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회원가입   사이트맵
 
교당/기관찾기
 
 
<ㄴ> 나본 - 노루즈
<ㄴ>

* 나본, 이츠하크 Navon, Yitzhak (1921- )
이스라엘 정치인, 대통령 역임(1978-83). 예루살렘에서 오랫동안 터를 잡고 살아온, 세파르디 유대교(Sephardic Jewish) 집안에서 태어난 나본이 유년기를 보내고 있을 때, 시오니스 운동이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었다. 나본은 1940년대 초에 하가나(Haganah-군사조직)에 가입하여 정보부에서 근무하였으며, 이스라엘의 건국 이 후 해외 근무에 들어갔다. 아르헨티나에서 외교관으로 잠시 근무한 후 모세 샤렛(Moshe Sharett) 외무부장관의 정치 비서로 활동하였으며, 1952년부터 1963년까지는 다비드 벤-구리온(David Ben-Gurion) 수상의 비서로 일하며 상당한 영향력을 갖게 되었다.
1965년 라피(Rafi)에 가입한 나본은 같은 해 이스라엘 국회에 선출되었다. 국회에서의 13년 동안 부의장직을(1966-73) 수행하였으며, 외교 안보 협의회의 의장으로(1974-77) 활동하였다. 1978년 우익 세력이 다수를 차지하고 있던 국회에서 선거를 통하여 대통령직에 선출 되었다. 1984년 나본은 노동당 당원으로써 국회로 돌아왔으며, 문화 교육부 장관직을 수행하게 되었다. 1988년 재선에 성공하였으며, 나본은 1990년까지 국회의원직을 유지하였다.


* 나불시, 술레이만 Nabulsi, Suleiman(1908-76)

요르단 정치인. 수상 역임(1956-57). 요르단 살트(Salt) 지역의 유력 가문에서 태어난 나불시는 베이루트 아메리칸 대학에서 법과 사회학을 전공하고 졸업하였다. 그는 공무원으로 채용 되어, 국가 소유의 농업 은행의 점장으로 1946년까지 근무하였다. 이후 1947년부터 1949년, 1950년에서 1951년까지 두 차례 재경부 장관직을 수행하였다.
1953년부터 1954년까지 나불시는 주 영국 요르단 대사로 근무 하였는데, 이때의 경험이 요르단으로 돌아온 그가 아랍 민족주의자 이자, 반 시오니스트로써 활동하는데 큰 영향을 주었다. 이 같은 그의 변화는 요르단 국왕 후세인 이븐 탈랄(Hussein ibn Talal)과의 관계를 소원하게 만들었다. 나불시는 요르단의 수도 암만에서 추방되어 지방으로 쫓겨나게 되었다. 그럼에도불구하고 그는 의연하게 민족 사회주의 정당(NSP)를 창당하였고, 정당 지도자로 선출 되었다. 나불시는 바아스 주의자들과 사회주의자 전선과 함께 선거를 위한 동맹을 성사 시킨 후, 민족 전선(NF)을 설립하였다. 이와 같은 노력으로 1954년 가을 선거에서 총 의석수 40석 중 과반 이상을 차지하고자 했으나 선거 조작으로 인해 실패하였다. 나불시가 이끄는 NF는 총 12석을 확보 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NF의 지도부는 의회에서 가장 큰 정파를 형성하게 되었고, 나불시는 1955년 12월에 있었던 바그다드 조약에 후세인 왕이 서명하는 것을 받을 수 있었다. 또한 나불시는 국회를 해산 시키는 데에도 성공하였다.
1956년 치러진 자유선거에서 NF는 16석의 의석을 획득하였고, 나불시는 정부를 수립하게 되었다. 그는 아랍 군대와 함께 팔레스타인을 지배하고 있었던 국가 방위대(National guard)를 합병함으로써, 35,000명에 이르는 강력한 군대를 조직 하였다. 1948년 의회가 영국-요르단 조약을 파기 하였으나, 왕권은 이에 반발 하지 못했다. 그러나 의회과 소련과 외교관계를 맺기로 결정하고 사회주의 전선이 주간 신문을 발행하기로 하자, 후세인 국왕은 사회주의자들의 요르단 사회로의 침투에 대한 위험성을 경고하고 나섰다. 나불시는 후세인 국왕의 충고에 따라 사회주의자들의 출판을 금지하였다.
1957년 4월 국왕은 알리 아부 나와르(Ali Abu Nawar)가 이끄는 자유 장교단의 도발에 저항하였다. 국왕은 이 후 나불시의 정부를 해산 하였고 계엄령을 발효 하였으며 국회와 의회 정당, 노동조합을 해산 시켰다. 또한 나불시는 가택 연금 조치하였다. 나불시는 한차례 석방되었는데, 이때 그는 NSP의 지돌자로써의 활동을 재개 하였으나, 또다시 군 계엄령에 의하여 그의 활동 범위는 제한되었다. 요르단 군대와 PLO가 충돌한 1970년 나불시는 PLO를 지지하나, 1970년대 중반에 이르러 왕권에 충성하는 쪽으로 노선을 바꿈에 따라 1976년 상원 의원에 지명되게 된다.



*나블루스 Nablus :

서안(West Bank)지역의 도시로 Nabulus라고도 함. 인구는 약 12만 명(2007년 기준). 네아폴리스 Neapolis(새로운 도시)라는 그리스 이름을 가진 고대 정착지인 나블루스는 두 개의 산 사이에 위치하고 있다. 이 두 산은 하나님이 모세에게 계시를 했다는 전설을 가지고 있는 제리짐(Jerizm) 산과 모세의 율법에 도전한 자들에게 저주를 퍼부었다는 에발(Ebal) 산이다. 나블루스는 아브라함과 야곱과 관계된 성서의 정착지인 쉬셈과 자매 도시이다.
로마황제 베스파시안(69~79년 통치)에 의해 72년에 건설된 나블루스는 제르짐 산과 에발 산 동쪽과 서쪽의 대문으로서 번창하였는데 특히 나블루스는 샘물의 공급이 풍부하였다. 636년 아랍무슬림들에 의해 함락된 나블루스는 1917년까지 무슬림 통치하에 남아 있었다. 1099~1187년까지는 이 지역이 십자군에 의해 통치되기도 하였다. 1927년 엄청난 지진이 발생해 도시의 대부분이 파괴되었다.
1930년대 나블루스는 유대인의 팔레스타인으로 이주에 대해 아랍인들의 저항을 이끄는 중심지였으며 1936년 아랍 최고 위원회(AHC)가 탄생된 곳이기도 하다. 1948~1949년 팔레스타인 전쟁으로 나블루스는 요르단의 일부가 되었고 후에 이스라엘에 대항하는 팔레스타인 게릴라들의 활동 중심지가 되었다. 1967년 유대 민병대들이 도시 근처 엘론 모레흐(Elon Morh)에 정착촌을 건설하였다.
도시의 산업은 올리브 오일과 비누 생산과 수공업이 대부분이다. 관광지로는 야곱의 벽과 요셉의 무덤 그리고 비잔틴 교회의 폐허 위에 건설된 알 카비르(al-Kabir) 모스크와 알 누르(al-Nur) 모스크가 있다.


*나사렛 Nazareth :

이스라엘의 도시. 인구 72,000여명(2009년 기준).
성경의 신약은 유대 정착촌인 나사렛을 여러 차례 언급하고 있는데 이 도시는 요셉의 마을이며 예수가 어린 시절을 보냈던 곳이라고 언급하고 있다. 나사렛은 기독교를 313년 국교로 채택하고 나사렛 교회를 세웠던 로마 황제 콘스탄틴(Constantine, 306~37년 통치) 이후 기독교인의 성지 순례의 중심지가 되었다.
나사렛은 십자군 원정 기간 동안, 가장 중요하게 여긴 도시 중의 하나였으며 1099년 십자군은 나사렛을 정복하였고 그 곳을 교회의 중심지로 바꾸어 놓았다. 그러나 살라훗 딘 아유브(Salahddin Ayyub, 1169~93년 통치)가 1187년 십자군을 패퇴시켰을 때, 이 도시의 기독교의 영향력은 급속히 감소하였다.
1517년 팔레스타인을 정복한 오스만인들은 기독교도들을 나사렛에서 내쫓았다. 이러한 정책은 에미르 파크르 알 딘 만(Emir Fakhr al-Din Maan, 1591~1633년 통치)이 그의 왕국을 레바논 산에서 갈릴리 아래쪽까지 팽창시켰을 때 변화되었다. 기독교인들의 나사렛으로의 귀환이 허가되자, 프란체스코 수도사들은 1620년 옛 십자군들 지역에 재 정착하였고 1730년 교회를 건축하였다. 그 교회는 1909년, 성 수태 고지의 로마 카톨릭 교회인 바실리카 양식의 교회당으로 바뀌었다. 이 교회당에는 성 수태 고지의 동굴이 있는데 신약에 따르면 대 천사 가브리엘이 동정녀 마리아에게 나타나 그녀가 예수의 어머니가 될 것을 알려준 곳이라고 한다.
나사렛의 다른 종교 유적지로 성 마리아의 우물과 요셉의 목공 가게 자리에 있는 요셉 교회, 예수가 설교한 유대교당 자리에 있는 유대교 교회와 예수의 부활 후 제자들과 정찬을 한 멘사 그리스도 교회(그리스도의 원탁)가 있다.
1947년 유엔의 분할안에 의해 아랍지역으로 포함되었던 나사렛은 1948년 시오니스트군에 의해 점령되었다. 나사렛은 현재, 이스라엘 내의 가장 큰 아랍 도시이며 중요한 상업중심 도시이다. 나사렛은 지방 정부 선거에서 연속적으로 당선된 이스라엘 공산주의자들의 요새이다.


*나일강 Nile River :

가장 먼 원류로부터 지중해에 이르기까지 길이가 4,150마일/6,680km이며 수단의 카르툼에서 청 나일강과 백 나일강이 합류하여 형성된 진정한 의미의 나일강은 1,875마일/3,020km이다. 세계에서 가장 긴 강인 나일강은 적도의 남쪽 고지대에서 발원하여 북동 아프리카를 관통하여 지중해로 흐르며 1,294,00평방마일/3,351,000㎢의 물을 배수한다. 카르툼과 아스완 사이에 나일강은 6개의 폭포를 가지고 있는데 그 높이는 935피트/285미터에 이른다. 나일강의 홍수는 이디오피아의 심한 계절적 강우에 의해 유입되는 청 나일강에 의해 야기된다. 나일강을 이용하려는 노력은 6천년 전부터 시작되었다. 19세기말 몇 개의 댐과 급수시설의 건설은 사계절을 통한 농업이 가능하도록 만들어 주었다. 아스완 댐은 1902년 완공되었고 아스완 하이 댐은 1971년 완공되었다. 카이로를 지나면 나일강은 주로 다미에타와 로세타 운하 사이로 나뉘는 델타로 흘러든다. 나일강은 농업뿐만 아니라 운송에 있어서도 중요한 수단이 되고 있다.


*나자프 Najaf :

이라크의 도시. 인구 56만 명(2008년 기준).
마쉬하드 알리(Mashhad Ali)라고도 불림. 나자프는 칼리프이자 예언자 무함마드의 사촌이며 사위인 이맘 알리 이븐 아비 탈립(Imam Ali ibn Abi Talib, 656~661년 통치)의 무덤이 있는 곳이다. 쉬아파가 알리를 예언자 무함마드의 사후 유일한 합법적 계승자라 간주한 이래, 그들은 나자프에 있는 그의 무덤을 메카와 메디나 다음의 가장 성스러운 성소로 간주하고 있다.
이 도시는 칼리프 하룬 라쉬드(Harun Rashid, 786~809년 통치)에 의해 건설된 것으로 간주된다. 그때부터 이 도시는 드라마틱한 흥망성쇠를 경험하게 된다. 나자프는 1051년 바그다드로부터 온 순니파 광신도들에 의해 불탔으나 곧 재건되었다. 오스만 통치(1638~1918)하에서 나자프는 두 번이나(1806, 1810) 와하비 침략자들에 의해 약탈당했으며 이 때, 알리 무덤의 모든 장식물들이 해체되었다. 쉬아파 무즈타히드들의 지도하에 시민들은 순니파 오스만에 대항하여 1842, 1852, 1854년 반란을 일으켰으나 모두 진압되었다. 1920년 지역 주민들은 영국의 위임통치에 대해 강력하게 저항했으며 또한 파이잘Ⅰ세 이븐 후세인 왕을 영국의 꼭두각시로 간주하여 반대하였다.
1958년에 시작된 독립공화국 시대에 나자프는 1968년 권력을 잡은 바아스당의 세속 정권에 가장 강력하게 반대하는 도시였다. 1965~1978년까지 나자프는 망명자 아야톨라 루홀라 호메이니의 거주지였다. 1991년 걸프전 후, 나자프는 사담 후세인 대통령 정권에 반대하는 남부 이라크의 쉬아파의 반란에 참여하였다.
나자프는 쉬아파에게는 순례지이자, 신도라면 누구나 이 곳에 묻히기를 원하는 도시로 남아있다. 도시를 에워싼 원형 담으로 이루어진 나자프는 중세 주거지의 분위기를 유지하고 있다. 메카와 메디나와는 다르게 나자프는 비무슬림들에게도 공개되어 있으나 비무슬림들이 이맘 알리의 사당에 들어가는 것은 허락되지 않는다.


*나지드 Najd :

사우디아라비아의 중부지역.
나지드는 서쪽으로 산맥을 낀 주로 암석의 고원지대이며 동, 남, 북쪽은 오아시스를 가진 사막지대이다. 나지드는 1745년까지는 정치적으로 분열되어 있다가 이때부터 와하비 운동의 중심지가 되었다. 1902년 압둘 아지즈 이븐 압둘 라흐만이 오스만 터키로부터 이 지역을 점령하였다. 이 때부터 나지드는 압둘 아지즈가 창건한 사우디 왕가의 지리적, 이데올로기적인 중심지가 되었다. 압둘 아지즈가 시작한 왕가는 1932년 사우디아라비아 왕국으로 바뀌었고 나지드의 중심도시인 리야드가 왕국의 수도가 되었다. 현재 공식적으로 중앙지역 이라 불리는 나지드는 하일, 비라이다흐, 리야드 주(州)로 구성되어 있다.

* 나하 파샤 무스타파 Nahas(Pasha), Mustafa(1879-1965)

이집트 정치인, 수상 역임.(1928, 1930, 1935-37,1942-44, 1950-52). 이집트 카이로의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난 그는 카이로 대학에서 법학 학위를 취득한다. 변호사의 길을 걷던 그는 1904년부터 1919년까지 판사로써 사법부에서 일하게 된다. 그 후 나하는 민족주의 운동에 참여하게 되었고 민족주의 운동을 이끌던, 사아드 자글루(Saad Zaghlul)과 함께 영국 지배하의 세이셜 제도로 추방당하게 되었다. 추방에서 풀려 난 후 이들은 1923년 헌법 하에서 치러진 첫 번째 총선에서 와프드 당의 후보자로 출마하여 의석을 확보하게 된다.
나하는 자글루가 이끄는 와프드 정부에서 활동하였다. 1927년 자글루의 사망 이 후 나하는 자글루의 뒤를 이어 와프드당의 총재직에 오르게 된다. 1928년부터 1930년까지 나하는 국무 총리 직을 수행하게 되지만 왕권에 강제에 의해 사직하게 된다. 헌법에 입각한 의회를 재개하고자 했던 나하의 노력은 1935년 성공을 거두게 된다. 나하의 주관으로 1936년 5월 와프드 당은 선거 캠프를 차리게 되었고 총선에서 승리를 거두게 되었다. 나하는 다음 정부를 구상하였고 3개월 후 영국-이집트 조약에 서명하였다. 이 조약은 이집트의 독립을 승인하고는 있지만 완벽한 자치권을 인정하고 있지 않다는 한계점이 있다.
나하는 1937년 12월 파루끄 왕에 의하여 공식적으로 실각하게 되었다. 1942년 2월, 독일 군대가 리비아를 통해 이집트로 진격하였고 영국은 왕궁을 탱크로 둘러쌓고 군사개입을 시작하며 파루끄 국왕에게 퇴위를 하거나 친 영국 노선을 가지고 있던 나하를 다시 수상에 앉히라는 조건을 내걸게 되었다. 파루끄 국왕은 나하에게 정부 구성을 허락하는 쪽을 선택하게 되었다. 나하는 영국의 기업 형태에 영감을 얻어, 아랍 리그를 결성하는데 있어서 결정적인 역할을 하게되었다. 나하는 수상직에 취임 한 후, 1944년 10월 알렉산드리아에서 개최 된 아랍 리그를 위한 컨퍼런스의 준비에 박차를 가하고 있었으나, 파루끄 국왕에 의하여 다시 한 번 자리에서 물러나야했다. 이에 1945년 1월 나하가 이끄는 정당은 선거에 출마하지 않는 보이콧을 실시 하였으나 1950년 선거에는 참여하였다. 아랍 민족주의자 진영은 선거에서 성공을 거두었고 나하는 다시 한 번 정부 구성에 앞장서게 되었다.
나하가 1936년 영국과 조약을 체결했을 당시 구상한 미래의 모습과 수에즈 운하에 영국군을 주둔하기로 한 계획이 실패로 끝나자 나하는 1951년 일방적으로 조약을 파기하였다. 나하는 영국군을 철수 시키기 위한 대중적인 운동을 시작하였다. 이 같은 움직임은 폭력 사태를 야기 시켰고, 영국군과 이트인 사이의 전투로 이어지게 되었다. 1952년 1월 군중의 폭력성은 극에 달하게 되었고 결과적으로 나하 정권의 몰락을 가져 왔다.
1952년 7월 와프드 당을 포함한 모든 정치 정당은 불법화 되었다. 다른 여타 정치인과 달리 부패를 견제했던 나하는 마지막까지 홀로 좌파 진영에 남았으며, 공적인 삶에서 은퇴하였다.


*남부 레바논군 South Lebanon Army, SLA :

1978년 3월부터 6월까지 레바논 남부의 이스라엘 점령기간 동안, 이스라엘의 지원을 받은 기독교 민병대이며 SLA는 레바논의 군대의 육군장교였던 사아드 핫다드(Saad Haddad)의 지휘아래 있었다. 약 2천 명의 병력의 SLA는 이스라엘의 지원 하에 무장되고 훈련되고 자금을 조달 받았다. SLA는 레바논 영토 내의 4~12km 넓이와 80km 길이의 지중해에서 카프르 수바(Kafr Suba)까지의 국경지대 순찰업무를 담당했고 대부분 마론파인 4만 명의 기독교인과 쉬아파 무슬림 6만 명을 거주지를 통제했다.
SLA는 레바논 군대와 아랍연맹의 평화유지군을 활동을 통제하였다. 또한, 1982년 6월, 이스라엘이 레바논을 재침략했을 때, 이스라엘 군대(IDF)의 하부 조직으로 활동하였다. 핫다드가 1984년 1월에 사망하였을 때 이스라엘은 그의 후임으로 은퇴한 레바논 군장교인 안토이네 라하드(Antoine Lahad)를 임명했다.
1985년 6월에 레바논으로부터 철수한 이스라엘은 남부레바논 점령지를 SLA에게 양도했고 이스라엘은 이곳에 1천 명의 병력을 남겼다. 이에 따라 SLA는 이스라엘의 점령에 대항하는 레바논 전쟁의 목표가 되었다.
2000년 5월, 이스라엘군의 남부레바논 점령지 철수로 SLA는 와해되었으며 이스라엘에게 외면 당하고 배신당했다.

* 남예멘 South Yemen

공식 명칭: 남예멘 인민 공화국 (1967-70); 예멘 인민 인문 공화국 (1970-90).


* 남예멘-소비에트 우호 조약(1979) South Yemeni-Soviet Friendship Treaty

북 예멘과의 통일 가능성으로 인해 몇 년동안 유보 되었던 남 예멘과 소련과의 20년 우호-협력 조약이, 1979년 10월 대통령 압둘 파타 이스마일(Abdul Fattah Ismail)이 모스코바를 방문한 기간 동안 체결되었다. 조약은 남 예멘의 생존을 보장하고 1967년 독립 이 후 남 예멘의 적대국인 사우디 아라비아, 오만, 북 예멘 연맹국과의 관계에서 우선권을 보장받는 내용을 명시하고 있다.

*남예멘의 바아스 사회당 Baath Socialist Party, South Yemen

남예멘 최초의 바아스 사회당 조직은 1955년에서 1956년에 설립되었다. 1967년 독립 이후, 바아스 사회당은 공개적으로 자유로운 당의 권리를 행사 할 수 있었다. 남예멘이 이라크로부터의 원조를 받게 되자, 바아스 사회당의 미래는 보장받는 것처럼 여겨졌다. 그러나 1978년, 민족해방전선이 예멘 사회당 출범의 일환으로 연합정치기구와 민족 전선 산하 정당들을 연합을 시도하자, 바아스의 지도자들은 마지못해 조직을 해산하였다.

*낫세르, 자말 압둘 Nasser, Gamal Abdul (1918~1970) :

이집트 군 지도자이자 정치인. 1956~1970년 대통령 역임.
아슈트(Asyut)주(州)의 바니 모르 마을에서 우체국 직원의 아들로 태어난 나세르는 카이로 왕립 사관학교를 졸업했다. 수단(Sudan)에서 2년간 복무한 후, 1941년 교관으로 군사학교에 복귀하였다. 그는 참모대학에서 더 많은 훈련을 받았고 팔레스타인 전쟁(1948~1949)에 이집트군의 소령으로 참전하였다. 1950년 대령으로 진급한 후, 그는 왕립 사관학교의 교수로 임명되었다.
나세르는 비밀 자유 장교단(Free Officers)의 카리스마적인 지도자였다. 1952년 7월 22일 자유 장교단은 파룩 왕을 내쫓고 혁명최고회의(RCC)를 만들어 준장인 무함마드 네기브를 혁명최고회의 의장으로 옹립하였다. 네기브는 의회제도를 회복시키기를 원했으나 나세르는 반대하였다. 결국 나세르가 승리하여 의회제도는 복원되지 않았다. 1953년 1월, 나세르는 모든 정당의 정치 활동 금지 조치를 취하고 ‘자유 집회(Liberation Rally)’를 후원하였다. 나세르와 네기브 간 권력 투쟁은 1953년 6월, RCC가 공화국을 선포하고 수상인 네기브를 대통령으로 임명한 후에 더욱 격렬해졌다. 나세르와 네기브 사이의 정쟁은 1954년 2월, RCC가 네기브 상의 없이 무슬림 형제단(Muslim Brothers)의 활동을 금지함으로써 전면적으로 나타났다. 네기브가 자신의 수상직과 대통령직을 사임하자 위기는 촉발되었다. 4월, 양측은 타협을 시도했고 그 결과 네기브는 대통령직은 그대로 유지하고 수상직은 포기하는 것으로 결말났다. 이러한 잠정적 합의 상태는 결국 RCC가 11월 네기브의 대통령직을 해임하고 그를 가택연금함으로써 끝났다. RCC는 나세르를 RCC의 의장으로 선출하였다. 1956년, 새 헌법이 공포되고 나세르는 6년 임기의 대통령에 선출되었고 2번 재선되었다.
오로지 공공의 생활에서 부패 제거를 공약했던 나세르는 국내에서는 점차 보수주의자들처럼 이데올로기적이고 급진적으로 바뀌었고 국외의 서구세력들은 나세르의 아랍 민족주의 정권이 보다 부드럽게 되도록 노력하였다. 1955년 4월, 인도네시아의 반둥(Bandung)에서 열린 제1차 비동맹 회의에서 나세르는 인도의 네루 수상과 유고의 티토 대통령으로부터 지대한 영향을 받았다. 나세르는 서구가 후원하는 바그다드 조약의 팽창을 막는데 성공하였다.
이에 대한 보복으로, 미국이 나세르 정부에 대한 무기판매를 금지하자, 1955년, 그는 체코 제 무기구입을 받아들였다. 미국이 아스완 하이 댐 계획에 대한 원조 제공을 철회함으로 나세르의 행동에 답하자, 그는 수에즈 운하를 국유화하고 모스크바로부터 아스완 하이댐 건설지원제의를 받아들였다. 그 결과, 영국, 프랑스, 이스라엘로 이루어진 반이집트 연합국이 이집트를 공격하였고 1956년 10~11월 들어 수에즈 전쟁이 정점에 이르게 되자 나세르는 더욱 급진적으로 변모하였다. 서구와 이스라엘은 그를 최고의 정치적 악의 화신이라 비난했다. 미국, 영국, 프랑스, 이스라엘은 나세르를 암살하기 위한 팀을 구성하여 행동했으나 실패하였다. 1957년 3월, 이집트로부터 반이스라엘 연합군이 철수하자, 나세르의 명성은 국내와 아랍지역에서 널리 퍼지게 되었다.
1958년 초, 이집트와 시리아의 합병으로 통일아랍공화국(UAR)이 탄생하자 나세르는 통일아랍공화국의 대통령으로 선출되었다. 나세르는 비동맹 운동의 지도자로서는 처음으로 소련을 방문하였다. 국외에서 그의 정치적 활동이 더욱 활발해졌음에도 불구하고, 국내에서 그는 큰 좌절을 겪게 되는데 그것은 1961년 9월 통일아랍공화국에서 시리아가 탈퇴한 것이다. 이 아랍통합 실패는 그의 지도하에 동쪽 아랍지역을 서서히 통합하고자 했던 그의 희망이 끝나는 것이기도 했다. 시리아가 통일아랍공화국의 정책에 점점 더 독자적인 길을 걷게 되자, 나세르는 이집트의 사회, 경제적 개혁의 행보를 빨리 하였다. 10년 전에 시작된 농지 개혁은 더욱 강화되었고 산업시설과 서비스업도 점차 국유화되었다.
1962년, 농부, 노동자와 지성인들의 대표단 회의에서 나세르는 아랍 사회주의 연맹(ASU)을 제창하였다. 그해 말, 나세르는 쿠데타로 발발한 북예멘의 내전에서 군부 쿠데타 세력인 공화주의자들을 지원하였다. 1964년, 그는 카이로에서 아프리카통일기구(OAU) 정상회담을 개최하였다.
1966년 초, 급진 바아스주의자들이 시리아의 정권을 잡게됨으로써 시리아와 이집트와의 관계는 더욱 소원해지게 되었다. 이러한 소원한 관계를 회복하기 위해 1966년 11월 나세르는 전쟁 발발 시, 시리아와 이집트군의 공동군대를 명기한 방위조약에 서명하였다. 1967년 봄, 아랍과 이스라엘 간에 긴장감이 높아지자, 이스라엘은 시리아에서 팔레스타인 활동에 대해 시리아를 경고하였다. 5월 중순, 시나이에 주둔하고 있던 유엔긴급군의 보호 속에 안주해 있다는 조롱에 자극 받은 나세르는 국제연합안전보장이사회에 유엔긴급군의 철수를 요구했다. 유엔긴급군의 철수가 끝나자, 나세르는 즉각 티란 해협에 이스라엘 선박의 통행을 금지시켰다. 그때까지 나세르에 대해 비우호적이었던 요르단의 후세인 왕은 5월 30일, 이집트와 상호방위 조약에 서명하였고 이로 인해 나세르의 힘과 명성은 절정기에 이르렀다.
이스라엘은 국제사회가 이스라엘 선박에게 다시 티란 해협의 통행을 할 수 있도록 나세르에게 압력을 가하지 않을 것이라고 인식하자, 1967년 6월 5일, 이스라엘군은 이집트, 시리아, 요르단의 공군에 대해 압도적인 선제공격을 퍼부으며 3차 중동전쟁을 일으켰다. 1967년, 아랍-이스라엘 전쟁에서 아랍의 완전패배는 실제로 나세르와 나세르주의에 심각한 타격을 주었다. 나세르는 전쟁 패배에 책임을 지고 대통령직을 사임하였다. 하지만 그의 사임을 철회하라는 이집트 국민들의 데모가 잇따르자, 그는 대통령직을 다시 맡으며 전쟁 패배로 인해 야기된 위기를 극복하였다. 나세르는 자신의 정책을 재검토하여 국내에서의 ASU의 입장을 온건화하였고 대외적으로 점령아랍 영토로부터 이스라엘의 철수에 대한 대가로 이스라엘과 아랍국들 간의 평화정착을 요구한 국제연합안전보장이사회의 결정 242항을 받아들이는 온건 정책을 취하였다. 하지만 이스라엘 측의 이집트 영토의 점령 강화를 막기 위해 나세르는 소련제 무기로 군대를 무장시킨 후, 1968년 소모전을 시작했다.
나세르는 아랍세계에서 그의 가장 큰 라이벌인 보수주의자 사우디의 파이잘 이븐 압둘 아지즈 왕과 화해했으며 1967년 12월, 북예멘 내전에 개입하고 있던 이집트군을 철수시켰다. PLO와 레바논 사이에 전투가 심화되자, 양측은 나세르에게 중재를 요청했고 나세르의 중재 결과, 1969년 11월 카이로 협정이 성사되었다. 또한 1970년 9월 중순, PLO와 요르단군 사이에 전투가 발발하자 양측은 나세르에게 중재와 화해를 요청했다. 이러한 중재 회담의 정신적 피로와 무리가 나세르에게 치명적인 심장병의 원인이 되어 숨졌다. 카르스마적인 인물이었던 나세르는 알바니아계의 파룩왕가가 이집트를 통치한 이후 가장 오랜 기간 동안 이집트를 통치한 최초의 이집트인이었다.

*낫세리즘과 나세르주의자 Nasserism and Nasserist :

나세리즘은 이집트의 자말 압둘 나세르(1954~1970년 대통령 재임)의 사상과 행동에 기반을 둔 사회∙정치적 주의이다. 범아랍 민족주의로 시작된 나세리즘은 아랍 사회주의로 발전되었다. 바아스주의(Bathism)와는 다르게 나세리즘은 이론가들에 의해 고안된 이론이 아닌 국내외의 문제들을 해결해 나가는 과정 속에서 나온 이데올로기이다. 즉 나세르에 의해 이끌어진 이집트 군 장교들은 그들이 권력을 잡은 후, 나세리즘을 이데올로기로 발전시켰고 그 이데올로기를 시행하기 위해 국가 차원의 정치적 조직을 결성한 것이다. 이에 반해, 바아스주의자들은 그들이 권력을 잡기 훨씬 이전부터 이미 이데올로기와 뼈대를 갖추고 있었던 것이다.
나세르의 사회주의적 경향은 이집트 지식인들과 노동자들 사이에 나타나고 있던 시대 조류를 반영한 것이다. 하지만 나세르는 정당의 후원으로 인류 평등주의의 사회 경제적 혁신을 실행하는 것 대신, 아랍사회주의연맹(ASU)과 함께 근본적으로 국가 관료주의에 의존한 사회주의를 추구하였다. 나세르의 통치 기간동안 나세르주의 정당들은 몇몇 아랍국가들 즉 시리아, 요르단, 레바논, 사우디, 북예멘, 남예멘 등에서 성장하였다. 그러나 그의 사후, 몇 년 이내에 이러한 정당들은 사라지거나 명목상의 이름만 유지하였으나 예외적으로 레바논에서 독립 나세르 운동과 그 운동의 전사들인 무라비툰들이 순니파 무슬림으로부터 지지를 계속 이끌어 내고 있다. 이집트에서 나세르주의자들은 그들의 정당 결성이 허락되지 않자 주로 국가진보조합연합(NPUA)에 가입해 활동하고 있다.


*네기브, 무함마드 Neguib, Muhammad (1901~1984) :

이집트 군 지도자이자 정치가. 1952~1953년 수상 역임. 1953~1954년 대통령 역임. 군 장교의 아들로 수단의 카르툼에서 출생한 네기브는 카이로 왕립 사관학교를 졸업했다. 육군장교로 꾸준히 진급하여 1948년 팔레스타인 전쟁에 참전했을 때에는 육군 준장이었다. 1951년 그는 육군 사령관이 되었다.
그의 작전 장교인 압둘 하킴 아미르를 통해 네기브는 자유장교단과 접촉하였다. 1952년 7월 쿠데타 후 그는 혁명 사령 위원회 RCC의 의장에 취임하였다. 또한 군 총 사령관의 직위도 겸직하였다. 9월 민간정부 이양을 포기한 RCC는 네기브를 수상이자 국방부 장관으로 임명하였다. 1953년 6월 공화국이 선포됨에 따라 RCC는 그를 수상직과 대통령직을 겸직하게 하였으나 군의 최고 사령관의 지위는 해임하였다.
RCC의 실제 지도자이자 공화주의자인 자말 압둘 나세르와 네기브와의 불화는 RCC가 네기브에게 자문을 구하지도 않은 채 ‘무슬림 형제단’의 활동을 금지시킨 1954년 2월에 전면에 나타나기 시작했다. 네기브의 수상직과 대통령직의 사임은 이집트 정치 상황을 위기로 몰아넣었으나 4월 양측의 화해가 이루어져 네기브는 다시 대통령직을 맡았으나 권한은 축소되었고 수상직도 잃게 되었다. 11월 RCC는 그를 대통령직에서 해임, 가택연금하였고 네기브는 정치적 영향력을 완전히 상실하게 되었다. 네기브는 나세르의 사망 후인 1971년 자유의 몸이 되었다. 네기브는 안와르 사다트를 지지했으나 자유로운 일반 대중의 삶으로 돌아가지는 못했다.


* 네스토리우스파 Nestorian Christians
기독교 종파 중 하나. 네스토리안 교회는 콘스탄티노플의 원로인 네스토리우스의 신학체계에 근거하고 있다. 네스토리우스는 예수에게는 인성과 신성으로 구분되는 두 가지 본성이 존재하는 이 두 본성이 의지의 협력을 통하여 도덕적으로 결합되어 있다고 주장하였다. 이런 네스토리우스의 주장은 예수가 소유한 인간과 신의 본성이 한 개인에게 불가분하게 연결되어 있고, 완벽하게 결합되어 있는 하나의 본성을 소유하고 있다는 정통 교리와는 모순된 입장을 취하고 있다. 정통적으로 내려오는 교리는 431년 에페소(Ephesus)공의회 ,451년 칼케돈(Chalcedon)공의회, 553년 콘스탄티노플공의회에 의해 재확인되었다. 단 페르시아 교회만이 네스토리우스 교의에 대한 믿음을 유지하였고 이들이 네스토리우스 교회가 되었다. 티무르(Tamerlane)는 페르시아 지방을 침략하면서 사실상 네스토리우스 교회를 모두 파괴 하였고, 이란과 이라크에 아주 적은 수의 네스토리우스 신도들만이 살아남았다. 네스토리우스 신도들 중 일부는 1551년 로마 가톨릭 교회와 재결합하게 되었고, 이때부터 네스토리우스 교회는 칼데안, 칼데안 교회, 동방 시리악 등으로 불리게 되었으며 통상적으로 아시리안 기독교로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네탄야후, 벤자민 Netanyahu, Benjamin (1949~) :

이스라엘 정치인. 텔아비브에서 출생한 네탄야후는 중등 교육을 마친 후 1967~1972년 이스라엘군의 낙하산 부대에서 근무했다. 그는 1976년 미국 켐브리지에 있는 메사추세스 기술원에서 무역행정으로 석사학위를 받았다. 그는 미국(1976~1979)과 이스라엘(1980~1982)에서 직업 상담과 경영상담의 일을 하였고 1982~1984년까지 유엔 주재 이스라엘 대사로 근무했다. 그는 1976~1988년까지 관광학을 교육하는 조나단 학원의 원장도 역임하였다. 1988년, 리쿠르당으로 의원에 선출된 그는 1988~1991년까지 외무부 차관으로 근무하였다. 1991~1992년까지 이츠하크 샤미르 수상실에서 차관으로 일했다. 1992년 재선된 그는 1993년 리쿠르당 총재가 되었고 이스라엘 수상을 역임했다.


* 네투레이 카르타. 성스러운 도시의 수호자들 Neturei Karta
아람어로 성스러운 도시의 수호자들이라는 뜻. 이스라엘에서 초(超)정통파의 유대교 종파.
네투레이 카르타(Neturei Karta)의 명칭은 탈무드에서 토라(Torah)의 학생들을 ‘성스러운 도시의 수호자들(Guardians of the [Holy] city)’이라고 언급한 것에서 파생되었다. 네투레이 카르타는 1935년 팔레스타인에서 아구다트 이스라엘(Agudat Israel)의 분열에 따라 등장하였는데, 이들의 폴란드에 기반을 둔 네투레이 카르타의 모체는 WZO와의 협력을 거부하였다. 10년 뒤 네투레이 카르타와 그 지지자들은 예루살렘의 아시케나지 공동체(Ashkenazi community)를 대표하는 위원회에서 다수를 확보했다.
1948년 이스라엘을 건국하기 위한 준비 기간 동안 네투레이 카르타는 팔레스타인 내에 유대 국가를 건설하는 것을 반대했다. 이들이 반대 한 것은 유대 국가는 유대법과 전통 위에서 배타적으로 건설해서는 안 될 것이며, 이런 배타적 국가 건설은 다시 디아스포라를 경험해야 하는 유대 민족으로 되돌아가는 것이라는 이유에서였다. 유대 국가는 언젠가 세워질 것이며, 그 시기는 아직 도래하지 않았을 뿐, 메시아를 기다리는 것만으로도 유대인들은 고립으로부터 구원 될 것이라고 믿었다. 1948년에서 1949년 발발한 제 1차 중동 전쟁 동안네투레이 카르타은 이 전쟁을 예루살렘의 국제화라고 칭하였다. 네투레이 카르타는 이스라엘에서 시온주의 국가 건설을 반대하는 가장 잘 알려진 유대인 조직이 되었다.
1980년에 네투레이 카르타는 예루살렘 지역의 메아 세아림(Mea Shearim)과 텔아비브(Tel Aviv) 교외의 베네 브락(Bene Brak)에 주로 거주하며 신도들은 약 6000명에 이른다. 네투레이 카르타의 신도들은 안식일에 지나다니는 자동차에 돌팔매질을 가한다. 네투레이 카르타의 지도자인 랍비 모세 히르치(Rabbi Moshe Hirsch)는 1993년 이스라엘-PLO 협정이 체결되기 이전에 팔레스타인 해방 기구(Palestine Liberation Organization)의 지도자 야세르 아라파트(Yasser Arafat)와 공식적인 회의를 가졌다. 랍비 모세는 1994년 7월, 팔레스타인 자치 정부(Palestinian Authority)에 의해 정착촌 내의 유대인 문제를 다루기 위해 지목되었다.

* 노동당 (이스라엘) Labour alignment, Israel

이스라엘의 정치 정당 중 하나. (노동–마팜당(Labour-Mapam Alignment) 참고)

*노동자 마팜 제휴 Labour-Mapam Alignment :

이스라엘 정치블록. 마파이, 아흐두트 하보다 포알레 시온, 라피와 통합으로 1968년 1월에 생겨난 이스라엘 노동당은 마팜과 함께 동맹을 맺었다. 대중적으로 마라취(Maarach, 제휴)라고 불리는 노동당은 투표의 46.2%와 56의회 의석을 차지했다. 제휴는 1973년 선거(42.5%, 51의석), 1977년 선거(26.7%, 32의석), 1981년 선거(39.2%, 47의석) 그리고 1984년 선거(36.7%, 44의석)에서 계속되었다. 노동당이 리쿠드당과 1984년에 국가 단일 정부를 구성하기로 결정했을 때 마팜은 제휴를 끝내고 6의석을 가지고 야당일원이 되었다.


*노동자 시오니즘과 시온주의자 Labour Zionism and Zionists :

유대인 가운데 정치운동. 노동자 시오니즘이란 용어는 시오니즘과 사회주의를 혼합하길 원했던 시온주의자들에게 적용하고 있다. 1987년 8월 스위스의 바젤에서 제1차 시온주의자 회의가 있은 한 달 후, 연맹이 리투아니아의 빌나(Vilna)에서 리투아니아, 폴란드, 러시아에 있는 유대인 노동자들의 총 연합으로 설립되었다. 3년 후에 포알레 시온(Poale Zion)이 러시아의 민스크에서 ‘사회주의 시온주의 팔레스타인으로 이주’라는 프로그램으로 설립되었다. 이것은 러시아로부터 오스트리아 그리고 미국으로 확산되었다. 유럽유대인들에 대한 조사에 의하면, 그들의 1/3이하가 제조업이나 건설업에 종사하며 절반은 유통, 무역업에 종사하고 농업에 종사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포알레 시온’ 이데올로기를 주도한 돈 베르 보로초프(Don Ber Borochov)는 세계 도처에 흩어져 있는(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이 그들의 뿌리가 없기 때문에, 보다 큰 계급투쟁에서 제외됐다고 주장했다. 그 해결책은 그들이 경제적, 사회적 피라미드의 기저를 발전시킬 수 있는 자신들의 국가에 유대인들을 모으는데 있다는 것이다. 그는 그들이 필요로 하는 것은 농업발달을 위한 커다란 잠재력 외에 작은 인구를 가진 땅이라고 결론지었다. 보로초프는 팔레스타인을 정했는데 한편으로는 팔레스타인이 역사적으로 유대인들의 고국이었기 때문이었고 또 한편으로는 버림받은 땅이었기 때문에 그곳은 오로지 소규모나 중간정도의 유대 자본가들에만 관심대상이었고 대자본가들에게는 그렇지 않았다. 그는 거기서 조성될 유대인 프로레타리아를 위하여 혁명적 약속을 제공했다. 그는 현지 아랍인들을 민족의식이 결핍된 터키의 하수인으로 간주했으며 아울러 경제적, 문화적 측면에서 유대인이 주도권을 쥔 발전된 유대국가아래서 유대민족으로 그들을 동화시키는 것도 상상해 보았다. 이것은 아론 데이빗 고르돈(1904년 팔레스타인에 도착한 우크라이나계 유대인)과 그의 추종자들의 행동과 견해에 딱 어울리는 유대인 노동자 계급을 팔레스타인 땅에서 탄생시키는데 중점을 두었다. 그들은 하포알레 하짜이르(HaPoale HaTzair)를 구성했다. 고르돈은 유대민족이 잃어버렸던 정신적 가치를 노동을 통하여 다시 찾을 것이며 유대인 문제의 핵심이 노동에 대한 자본이 아니라 기생에 대한 생산이라고 믿었다. 소택지들에 대하여 배수시설을 하고 농업 전초지를 설립함으로써 하포알레 하짜이르 구성원들은 농업분야에서 유대인 임금노동자가 탄생하도록 도왔다.
1919년 포알레 시온내의 좌경주의자들이 모프시(Mopsi, 사회노동자당)를 구성하기 위하여 떠났다. 포알레 시온 우익주의자들인 민족주의자 회원들은 아흐두트 하보다(Ahdut HaAvodah)를 구성하기 위하여 다른 그룹과 합병하였다. 1930년 1월에 아흐두트 하보다와 하포알레 하짜이르는 마파이(Mapai)를 구성하기 위하여 합병하였다. 15년 뒤에 하쇼메르 하짜이르 회원들은 계급투쟁과 이중민족(아랍-유대)적인 사회주의 혁명의 이념을 채택하기 위하여 마파이를 설득하는데 실패했기에 그들은 마파이를 떠나 일년 후에 좌경주의자인 타우나 레아흐두트 하보다와 합병하여 1948년 초에 마팜(Mapam)으로 나타났다. 이스라엘에서 보로초프의 영향력은 대부분 마팜과 아흐두트 하보다-포알레 시온에서 눈에 띄었다. 다음 30년 동안, 연립정부의 지배적 요인으로서 노동자 유대 정당들은 국가와 정부를 세우는데 앞장섰다.
1968년 1월 마파이는 아흐두트 하보다 포알레 시온과 라피와 합병하여 이스라엘 노동당을 탄생시켰다. 세계에 흩어져 있는 노동 시온주의자 그룹들은 이스라엘에 있는 그들의 카운트파트를 지원했으며 그들 각각은 자신의 세계 동맹이 있었다.

* 노루즈 Nawruz
쿠르드어/페르시아어: 새로운 날. 이란 태양력의 첫 번째 날이며 춘분일인 나루즈는 이란인과 쿠르드인, 그리고 조로아스터교인이 함께 기념하는 날이다.

 
 

Total 14
제   목
<ㄱ> 가쉬미 - 국제연합안전보장이사회 결의안 598
<ㄴ> 나본 - 노루즈
<ㄷ> 다국적군 (레바논내) - 딤미
<ㄹ> 라디노어 - 레바논-이스라엘 평화협정 (1983)
<ㅁ> 마나마 - 무사디끄
<ㅂ> 바그다드 - 베이루트
<ㅅ> 사나 - 샤레트
<ㅇ> 아구다트 이스라엘 - 아랍-이스라엘 전쟁
<ㅈ> 자이드파 - 중동평화회담 (마드리드 1991)
<ㅊ> 천연가스 - 총인민회의(예멘)
 1  2  
명지대중동문제연구소, 서울시 서대문구 남가좌동 50-3, 우120-728,
직통TEL: 02-300-1884, 교환TEL: 02-300-1700, FAX: 02-307-6189, 대표이메일: imea@hanmail.net
Copyright ⓒ 명지대중동문제연구소, All Rights Reserved.
개인정보보호방침 | 이메일무단수집거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