Gulf :

표면 면적은 251,000㎢, 길이 989km, 폭 56km(가장 좁은 폭), 깊이 50~90m. 이란과 아라비아반도사이의 아라비아해까지 닿아있는 걸프는 호르무즈 해협(the Straits of Hormuz)에 의해 오만 걸프(the Gulf of Oman)와 연결되어있다. 샤트 알 아랍(the Shatt al-Arab)과 카룬강(Karun River)으로부터 걸프로의 민물의 유입이 제한되면서 수온은 일반적으로 높고 염도 또한 높다. 걸프 주위의 국가들이 세계 석유자원의 2/3를 소유하고 있고 세계석유의 25~30퍼센트를 생산하고 있기 때문에, 걸프는 서방과 일본에게 가장 중요성을 갖고 있는 지역이다.


*걸프국가들 Gulf States :

걸프에 8개국이 인접해 있음에도 불구하고, 걸프국가들로 알려진 6개 군주국은 바레인, 쿠웨이트, 오만, 카타르, 사우디아라비아와 아랍에미레이트 연합국(UAE)이다. 걸프를 따라 해안선을 가진 나머지국가들은 이란과 이라크이다.


*걸프전 Gulf War

-제1차 걸프전 Gulf War Ⅰ (1980∼1988) :

이란과 이라크 간의 전쟁. 중부의 국경분쟁지역에서 이라크와 이란 사이에 일주일간 계속된 충돌이 있은 후, 바그다드는 1980년 9월 10일 그 지역을 장악했다고 선언하였다. 일주일 후, 이라크대통령 사담 후세인(Saddam Hussein)은 1975년에 채결된 이란-이라크 간의 국제 경계선 및 우호조약을 파기하고 샤트 알 아랍 강에 대한 모든 주권을 주장하였다. 9월 22일 이라크는 양측 국경의 8군데 지점에서 이란을 침략하였고 이란의 군사시설과 경제적 목표물을 공격하였다. 20세기의 가장 긴 재래식 전쟁인 무력 충돌은 몇 단계 상황으로 전개되었다.

<상황 1> 1980년 9월부터 1981년 3월까지. 이라크가 이란으로 진격해 들어갔다. 9월 28일 국제연합안전보장이사회의 결의 479항은 휴전을 촉구하였다. 이라크는 이란이 샤트 알 아랍 강 장악에 대해 이라크의 완전한 권리를 받아들인다면, 이라크는 전투를 중단할 준비가 되어 있다고 발표하였다. 그러나 테헤란은 그 결정을 거부하였다. 11월 중순 이라크는 코람샤흐르(Khoramshahr)를 점령하였고 아바단(Abadan)을 포위∙공격하였다. 이라크는 남부와 중앙지역의 이란 영토를 10,000평방마일/25,900㎢를 점령하였다. 우기(雨期)인 겨울이 군사적 교착상태의 근거를 제시하는데 도움을 주었다.

<상황 2> 1981년 4월부터 1982년 3월까지. 교착상태. 이란인들 사이에서 일기 시작한 애국심의 물결로 인해, 이란군이 상당히 강화되어 이라크의 더 이상의 전진을 막아냈음에도 불구하고, 아바단의 포위를 푸는 데에는 실패하였다. 유엔과 이슬람회의기구(ICO)가 전투를 끝내기 위한 다양한 노력을 기울였다. 이란은 이라크가 자신의 영토를 점령하는 한, 전쟁 당사국간 회담은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상황 3> 1982년 3월부터 1982년 6월까지. 이란은 빼앗긴 영토를 회복했다. 1982년 5월 24일, 이란은 코람샤흐르를 탈환하였고 이라크를 국제적으로 인정한 국경선으로 물리쳐 버렸다. 이라크는 6월 9일 휴전 준비가 되어있음을 발표하였다. 테헤란은 사담 후세인이 물러날 때까지 전쟁중지를 거부하였다. 6월 20일, 사담 후세인은 이란으로부터 이라크의 자발적인 철수가 10일 이내에 끝날 것이라고 선언하였다. 그러나 6월 30일 이라크는 여전히 이란영토의 몇몇 점령지역을 여전히 유지하고 있었다.

<상황 4> 1982년부터 1984년 3월까지. 이란이 이라크로 진격하였다. 국제적 국경선에서의 교전 중지와 휴전에 대한 국제연합안전보장이사회의 요구를 거부한 이란은 7월 중순 바스라(Basra)를 점령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제2차 세계대전 이래로, 9개 사단이 가장 거대한 보병전투에 돌입함으로써 격심한 전투가 2주일간 계속되었다. 그 결과 이란은 이라크의 영토의 32평방마일/83㎢를 점령하였다. 10월에 이란은 북쪽 지역에서 약간의 영토를 회복하였다. 1983년 3월 이란의 노우루즈(Nowruz) 근해의 유전에 대한 이라크공군의 공격으로 걸프역사상 최대규모의 석유가 유출되었다. 4월, 이란은 전략지인 바스라-바그다드 고속도로에 닿기 위한 남부 지역에 대한 공격에서 실패하였다. 그러나 7월 북부지역에 대한 이란의 공격은 하즈 움란(Hajj Umran)이라는 이라크의 요새 도시를 점령하였다. 1984년 2월 중순, 이란은 바그다드-바스라 고속도로 차단에 다시 실패하였다. 2월말 하우르 알 하위제(Hawr al-Hawize) 습지 공격에 이어, 이란은 이라크의 풍부한 유전지역 마즈눈(Majnun) 섬들을 점령하였다.

<상황 5> 1984년 4월부터 1986년 1월까지. 양국간 교착상태가 다시 시작되었다. 이라크는 프랑스제 엑소제(Exocet) 공대함 미사일을 사용하여 이란 유조선에 대한 공격을 더욱 증가하였으며, 이란 석유 수출의 대부분을 수행하고 있는 카르크(Kharg) 석유 터미널에 대한 공중폭격을 더욱 강화하였다. 이란은 걸프만의 아래쪽에서 이라크를 돕고있는 쿠웨이트와 사우디아라비아의 항구들을 이용하는 배를 공격함으로써 보복하였다. 1985년 3월, 이란의 여단이 바그다드-바스라 고속도로까지 도달하였으나 이라크의 맞대응에 버틸 수가 없었다. 5월 이라크는 탱커 전쟁(원유 탱커 공격 전)과 카르그의 공격을 더욱 강화하였고 8월 중순에 그 절정을 이루었다. 1985년에 걸프에서 이라크는 33척의 배를 공격하였고 이란은 14척의 배를 공격하였다.

<상황 6> 1986년 2월부터 1988년 1월까지. 소모전이 더욱 증가하였고 미국은 이라크 편을 들기 시작했다. 1986년 2월, 남부지역에서 이란은 강습을 통해 파오(Fao)반도의 310평방마일/800㎢를 점령하게되자, 그 간의 교착상태가 깨졌다. 1986년 2월 9일부터 3월 25일까지 이라크는 파오를 되찾기 위한 18,648번의 항공 임무를 수행했으나, 결국 실패하였다. 이라크의 독가스 사용이 유엔 전문가들에 의해 알려짐에 따라, 3월 국제연합안전보장이사회는 이란에 의한 전투의 연장에 대한 비난과 함께 화학무기 사용에 대해 이라크를 함께 비난하였다. 다음달, 석유시장에서 쿠웨이트와 사우디아라비아에 의한 석유과잉공급으로 전년 12월의 배럴당 27달러에서 배럴당 10달러 아래의 석유가격 하락을 가져왔다. 이것은 이란과 이라크의 석유 수입(收入)을 심각하게 감소시켰으나, 이라크는 걸프 연합국들과 서방 그리고 소련으로부터 1년에 약 199억 달러 정도의 원조를 받아 석유수입 손실분을 충당했다.
7월부터 은밀한 접촉으로 이루어진 미국 관료들과의 접촉결과, 이라크는 이전보다 훨씬 더 공격적인 공군력을 사용하기 시작하여 이란의 경제 산업기반시설을 목표로 폭격하는 한편, 걸프의 하부지역에 있는 이란 석유터미널에 대한 공습으로까지 확대하였다. 1986년에 이라크는 걸프에서 86척의 배를 공격한 반면, 이란은 41척을 공격하였다. 1987년 1월 남부지역에 대한 이란의 공세는 바스라 근교 7마일 이내까지 군을 진격시키는데 이르렀으나 바스라를 함락시키는 데에는 실패하였다. 봄 동안, 이란과 그들의 연합세력인 이라크 영토내의 쿠르드반군들은 이라크의 쿠르드 거주지역인 고원지대의 영토를 함락하였다. 7월 20일 국제연합안전보장이사회는 만장일치로 즉각적인 정전과 교전군의 철수를 요구하는 598 결의안을 통과시켰다. 10개항으로 이루어진 이 결의안의 내용은 이란의 가장 중요한 요구 중의 하나인 전쟁 책임을 결정하기 위한 공평한 위원회 구성에 대한 조항을 포함하고 있다. 이라크는 이란이 똑같이 행동한다는 조건으로 그 결정을 받아들일 것이라고 언급하였다. 4일 후, 미 전함에 의해 최초로 호위되고 있던 쿠웨이트의 초대형 유조선이 이란에 의해 설치되었다고 믿어지는 어뢰에 충돌하였다. 그 결과로 미국, 영국, 프랑스에 의해 해군력이 증강되어 이 지역에 60척의 서방전함이 주둔하게 되었다.
1987년 9월 22일, 제 7주년 전쟁 발발 일에 이라크는 거의 400대의 전투기를 보유하게 되었으며 이 숫자는 이란이 사용할 수 있는 전투기의 약 6배에 달하는 수였다. 바그다드는 4,500대의 탱크와 3,200대의 장갑차와 2,800문의 포를 소유한 반면, 테헤란은 1,570대의 탱크, 1,800대의 장갑차 그리고 1,750문의 포를 보유하였다. 이라크는 이란의 655,000명의 정규군에 비해 955,000명의 정규군을 보유하였고, 이라크의 민병대는 약 650,000명으로 이란의 혁명수비대 625,000명보다 조금 더 많았다.
10월에 미 해군은 이란이 미국의 순찰 헬리콥터를 공격했다고 주장하며 파르시(Farsi) 섬 근해에서 3척의 이란 순시선을 침몰시켰다. 그리고 미국의 군함은 쿠웨이트 해에 정박중인 미국기를 단 초대형 유조선에 대한 이란의 미사일 공격에 대한 보복으로 걸프아래지역의 두 곳의 이란 근해석유 비축기지를 파괴하였다. 대규모의 공격에 맞서기 위한 테헤란의 능력은 인적자원과 재정의 결핍, 그리고 끊임없는 이라크의 폭격으로 인한 교량, 공장, 발전소 등이 입은 손실로 인해 상당히 감소되었다.

<상황 7> 2월부터 1988년 6월까지. 이라크는 잃었던 영토를 수복하였다. 1988년 2월 장거리 지대지 미사일이 도입됨으로써 이라크는 테헤란을 공격할 수 있게 되었고 테헤란 주민들의 사기를 저하시킬 수 있었다. 이란은 국제 경계선에 가장 근접한 바그다드를 공격함으로써 보복하였다. 4월 16일과 18일 사이에 이라크는 화학무기를 사용하면서 파요 반도를 수복하였다. 이 당시 미 군함들은 두 개의 이란 석유 유정을 폭파시켰고 한 척의 이란 프리깃 함을 침몰시켰고 또 다른 한 척을 못쓰게 만들었으며 한 척의 미사일 함을 침몰시켰다. 5월23일~25일에 이라크는 화학무기를 사용하면서 북부와 중앙지역에서 공세에 들어갔고 남부지역에서는 샬람쉐(Shalamche)를 수복하였다. 6월 19일~25일 사이에 이라크는 독가스를 사용하여 중앙지역의 메흐란(Mehran)을 수복하였고 남부지역의 마즈눈 군도를 수복하였다.

<상황 8> 7월부터 1988년 8월 20일까지. 이라크는 이란의 영토를 점령하는데 실패하였다. 7월 3일, 미국의 순양함이 전투기로 오인하여 290명의 승객이 탑승한 이란의 에어버스 항공기를 걸프아래 지역에서 격추하였다. 7월 18일 이란은 무조건적으로 국제연합안전보장이사회의 결의 598항을 받아들였다. 2일 후, 이란의 지도자 아야톨라 호메이니(Ayatollah Khomeini)는 정전을 받아들이는 것을 ‘이러한 시기에 혁명과 체제를 위해서’라고 주장하였다. 7월 22일~29일 동안, 이라크는 북부, 중앙부, 남부지역에서 이란 영토의 점령을 위해 공격을 더욱 강화하였다. 이 공격은 북부지역에서는 실패했으나, 다른 지역에서는 성공을 거두었다. 하지만 일주일도 채 되지 않아 이란은 잃었던 영토를 재 수복하였다. 8월 20일 휴전이 유엔의 감시하에 발효되었다.
인명손실- (공식적으로) 이란 194,931명 사망. 이 숫자는 183,931명의 전투원, 실종자 그리고 11,000명의 시민을 포함한 수치임. 이라크는 160,000∼240,000명의 사망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됨.
비용- (스톡홀름 국제평화 조사연구소의 평가에 따르면) 이란은 740∼910억 달러이며 여기에 112억 6천만 달러의 무기수입을 추가함. 이라크는 940∼1,120억 달러이며 여기에 419억 4천만 달러의 무기수입을 추가함. 1990년 7월 이라크 부수상인 타리크 아지즈(Tariq Aziz)는 무기수입에 1,020억 달러의 추가비용이 있었다고 밝힘.
결과- 많은 영토를 잃은 나라도 없었고 양국에서 정권 교체도 없었다. 이 전쟁으로 호메이니는 이슬람 혁명을 더욱 굳건히 할 수 있었다. 군사력에서 일백만 명을 가진 이라크는 이 지역에서 터키와 이집트를 추월하여 가장 강력한 국가가 되었다.
정전이후: 1990년 8월 12일, 이라크는 1975년의 국제 경계선과 우호협정을 준수하는데 동의하였고 점령한 이란 영토로부터 군사력을 철수하고 전쟁포로들을 상호 교환하였으며 제 2차 걸프전 이후에도 이라크-이란 간 포로교환이 부분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다.


-제2차 걸프전 Gulf WarⅡ (1991) :

이라크와 미국주도의 다국적군 사이의 전쟁(1990년 7월 중순부터 8월 1일 까지).
배경- 7월 중순 이라크는 쿠웨이트와 아랍에미레이트 연합국에 의해 야기된 석유공급 과잉이 석유가격을 석유수출국기구가 정한 1배럴당 18달러의 기준가보다 훨씬 떨어진 11∼13달러까지 이르게 했으며, 1배럴에 1달러가 떨어지는 것은 이라크의 1년 수입을 10억 달러 감소시키는 것이라고 아랍연맹에 호소하였다. 7월 31일, 쿠웨이트의 관리들은 사우디의 젯다(Zedda)에서 쿠웨이트 국경선을 따라 약 100,000명의 이라크 군인이 전진 배치된 배경을 항의하기 위해 이라크 관리들을 만났다. 다음날 그 모임은 실패하였다. 쿠웨이트에 따르면, 이라크는 이란-이라크 전쟁동안, 쿠웨이트로부터 받은 120∼140억 달러를 탕감, 이라크 국경선을 따라 쿠웨이트 영토의 일부분 양도, 그리고 부비얀(Bubiyan)과 와르바(Warba) 섬을 바그다드에 임대해 줄 것 등을 요구하였으나 쿠웨이트는 이것을 거부하였다고 밝혔다. 이라크에 따르면, 석유가 하락에 의해 입은 이라크의 경제적 손실분을 메워줄 쿠웨이트 측의 어떠한 의지도 볼 수 없었다고 주장하였다.

이라크의 쿠웨이트 침공과 그 여파-
1990년 8월 2일: 현지시각 오전 2시 이라크군은 쿠웨이트를 침공하여 점령하였다. 쿠웨이트 통치자인 쉐이크 자베르 3세 알사바(Sheikh Jabir 3 al-Sabah)와 다른 왕족들은 사우디아라비아로 도피하였다. 국제연합안전보장이사회는 이라크의 쿠웨이트 침공에 대한 비난과 즉각적인 철수를 요구하는 결의안 660호를 14개 이사국 전원의 찬성으로 통과시켰다. 미국과 영국, 프랑스는 이라크와 쿠웨이트의 해외자산을 동결하였다. 소련은 이라크에 무기공급을 중단하였다.
1990년 8월 3일: 아랍 연맹 외무부장관들은 5명의 기권, 1명의 결석과 14:1의 표로 이라크의 행위를 비난하였다.
1990년 8월 6일: 국제연합안전보장이사회는 결의안 661호를 13표 전원의 찬성으로 통과시켰는데 이 결의안은 이라크와 점령된 쿠웨이트에 대한 통상금지와 강제적인 제재조치를 강요하는 것이었다. 국가방위를 강화하기 위한 조치로 사우디 국왕 파하드 빈 압둘 아지즈(Fahd Bn Abdull Aziz)는 미국에게 도움을 요청했고 미대통령 조지 부시는 전투기와 군인들을 사우디로 향하도록 명령하였다.
1990년 8월 8일: 바그다드 정부는 쿠웨이트를 합병하였다.
1990년 8월 9일: 파흐드 왕은 이라크의 쿠웨이트 침공을 비난하였다.
1990년 8월 12일: 사담 후세인 대통령은 팔레스타인과 시리아와 레바논의 점령된 아랍영토로부터 이스라엘의 철수와 유엔의 결의에 일치하는 이라크의 쿠웨이트철수를 포함한 평화를제안하였다.
1990년 10월 2일: 런던에 본부를 둔 인권조직인 국제 사면위원회의는 이라크군에 점령된 쿠웨이트에서 발생한 광범위한 체포와 고문과 약식 사형집행에 대한 보고서를 출판하였다.
1990년 11월 8일: 부시는 걸프에 미군 수를 두 배인 400,000명으로 늘리도록 명령하였다.
1990년 11월 15일: 사담 후세인은 이라크와 사우디 간의 지역문제에 대해 그리고 이라크와 미국 간의 광범위한 문제에 대해 회담을 제안했다. 리야드나 워싱턴으로부터 이 제안에 대한 대답은 없었다.
1990년 11월 19일: 이라크는 추가로 250,000명의 군인을 동원하였고 100,000명을 즉각 쿠웨이트로 보냈다.
1990년 11월 27일: 미국의 상원 국방위원회에서 전문가들의 증언은 대다수가 쿠웨이트로부터 이라크를 축출하는데 있어 군사적인 선택보다는 경제적인 선택을 선호하고 있음을 보여주었다.
1990년 11월 29일: 국제연합안전보장이사회는 1991년 1월 15일 이전에 유엔의 결정사항을 완전히 준수하지 않는다면, ‘이 지역의 국제적인 평화와 안전을 회복하기 위해’ 이전의 결정들을 이행할 ‘모든 필요한 조치들’을 허가하는 678호의 결정을 12:2(쿠바와 예멘)와 1개국의 기권(중국)으로 통과시켰다.
1991년 1월 12일: 미 상원은 부시에게 국제연합안전보장이사회의 결의 678호에 따라 미군사력을 사용하는데 53:47로 승인하였고 하원은 250:183으로 승인하였다.
1991년 1월 14일: 이라크 의회는 만장일치로 쿠웨이트로부터 철수보다는 전쟁수행을 결정하였고 후세인 대통령에게 전쟁집행권을 부여하였다.

대립한 군사력-
이라크: 바그다드는 쿠웨이트와 남부 이라크에 545,000명의 병력과 4,200대의 탱크와 150대의 전투헬기를 소유하고 있었고 550대의 전투준비가 완료된 전투기를 보유하였다.
미국이 주도한 다국적군: 미국과 28개 유엔회원국으로 이루어진 다국적군: 아르헨티나(해군), 호주(해군), 바레인(육, 공군), 방글라데시(육군), 벨기에(터키 주둔 공군, 해군), 캐나다(공, 해군), 체코슬로바키아(육군), 덴마크(해군), 쿠웨이트, 이집트(육군), 프랑스(육, 해, 공군), 독일(터키주둔 공군), 그리스(해군), 이태리(해, 공군), 모로코(육군), 네덜란드(해군), 니제르(육군), 노르웨이(해군), 오만(육, 공군), 파키스탄(육, 해군), 카타르(육, 공군), 사우디아라비아(육, 해, 공군), 세네갈(육군), 스페인(해군), 시리아(육군), 아랍에미레이트 연합국(육, 공군), 영국(육, 해, 공군), 425,000명의 미군 가운데 250,000명은 육군이며, 75,000명은 해병대, 60,000명은 해군이며 45,000명은 공군병력이었다. 그들은 2,200대의 탱크와 500대의 전투 헬리콥터와 1,500대의 전투기로 무장되었다. 전쟁이 끝났을 당시 미군의 수는 550,000명을 초과하였다. 영국과 프랑스군은 합하여 45,000명 정도였다. 12개 북대서양 조약 기구의 회원국들은 걸프와 북아라비아해와 오만 걸프와 홍해 그리고 동 지중해에 107척의 군함을 배치하였고 그들 대다수는 유엔의 금수조치를 실시하였다. 미 해군은 전함과 잠수함에 700기 이상의 핵무기로 무장하였다. 아랍과 무슬림 군인의 수는 전체 220,000명이었다. 미국을 제외한 다국적군은 1,200대의 탱크와 150대의 전투 헬리콥터와 350대의 전투기로 무장하였다. 다국적군의 총사령관은 미 육군의 노르만 스와르즈코프(Norman Schwarzkopf) 대장이었다.

공군의 군사행동(사막 폭풍작전 Operation Desert Storm: 1월 16일부터 2월 24일까지)-
1월 16일~23일: 미국 주도하의 다국적군의 공습은 그리니치시간 1월 16일 23시 30분/ 현지시간 1월 17일 2시 30분에 시작되었으며 항공폭격과 미 전함으로부터의 크루즈 미사일 발사가 있었다. 1월 18일 이라크는 이스라엘의 텔아비브와 하이파(Haifa)에 12기의 스커드 지대지 미사일을 발사하였고 4일 후, 3기 이상의 이라크 스커드 미사일이 텔아비브에 떨어졌다. 첫째 주에 다국적군의 공군 출격은 총 12,000횟수에 달했는데 그 중 절반이 전투 출격이었고 크루즈 미사일의 발사는 216기에 달하였다.
1월 24일~30일: 다국적군은 매일 공군 출격의 횟수를 3,000회로 증가시켰다.
1월 31일~2월 6일: 2월 3일 다국적군의 공군 출격 횟수는 총 41,000회에 달했으며 미군이 87%를 감당하였다. 이라크는 미국, 영국, 프랑스, 캐나다, 이탈리아, 이집트, 사우디아라비아와의 외교관계를 단절하였다.
2월 7일~13일: 4번째 주 동안에 다국적군은 이라크의 교량과 도로 등 운송 기간산업의 파괴에 집중하였다.
2월 14일~20일: 2월 15일 이라크는 만일 다국적군이 이 지역을 떠나고 이스라엘이 점령 아랍 영토로부터 철수하고 쿠웨이트의 민족주의자와 이슬람 세력이 쿠웨이트의 장래를 결정하도록 허락한다면, 국제연합안전보장이사회의 결의 660호를 다루는데 동의할 것이라고 언급하였다. 모스크바는 현재 진행되고 있는 전쟁에 대해 새로운 전기를 열어줄 것이라고 평가하였다. 그러나 쿠웨이트와 사우디아라비아, 이집트는 그것을 거부하였다. 부시 대통령은 이라크 국민과 군에게 사담 후세인을 대통령직으로부터 축출할 것을 촉구하였으며 그 다음에 유엔의 결정에 따르도록 촉구하였다. 5주간의 다국적군의 공군 출격 횟수는 총 86,000회에 달하였다.
2월 21~24일: 2월 21일 이라크는 소련의 8개항의 평화안을 환영하였는데, 이 안은 쿠웨이트로부터 철군 의사를 이라크가 명확히 할 것과 정전, 실재적인 철군, 이라크군의 2/3가 떠났을 때, 유엔 금수조치의 해제, 모든 이라크군이 떠났을 때, 유엔 결정의 정지, 유엔군에 의한 정전 감시를 포함하고 있다. 부시는 이 안을 거부하였고 2월 23일 표준시 17시 30분까지 받아들일 12가지 조건을 제시하였는데 이것은 일주일 이내에 이라크의 완전 철수를 포함하고 있다. 2월 23일 표준시 12시에 이라크는 소련의 평화안을 수락한다고 밝힌 후, 쿠웨이트로부터 즉각적이고 무조건적인 철수를 결정했다고 언급하였다. 표준시 16시 30분에 국제연합안전보장이사회는 소련의 안과 미국의 언급 사이에 차이를 메우는데 관심을 갖고 있지 않다고 선언한 서방 국가들과 비공개 회의를 시작하였다. 표준시 18시에 부시는 스와르즈코프 대장에게 이라크를 쿠웨이트로부터 격퇴할 것을 명령하였다. 그 때부터 퇴각하는 이라크 군은 쿠웨이트의 석유 유정을 불태우기 시작하였다.

지상군사행동(암호명 Sabre사막, 2월 24일~28일)-
2월 24일 1시에 다국적군은 지상공격을 개시하였는데 지상군은 2개의 축으로 진격하였다. 다음 날 표준시 21시 30분에 소련은 새로운 평화안을 내놓았고 한 시간 후, 이라크는 그것을 받아들였다. 바그다드는 안전보장이사회의 결의 660호를 수용하는 행동으로서 쿠웨이트로부터의 철수를 명령하였다. 2월 26일 11시 50분에 이라크군은 쿠웨이트 시를 떠났다. 미군은 쿠웨이트의 전장에서 이라크군에 대한 모든 출구를 봉쇄하였다. 퇴각하는 이라크 군인들에 대한 사살은 40시간 후 정전까지 계속되었다. 2월 27일 표준시 5시 30분에 이라크는 쿠웨이트로부터 철군이 완료되었다고 말했다. 그 당시 640개의 쿠웨이트 유정이 불타고 있었다. 다음날 표준시 2시에 부시는 이라크가 무장 해제한다는 조건하에 정전을 명하였다. 표준시 4시 40분 이라크는 동의했으며, 일시적 휴전은 표준시 5시에 발효되었다. 그렇게 함으로써 167일간의 전쟁 이전의 위기와 42일간의 전쟁이 끝났다. 다국적군의 공군 출격의 최종 횟수는 106,000회에 달하였다.
인력 손실- 미 국방부는 5%의 오차율로 약 100,000명의 이라크 전사자들이 발생했다고 발표했다. 이라크 부수상인 사돈 하마디(Sadun Hamadi)에 의하면, 전쟁 초기 26일간 다국적군의 65,000회의 항공 출격에 의한 폭격은 20,000명의 이라크 사망자를 냈고, 나머지 41,000회의 출격으로 12,600명의 사망자가 추가되었다고 언급하였다. 퇴각하는 180,000명의 이라크 12개 사단병력에 대한 공격을 포함하여 지상 군사행동 동안에 발생한 사망자의 수는 25,000~30,000명으로 추산된다. 따라서 전체적으로 거의 57,600~62,600명의 사망자로 추산되고 있다. 전투와 7개월 동안의 사고를 포함하여 미군의 사상자의 수는 376명이었다.

무기손실- 이라크의 30대의 전투기, 다국적군의 21대의 전투기

전쟁비용- 다국적군은 전체 820억 달러로 일본이 130억 달러, 쿠웨이트 220억 달러, 사우디아라비아 290억 달러, 미국이 180억 달러이었다. 사우디아라비아는 220억 달러의 간접비용이 이에 더해졌다. 이라크의 비용에 대해 공개된 공식적인 수치는 없다. 사돈 하마디에 따르면, 전쟁초기 26일 간 이라크 기간산업의 손실은 2,000억 달러에 달하였다.

휴전 후- 국제연합안전보장이사회의 결의 687호는 이라크에게 유엔 금수조치가 해제되기 전까지 대량 파괴 무기의 해체와 중, 장거리 지대지 미사일의 파기에 대한 유엔 감시 계획의 준수를 요구했다.


*걸프 협력회의 Gulf Cooperation Council, GCC :

바레인, 쿠웨이트, 오만, 카타르, 사우디아라비아, 아랍에미레이트 연합으로 구성된 지역협력기구. 걸프 내에서 지역 기구의 구상은 1979년 후반, 메카에서 무장폭동이 발생함에 따라 아라비아반도의 군주국들과의 지역 안보조약을 위해 사우디아라비아의 제안에 의해 발전되었다. 상황은 1980년 9월 이란-이라크 전쟁이 발발하면서 급진전되었다. 걸프 군주국 지도자 6명이 아부다비에 모여 회의하였고, 1981년 5월 26일 걸프 협력회의(GCC)를 설립하게 되었다. 이 기구의 목적은 지역안보, 무기조달, 회원국가들의 국가경제, 그리고 국경분쟁의 해결에 상호 협력하는 것이다.
GCC의 사무국은 리야드에 설치되었으며 쿠웨이트 외교관인 압둘라 비샤라(Abdullah Bishrah)가 사무총장으로 임명되었다. 1982년 6월 걸프협력회의 외무장관회의에서 제1차 걸프전을 끝내려는 시도는 실패하였다. 11월, GCC는 이란의 이라크영토 점령을 비난한다고 공식발표 하였다. 전쟁의 지속으로 GCC는 특히, 국방에 있어 응집력 있는 기구가 되었다. GCC국가들의 공동방위에 따라, 190,000명의 군인과 300여대의 전투기를 소유하게 되었다. 1984년 10월, GCC는 아랍에미레이트 연합국의 사막에서 3주간의 합동 군사훈련을 실시하였다.
11월 GCC 정상회담에서 리야드 기지에 사우디군의 지휘하에 두 여단으로 구성된 ‘신속 배치군’ 설립이 결정되었다. 1년 후, GCC정상회담은 ‘양측, 즉 이란과 이라크’의 권리와 이익을 보호하고 합법화하는 형식으로 전쟁을 끝내고자 노력을 계속할 것이라고 약속하였다. 1987년 말, GCC 정상회담은 전쟁 당사국간 휴전에 대한 598 결의안을 이행하도록 국제연합안전보장이사회에 촉구하였다.
1990년 8월 이라크의 쿠웨이트 침공과 점령에 뒤이어, GCC는 이라크의 침략행위를 비난하였다. GCC는 ‘신속 배치군’을 사우디-쿠웨이트 국경으로 급파하였다. 1990년 12월 GCC 정상회담은 쿠웨이트로부터 이라크의 무조건적인 철수를 요구하였다. GCC 회원국들의 군대와 공군은 이라크에 대항하는 2차 걸프전에 참전하였다. 1991년 3월, GCC 장관들은 확대된 걸프 방어군의 중추적 부분으로서 35,000명의 이집트군인과 20,000명의 시리아 군인의 배치를 위해 이집트와 시리아에게 보조금을 지급하는데 동의하였다. 그러나 이 계획들은 이후 단념되었다.
GCC 국가들은 1990∼1991년 걸프전쟁 동안 이라크의 편에 섰던 야세르 아라파트(Yasser Arafat)가 의장으로 있는 한, 팔레스타인해방기구(PLO)에 대한 보조금을 중단하기로 결정했다. GCC 회원국들은 1993년 9월 워싱턴에서의 PLO-이스라엘 협정에 따라 PLO와 팔레스타인인들에 대한 그들의 배척을 종식하였고 사우디아라비아는 5년간 서안(西岸)과 가자지구를 위한 개발자금 1억 달러를 기부하기로 약속했다. 1994년 GCC는 국경분쟁 지대인 걸프에 위치한 툰브(Tunb)섬들에 대한 이란의 자격에 이의를 제기하였다.


*검은 구월단 Black September Organization :

팔레스타인 단체. 검은 구월단은 와디 핫다드(Wadi Haddad)가 이끌었으며, 1970년 9월 요르단에서 요르단군에 의해 팔레스타인 게릴라들이 패배하자 파타(Fatah)의 전투적 회원들에 의해 조직되었다. 조직의 이름은 창설 당시의 달 이름을 따서 지어졌다. 1971년 10월 카이로에서 요르단 총리인 와스피 탈(Wasfi Tal)의 암살이후, 그것의 소행으로 밝혀진 4명의 팔레스타인인들도 자신들이 ‘검은 구월단(BSO)’에 소속되어 있다고 주장했다. 1972년 9월 5일, 8명의 BSO전사들은 독일의 뮌헨 올림픽 선수촌에서 11명의 이스라엘 선수 중 9명을 인질로 잡았으며 남은 2명의 이스라엘 선수는 투쟁하다 결국 사망하였다. 그들은 자신들과 인질들이 탈 비행기 한 대를 요구했다. 그러나 공항에서 전사들과 안전요원들 사이에서 총격전이 있은뒤 9명의 이스라엘 선수와 5명의 팔레스타인인이 사망하였고, 남은 팔레스타인인들은 체포되었다.
그들의 극적인 투쟁은 6천 명의 기자들과 사상초유의 방송장비에 의해 생생하게 보도되었다. 3일 후에 이스라엘은 이들에 대한 보복으로 시리아와 레바논의 난민촌을 공습해서 200~500명 정도의 민간인을 살해하였고, 후에 이스라엘 정보부 모사드(Mossad)가 뮌헨작전에 관련된 것으로 추정되는 팔레스타인인 12명을 암살했다.

* 고귀한 성소 Noble Sanctuary
예루살렘 내의 이슬람 성소. 예루살렘 내 구 시가지에 위치한 모리아 산에(Mount Moriah) 건설된 고귀한 성소라고 불리는 바위의 돔 사원과 알 아끄사 모스크의 면적은 0.14평방 킬로미터로써, 구 시가지의 반 정도를 차지하고 있는 무슬리 지역의 1/3을 차지하고 있다. 바위의 돔 사원 중앙에 있는 바위가 바로 예언자 무함마드가 대천사 가브리엘에게 인도되어 날개 달린 동물에 의해 하룻밤만에 도착하였던 그 장소 이다. 이 바위에서 무함마드는 빛의 사다리를 타고 하늘로 승천하였다 내려 왔다고 믿어 지며, 알라의 명령으로 신자들은 무함마드와 같은 기도하는 예식을 치르고 있다.
바위의 돔 사원 안에 존재하는 바위는 유대인의 전설 속에도 등장하는 세상의 시작이 되는 바위이자, 유대 사원 안에 존재하였던 성물이다. 돔을 둘러싸고 있는 팔각형의 건물 형태는 훗날 성묘의 교회로 이름을 바꾼, 고대 세계의 중심을 상징하였던 부활의 교회를 모델로 했다고 간주된다. 따라서 바위의 돔 사원은 유대교와 기독교, 이슬람이 모두 종합되어 있는 건축물이다. 바위의 돔 사원은 691년 다마스커스를 수도로 하는 우마위야 왕조의 통치자 압둘 말릭 이븐 마르완에 의하여 건설되었다. 십자군이 예루살렘을 지배하는 기간 동안에는 교회로 그 역할이 변화하여, 주님의 사원(Temple of the Lord)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되었다.
알 아끄사 모스트는 전통적인 모스크 양식으로 건설되었다. 알 아끄사 모스크 또한 모세와 예수에게 봉헌되었던 자리에 지어졌다. 1969년 8월 호주의 기독교 근본주의자인 마이클 로한(Michael Rohan)에 의한 알 아끄사 모스크 방화는 무슬림 세계를 충격에 빠뜨렸고, 무엇보다도 이슬람 회의 기구(the Islamic Conference Organization)의 설립을 촉진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요르단에 의한 동예루살렘의 합병에 따라 1950년에 요르단의 국왕은 고귀한 성소를 관리해야 하는 책임을 맡게 되었다. 1967년 6월에 이스라엘이 동 예루살렘을 지배하게 되었을 때 이스라엘은 요르단의 책임을 이어 받아 고귀한 성소를 관리하게 되었으며, 이 같은 사항은 1994년 10월에 체결된 PLO에 의해 격렬하게 논의 되었던 요르단-이스라엘 평화조약에도 확인되어 있다.
* 게마라 Gemara

유대교에서 구전으로 내려오는 율법서로, 미슈나(Mishna)의 내용을 보충해 주는 책이다. (탈무드 참고)

*골란 고원 Golan Heights :

시리아 지역. 454평방마일로 1175㎢의 면적. 골란고원은 유대인 정착촌과 시리아 드루즈파(Druz) 지역 사이를 동등하게 나누고 있다. 세계 1차 대전이래, 시리아 지역이었던 골란고원의 서부 국경지역은 훌라계곡(Hullah Valley)과 티베리아(Tiberia)호수(갈릴리 호수)가 굽어보이는 지역으로, 1948년 이스라엘이 건국하자 시리아가 이 지역을 요새화하였다. 골란고원은 이 때부터 이스라엘인들에 대한 저격과 포 공격의 중심지가 되었다. 1967년 아랍-이스라엘전쟁에서 이스라엘은 요르단을 패배시킨 후, 6월 9일 골란고원을 공격하여 다음 날 그곳의 중심도시인 꾸나이트라(Qunaitra)를 점령하였다. 그날 이후, 즉시 정전이 발표되었고 정전의 효력이 발생하였다. 전투 이후, 이스라엘은 드루즈파의 주된 거주지였던 이곳의 시리아인구 250,000명을 추방하여 그 수를 약 8,000명(주로, 드루즈파)으로 감소시켰다. 이어서 이스라엘은 골란고원 합병을 선언하였다.
1969년, 시리아는 팔레스타인 게릴라들에게 이 지역에서 행동의 자유를 더욱 확대해 주었다. 1970년 6월, 미국의 평화안에 이스라엘군의 골란 철수에 대한 언급이 없었으므로 시리아는 그 평화안을 즉각 거부하였다. 1973년 10월 아랍-이스라엘 전쟁에서 10월 6일 개시한 시리아의 이스라엘에 대한 공격은 골란고원을 되찾는 데는 역부족이었다. 시리아는 아무런 성공도 이루지 못했으며 상황을 반전시키는 데에도 실패하였다. 1980년 10월 시리아-소련 우호조약이 서명된 후, 시리아의 대변인은 점령된 골란고원을 합병시키려는 이스라엘의 어떠한 시도도 반대하며 시리아의 권리를 보호하기 위해서는 어떠한 조치나 방법도 감행할 것이라고 언급하였다. 그러나 1981년 12월 14일 이스라엘 정부가 골란고원까지 이스라엘법을 확장시키고 골란고원 합병법을 제정하여 의회의 비준을 받게되었을 때도 시리아는 다만 이스라엘의 행위를 비난하고 국제연합안전보장이사회에 이 사건을 상정한 것 이외에는 어떠한 행동도 취하지 못하였다.
이스라엘은 이곳에 유대인 정착촌 건설정책을 계속 추진하였고 1992년에는 25개의 정착촌이 건설되었다. 제2차 걸프전(1991) 이후 미국에 의해 시작된 중동평화 과정에 시리아의 합류를 위해 미국은 시리아에 골란고원에서의 이스라엘 철수가 차후 양측의 회담 논의의 주요한 주제가 될 것을 보장하였다. 1994년 중반 양측은 양국 관계의 정상화와 더불어 이스라엘의 골란고원 철수와 연관된 실제적 회담에 들어갔으나 고(故) 아사드 시리아 대통령의 ‘영토와 평화의 교환’ 주장과 이스라엘의 ‘안보와 평화의 교환’ 주장이 합의점을 찾지 못한 채, 팔레스타인과 이스라엘 간 투쟁의 과열로 인해 아직 골란고원 반환문제가 논의되지 못하고 있다. 골란고원은 이스라엘의 생명 샘인 갈릴리 호수에 많은 수자원을 공급하고 있어 물이 부족한 이스라엘로서는 이를 무조건적으로 반환하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골파이가니, 무함마드 레자 무사비 Golpaygani, Muhammad Reza Musavi (1898~1993) :

이란의 종교 지도자. 쉬아파 가문으로 골파이간에서 출생한 골파이가니는 어렸을 때 양친을 여의고 누이에 의해 양육되었다. 16세에 그는 아야톨라 압둘 카림 하이리 야즈디(Ayatollah Abdull Karim Hairi Yazdi)의 제자가 되기 위해 아락(Arak)으로 간 후, 다시 1922년 하이리 야즈디와 함께 쿰(Qom)으로 옮겼다. 아랍어와 신학공부를 마친 후, 그는 그곳에서 이슬람 법리학을 가르치기 시작했다.
1937년 하이리 야즈디의 사망 후, 골파이가니는 당시 아야톨라 무함마드 후세인 보루제르디가 이끌던 종교 성직자 계급제도에 높은 지위로 올라갔다. 골파이가니는 보수주의자였다. 1961년 보루제르디가 사망한 후, 3인의 아야톨라들인 골파이가니, 쉐합 알딘 마라쉬 나자피, 그리고 무함마드 카젬 샤리아트 마라디가 보수주의 성직자들의 지도력을 공유하게 되었다. 그들은 일정한 상한선 이상의 토지를 국가에 귀속시킨다는 토지개혁법에 반대하였으며, 이것은 골파이가니가 정권의 반대자인 아야톨라 루홀라 호메이니(Ayatullah Ruhollah Khomeini)와 가까워지는 계기가 되었다.
1964년 호메이니가 망명되었을 때, 골파이가니는 쿰에 있는 유명한 파이지야(Fayziyah) 신학교의 행정을 맡았다. 그는 이슬람 법학자들에 의한 통치의 개념을 제안하였는데 이것은 이슬람 사회에 정신적, 세속적 지도권을 법학자들에게 위임하자는 내용이다. 후에, 그의 제안은 1979년 제정된 이란 이슬람 공화국(Islamic Republic of Iran) 헌법에 반영되었다. 골파이가니는 종교기금으로 추종자들의 수입액의 1/5을 받았다. 이 기금으로 그는 이란과 해외에 자선계획들 즉, 진료소, 병원, 고아원, 종교 교육센터 등을 건축, 유지하는 계획을 세우고 이를 실행하였다. 이란 이슬람 혁명 후, 그는 결정적인 순간마다 새 정권을 지지하였다. 1980년대 중반 호메이니의 계승자 문제에 대해 보수주의자와 진보주의자들 간에 분열이 증가하였을 때 보수주의자들은 골파이가니를 지지하였다. 호메이니가 1989년 계승자를 지명하지 않고 사망하였을 때, 보도에 의하면 의회(Assembly of Experts)는 그에게 최고 지도자의 지위를 제의하였으나 건강이 좋지 않았던 그는 이를 거절하였다. 20세기 쉬아파의 모든 지도급 인사들과 밀접한 관계를 가졌던 성직자로는 골파이가니가 거의 유일한 사람이었다.


*구쉬 에무니움 Gush Emunium (히브리어-신실한 신자 단) :

이스라엘의 정치 종교 운동. 1974년 초에 설립된 구쉬 에무니움은 1967년 6일 전쟁 후, 설립된 단체로 점령지 아랍 영토에 유대인 정착촌을 주창한 국가종교당(NRP)내의 소수 혁신파에서 싹텄다. 1970년 국가종교당은 헤브론 근처 키르야트 아르바(Kiryat Arba) 지역에 승인되지 않은 정착촌을 건설함으로써 대중적 관심을 끌었다. 내각에서의 NRP의 참여와 노동당 정부가 1967년 전쟁 후 6개월 이내에 점령지역에 식민지화 계획을 제안했다는 사실은 정착 민들에 대한 어떠한 조치도 취하지 않을 것임을 의미하였다. 1977년 5월 리쿠드당(Likud) 정부의 정착촌 건설 묵인은 유대아(Judea)와 사마리아(Samaria) 지역에 대해 역사적인 유대 소유권을 강력히 주장하는 구쉬에게 용기를 주었고 유럽 유대인 랍비 위원회가 이를 승인했다.
리쿠드당 정부 초기 3년 이내, 구쉬는 서안(West Bank) 지역에 20개의 비합법적인 정착촌을 건설하였다. 구쉬 무장단은 이스라엘-아랍 간 새로운 전쟁을 유발하기 위해 바위 돔(Dome of the Rock)과 알아크사 사원(al Aqsa Mosque)을 폭파하려고 계획하였다. 그러나 5월 헤브론에서 6명의 유대인 무장단원들이 죽자, 구쉬 무장단은 이에 대한 보복으로 1980년 6월 2명의 팔레스타인 시장을 공격하기로 계획을 변경하였다. 1982년 4월 야미트(Yamit) 정착촌을 포함하여 시나이(Sinai)에서 이스라엘의 마지막 철군이 대중의 항의를 거의 불러일으키지 못하자 구쉬 무장단은 그들의 이슬람 성지 파괴계획을 연기하였다.
1983년 7월, 헤브론 지역 유대 정착민에 대한 공격은 키르야트 아르바의 유대 정착민들에 의한 보복을 야기했다. 이것은 또한 1984년 초, 이스라엘 버스에 대한 공격을 야기했으며 구쉬 무장단은 5대의 아랍버스에 대한 폭발로 응답하였다. 1984년 4월, 구쉬 무장단원들에 대한의 체포로 무슬림 성지에 대한 그들의 계획이 드러났다. 1987년 12월, 팔레스타인의 민중봉기 이후, 구쉬의 영향력이 5만 명의 회원을 확보하면서 최정점에 달했으나 그 후 그의 세력은 점차 기울어지기 시작하였다. 구쉬는 1993년 9월, 이스라엘-팔레스타인 해방기구 간 오슬로 협정(Oslo Agreement)을 반대하였고 구쉬의 무장단원들은 1994년 2월 헤브론에서 기도하고 있던 29명의 팔레스타인인들을 사살한 바루취 골드스테인(Baruch Goldstein)을 지지하였다.


*국가수비대 Saudi Arabian National Guard, SANG :

사우디아라비아의 왕실에 가장 충성스러운 부족들 중에서 충원된 국가 수비대는 이크완(Ikhwan)이 해체된 후, 1932년에 조직된 백색 수비대(White Guard)의 새 이름이다. 1962년 9월, 북예멘 왕조의 붕괴의 영향으로 개명과 재무장, 재훈련의 필요성이 제기되었다. 국가 수비대는 왕자인 칼리드 이븐 압둘 아지즈(Khalid ibn Abdul Aziz)의 지휘 아래 놓여 있었다. 국가 수비대의 요원은 주요 도시 중심가의 외곽에 거주하며 장교들은 왕가 거주지 밖에 거주한다. 파이잘 이븐 압둘 아지즈(Faizal ibn Abdul Aziz) 왕은 군과 국가 수비대의 합병에 대한 제안을 거부하였는데, 그 이유는 두 개의 분할된 무장 병력이 왕국 내의 왕족들 간의 상호경쟁에서 균형을 유지시켜 주기 때문이다.
왕국의 가장 신뢰할 수 있는 무장군대인 국가 수비대는 정권을 위협에서부터 파업, 데모, 부족 반란, 군의 모반 등 모든 것을 처리하고 있다. 국가 수비대는 메카에서 발생한 이슬람 원리주의자들의 폭동을 진압한 선봉군이었으며 1979년 하사(Hasa)의 동부 주에서 발생한 쉬아(Shia)들의 데모를 진압하는 일에도 선봉군이었다. 파하드 이븐 압둘 아지즈(Fahd ibn Abdul Aziz)가 1982년 즉위함에 따라 황태자인 압둘라 이븐 아지즈(Abdullah ibn Aziz)가 국가 수비대의 사령관이 되었다. 1994년 국가 수비대의 병력은 현역 5만7천 명과 2만 명의 예비군이 있다. 무기는 1천1백 대의 장갑차와 70문의 포를 보유하고 있다.


*국경 선린 우호 조약 Treaty of Frontier and Good neighbourly Relations (이란-이라크) :

1975년 3월 6일, 이라크의 부통령인 사담 후세인(Saddam Husein)과 이란의 왕인 무함마드 레자 샤 팔레비(Muhamad Reza Sha Pahlavi)는 알제리아의 알제리에서 협약을 맺었다. 양국은 양국의 경계선을 샤트 알 아랍(Shattal-Arab)강의 중앙 계곡선을 따라서 정하기로 합의했다. 국경 선린 우호조약(Treaty of Frontier and Good neighbourly Relations)은 알제리의 협약에 근거를 두고 있으며, 6월 13일 바그다드에서 서명되었고, 양측에 의하여 1975년 9월 17일에 비준되었다.
공동위원회가 이란의 까세르 에 쉬링(Qasr-e Shiring)지역의 새로운 경계선을 정하도록 설치되었으며, 이는 이라크가 1913년 콘스탄티노플 의정서에 위반했다는 이란의 주장에 따라서 이뤄졌다. 그리고 이라크는 샤트 알 아랍(Shatt al Arab) 경계선을 강의 동쪽 둑으로 정했으며, 지금까지 모든 수로를 자신의 영역으로 주장해왔다. 협약의 전반에 걸쳐서 이란의 요구가 반영되었고 이란의 승리를 의미하였다. 이 협약은 60년 이상 유지되었으며, 탈웨그(thalweg) 원칙이 샤트 알 아랍 지역에 적용되었다. 이란의 쿠르드 반군 지원에 의해 피해를 당하고 탈진한 이라크는 이란의 이라크 쿠르드 지원 중단을 조건으로 이란의 요구를 인정하였다.

* 국민협약(레바논) 1943, National Pact (Lebanon)

헌법 협정.
1943년 3월, 영국의 재촉을 받은 자유프랑스인민(the Free French)은 1941년 6월 영국의 지원과 함께 친독일 프랑스 정부로부터 레바논을 탈환했던 샤를 드 골(Charles de Gaulle)이 이끌었다. 자유프랑스인민은 1926년 레바논 헌법을 복구하였다. 베이루트의 영국 대표 스피어스(Gen. Edward Spears)는 의석 배분에 있어서 앙숙관계에 있던 무슬림과 기독교인 사이를 중재하였다. 그는 기독교인이 전체 인구의 54%라는 것을 보여주는 1932년 인구조사를 바탕으로 무슬림과 기독교인의 의석수를 6:5의 비율로 할 것을 권하였다. 무슬림 지도자 리아드 솔(Riad Solh)과 기독교 지도자 비샤라 쿠리(Bishara Khouri)는 해당 내용을 국민협약의 한 부분으로 인정하였다. 이를 통해 공화국의 대통령은 반드시 마론파 기독교인이 되어야 하며, 수상은 순니 무슬림, 의회 대변인은 쉬아 무슬림, 대리인은 그리스 정교인이 되어야 한다고 규정되었다.
무슬림 지도자들은 기존 레바논의 국경을 받아들였고, 대 시리아 재건설을 위한 시리아와의 통합은 단념하였다. 대신 정당의 상대 기독교인은 오직 아랍어만을 공화국의 공식 언어로 채택한다는 것과, 레바논이 유럽을 비롯한 어떠한 외국으로부터도 통제받지 않으며 세계에 아랍의 모습을 소개해야 한다는 것에 동의했다. 몇 달 후, 국민협약은 자유프랑스인민의 장군 조르주 카르투에 의해 법령의 자격을 갖게 되었다.
1961년 77석의 의석수는 기독교인석 54석과 무슬림 의석 45석인 99석으로 증가하였다. 의석수는 30년 동안 지속되었고, 그 뒤 1989년 민족 화해 헌장의 결과로 의석수가 120석까지 증가하였으며, 이러한 비율은 기독교인과 무슬림 사이의 동률을 바꾸었다.
레바논: 입법부 참고.

*국제연합 교전중지 감시군 United Nations Disengagement Observer Force (1974∼) :

1974년 3월 31일 골란고원 사이에 대치하고 있는 이스라엘과 시리아군의 전쟁 중지 협약에 뒤따라서 UNDOF는 격리지역을 설정하고 양측의 군대 규모를 감시하는 기능을 갖는다. 1,100명의 UNDOF는 3개의 유럽국가와 캐나다로부터 파견되었다.


*국제연합 긴급파견군 United Nations Emergency Force (1957∼1967) :

수에즈 전쟁 동안, 국제연합총회는 1956년 11월 4일 ‘국제연합 긴급파견군(UNEF)’을 창설하기로 결의했다. UNEF는 분쟁당사자들의 휴전을 감독하기 위해 분쟁에 이해 관계가 없는 나라들의 군대로 이루어졌다. 11월 7일 휴전이 진행되고 UNEF군대가 이집트에 도착하자, 영국과 프랑스군대는 12월 23일 철수하기 시작했다. 1957년 3월 8일까지 이집트에서 이스라엘군의 철수를 완료시키고 UNEF는 수에즈운하와 이집트가 관리하는 가자지역(Gaza Strip) 내에서만 활동하게 되었다. 아카바(Aqaba) 만을 통해 운항하는 이스라엘 선박 운행에 대한 안전보장이 요구되었다.
9년 후, 이 지역에 대한 긴장은 다시 고조되었다. 이스라엘은 이집트와 군사 동맹을 맺은 시리아에게 이스라엘에 대한 시리아의 게릴라 공격이 계속된다면 강력하게 보복하겠다고 경고했다. 1967년 3월 중반, 소비에트와 시리아, 이집트 정보기관들이 이집트 대통령 가말 압둘 나세르에게 시리아에 대한 이스라엘의 공격이 임박했다고 경고했다. 5월 18일, 나세르는 국제연합 사무총장에게 UNEF의 이집트에서의 철수를 요청했고, 사무총장은 나세르의 요구를 수락했다. UNEF는 해당 정부가 요청할 때까지만 배치된다는 조건이기 때문에 이집트 대통령이 철수 요구권을 가지고 있었다. 아카바 만의 입구인 샤롬 알 쉐이크(Sharom al-Sheikh)의 UNEF군의 철수와 함께 나세르는 이스라엘이 운항하는 수로를 봉쇄하였다.


*국제연합안전보장이사회 결의안 242 United Nations Security Council Resolution 242    (1967) :

1967년 11월 22일 만장일치로 채택.
중동지역의 불안정한 상황에 대해 계속하여 관심을 가진 안전보장이사회는 ‘전쟁을 통한 지역 점령을 불허, 또한 그 지역 모든 국가들이 안전한 삶을 살 수 있도록 지속적인 평화를 위해 노력할 필요성’을 강조한다. 또한 국제 연합헌장을 수용하는 모든 국제 연합 가입국은 국제 연합헌장 2항에 따라 행동할 것을 강조한다.
1. 국제 연합헌장의 이행은 다음 두 가지 적용을 포함하여, 중동지역의 영구적 평화 설립을 필요로 한다.
(1)최근 분쟁에서 점령된 지역으로부터 이스라엘 무장군의 철수
(2)교전상태 종결, 독립국 인정 및 존중, 이 지역 모든 나라들의 영토 보전 및 정치적 독립, 그리고 군사위협으로부터 안전하고 승인된 국경 내에서 평화롭게 살 수 있는 권리
2. 필요성 확인
(1)이 지역의 국제 수로 항해자유의 보장
(2)난민 문제의 올바른 해결
(3)비무장지대 설치를 포함한 조치를 통해서 지역분쟁을 막고, 이 지역 모든 국가들의 정치적 독립 보장
3. 중동지역에서 국제연합 해결안의 규정 원칙에 따라 평화적 합의를 성취하고자 하는 노력을 도와주고 협정을 촉진시키기 위해 관련 국가들과의 접촉을 유지하기 위한 특사 임명을 사무총장에게 요구
4. 사무총장은 안전보장이사회가 가능한 한 빨리 특사를 임명하도록 문서를 발송할 것


*국제연합안전보장이사회 결의안 338 United Nations Security Council Resolution 338 (1973. 10) :

1973년 10월 22일 중국 기권 하에 14:1로 채택
1. 안전보장이사회는 현재 분쟁 중인 모든 당사국은 안보리 결의안 수용 후, 12시간 이내에 모든 분쟁을 중지하고 군사 행동을 중단할 것
2. 안전보장이사회는 모든 당사자들이 휴전 즉시 안전보장이사회 결의안242(1967)를 이행할 것
3. 안전보장이사회는 휴전과 동시에 중동지역에서의 영구적 평화를 이룩하도록 적절한 후원 아래 관련당사국들 사이에서 협상을 시작하도록 촉구함


*국제연합안전보장이사회 결의안 598 United Nations Security Council Resolution 598 (1987) :

1987년 7월 20일 만장일치로 채택. 10개 조항 해결안은 다음 활동 조항들을 포함한다. 국제 연합헌장의 39조, 40조에 따라 안보리는 다음과 같이 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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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목
<ㄱ> 가쉬미 - 국제연합안전보장이사회 결의안 598
<ㄴ> 나본 - 노루즈
<ㄷ> 다국적군 (레바논내) - 딤미
<ㄹ> 라디노어 - 레바논-이스라엘 평화협정 (1983)
<ㅁ> 마나마 - 무사디끄
<ㅂ> 바그다드 - 베이루트
<ㅅ> 사나 - 샤레트
<ㅇ> 아구다트 이스라엘 - 아랍-이스라엘 전쟁
<ㅈ> 자이드파 - 중동평화회담 (마드리드 1991)
<ㅊ> 천연가스 - 총인민회의(예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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