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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ㄷ> 다국적군 (레바논내) - 딤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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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국적군 (레바논내) Multi-National Force (1982~1984) :

1982년 이스라엘의 레바논 침공 시, 70일간의 베이루트 포위공격의 결과 그해 8월 미국, 이스라엘, 시리아와 레바논 사이에 막후 조정된 협정이 조인되었는데 그 내용은 미국, 프랑스, 이태리로부터 약 1,200명으로 구성된 다국적군을 서베이루트로부터 PLO와 시리아군의 안전 철수를 보장하기 위해 배치하는 것이다. 철수는 9월 3일까지 완료되었고 다국적군은 일주일 안에 떠났다.
9월 13일, 대통령에 선출되었으나 아직 취임하지는 않은 바쉬르 제마엘(Bashir Gemael)이 암살되었다. 16일과 18일 사이에 기독교 팔랑당 전사들은 베이루트의 사브라(Shabra)와 샤틸라(Shatiila) 팔레스타인 난민캠프에서 약 2천 명에 이르는 남자, 여자, 어린아이들을 살해하였다. 다국적군은 재소집되었고 공항과 도시외곽 지역에 주둔하였다. 150명의 영국 파견단이 다국적군에 합류하였다.
약 1년 후 미국과 프랑스는 레바논 내전에서 마론파가 대부분인 레바논군 측에 전투기와 전투함을 제공하였고 이것은 반대진영인 무슬림들의 화를 분출시켰다. 1983년 10월 23일, 서베이루트의 미군 캠프와 군 본부에 트럭 폭탄 테러가 있었고 241명의 미군과 59명의 프랑스군이 사망하였다. 이 사건은 은밀히 레바논군을 후원하려던 미국과 프랑스의 생각을 바뀌게 하였다. 1984년 2월, 미국이 전투기를 레바논군에 제공하였음에도 불구하고 무슬림군은 서베이루트에서 레바논군을 몰아내는데 성공하였다. 워싱턴은 미군을 베이루트로부터 철수시켰고 영국, 프랑스, 로마도 미국을 뒤따라 그들의 군대를 레바논에서 철수하였다. 다국적군의 1984년 3월 31일로 완전철수 하였다.


*다국적군과 옵서버 Multinational Force and Observers (1979) :

시나이 반도 내와 접경지역에 이집트군과 이스라엘군의 동일 수준의 주둔과 관련한 1979년 이집트-이스라엘 평화협정의 조항 준수를 감시하기 위해 11개국 2천6백 명의 다국적군과 옵서버가 1981년 8월 시나이 반도에 배치되었다. MFO는 또한 티란 해협 통과의 항해 자유 보장 역할도 떠맡았다.


*다마스커스 Damascus :

시리아의 수도. 인구 470여만 명(2009년 추산). 다마스커스의 역사는 3천년 이상이다. 도시의 현재 이름은 3500년이나 되었으며, 고대에 앗시리아와 페르시아에 의해서 사용되었다. 다마스커스는 알랙산더 대왕(B.C. 336~23년 통치) 이래, 여러 차례 다른 통치자들에 의해서 함락되었다. B.C. 65년 로마에 의해 정복된 후, 요르단강 동쪽 데카폴리스(Decapolis) 지방의 주요 도시가 되었다.
A.D. 635년, 다마스커스는 아랍 무슬림에 의해 함락되었고, A.D. 661년에 우마이야조(Umayyad)의 이슬람 제국의 수도가 되었다. 그곳은 우마이야 이후 압바스조(Abbasid) 시기에도 계속 번창하였고, A.D. 763년 바그다드로 제국의 수도를 옮겼다. 1258년과 약 100년 후에 다마스커스는 몽고인에 의해서 두 차례 침탈되었다. 1517년 오스만 터키에 의해서 정복되었다.
다마스커스는 제 1차 세계 대전 후 프랑스에 의해 위임통치 되었고, 1943년 시리아의 수도가 되었다. 그 후 점차 확장되어 시리아의 상업적, 재정적, 산업적, 교육적 그리고 문화적 중심이 되어 레반트(동부 지중해 연안의 여러 나라-시리아, 레바논, 이스라엘) 지역의 주요한 도시가 되었다.
다마스커스에 있는 이슬람 대 사원은 유명한 관광지이다. 이 사원은 우마이야 사원이라고도 불린다. 그 사적지는 그리스에 의해 지어진 주피터의 신전이 있던 자리였다.


*다비드 벤 구리온 David, Ben-Gurion (1886∼1973) :

이스라엘의 정치인, 총리(1948~1954, 1955~1963). 다비드는 폴란드의 폴란스키 그린에서 변호사의 아들로 태어났으며 1904년 바르샤바 대학에 진학했다. 대학 2년 후에 포아레 시온(Poale Zion)에 가입하였다. 다비드는 포아레 시온의 신문 하아흐드투(HaAhdut)를 공동 설립하였다.
1912년, 그는 터키의 이스탄불 대학에 입학했으며 법학과 정치학을 공부했다. 제1차 세계 대전의 발발하자, 그는 팔레스타인으로 갔다. 그는 1915년 분쟁을 일으킨다는 이유로 추방되어 뉴욕으로 떠났다. 그는 뉴욕에서 유대인 군대의 미국인 보병 대대에 입대했다. 그 부대는 영국군의 소속이었고 훈련은 캐나다에서 이루어졌다.
세계 대전 후에, 1919년 좌파 진영인 팔레스타인의 포아레 시온(Poale Zion)은 분열되었으며, 사회주의 노동자들의 모임의 형태로 되었고, 조직은 하아보다(Ahdut HaAvodah)로부터 카츠넬슨(Berle katznelson) 등의 추종자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하아보다와 카츠넬슨은 노동자들과 개척자들을 모아 조직을 형성하였다. 하아보다와 카츠넬슨은 재선을 위해 협의를 하였고 주미 모임의 압력으로 단일 지도체제를 갖추려고 하였다. 1930년 1월, 아르로소로프(Chaim Arlosoroff)의 지도하에 마파이(Mapai)를 창설하였다.
1933년 아를로소로프가 살해된 뒤에 다비드는 마파이의 지도자로 선출되었다. 2년 후, 그는 팔레스타인을 위해 유대인 정부기관의 집행위원회의 위원장이 되었으며, 곧 팔레스타인의 대표자는 영국 위임통치령의 관리로부터 승인을 받았다. 1937년, 마파이의 조직 구성원과 의견을 달리하여 다비드는 “팔레스타인 지역의 3분할 위임관리제”에 찬성하였다.
그는 1939년 영국 백서의 내용 중, 향후 5년 간 연평균 유대인 이주자를 1만5천 명으로 제한하는 안에는 반대하였다. 1939년 9월, 세계 제2차대전의 발발로 반영국적인 성격을 띠었던 그들은 더 이상 영국에 머물 수 없었다. 1942년 다비드 미국의 유대인 기구(WZO, American Zionist Organization)를 결의하였다. 팔레스타인 지역에 유대인 국가의 창설이 시온주의(유대인 민족운동)의 최상의 목표였다.
전쟁 후에, 유대인 기관의 성립이 어렵게 되자, 히스타드루트(Histadrut) 최고위원인 다비드는 유대인의 군대를 조직하였다. 팔레스타인에서 활동하며 다양하게 무장된 유대인군은 1946년 12월, 시온주의 방위 조직의 지도자로 임명된 다비드 지휘하에 모이게 되었다. 1947년 초에, 팔레스타인에서 이슈브(Yishuv)의 국가 협의회는 공식적인 계획에 따라서, 유대인들은 군대와 그 밖의 조직을 통하여 통합되기 시작했다.
1947년 11월, 국제연합은 개인 호위병과 무장경찰들로 이루어진 7만9천의 대규모 군대를 인정하였다. 1948년 봄에 유대인 기관은 이슈브의 국가 협의회의 행정관리상, 국가 협의회의 위원회에 속하는 시민 행정기관으로 옮겨졌다. 13명의 위원으로 이루어진 위원회는 잠정적인 임시 정부의 기능을 가졌다. 12일 후에 6만의 군대로 이루어진 방위대는 국방장관을 선출하였다. 1948년 1월 아랍-이스라엘의 1차 전쟁이 발발하였다. 이 전쟁은 1949년에 그리스 로데스(Rhoodes)섬에서 아랍 4개국과 이스라엘의 합의에 의해 휴전되었다. 1949년 1월 이스라엘은 기습 공격을 하여 휴전 경계선을 확대하였다.
1949년 1월의 선거에서 마파이는 크네셋의 120석 중에서 16석을 얻는데 성공하여, 수상이 되었다. 1950년 5월의 ‘3자선언(영국-미국-프랑스)’에서 그의 의견은 환영을 받았다. 크네셋 마파이당은 45석을 획득했다. 이스라엘의 내외 정치노선을 형성하는데 주도적 역할을 해왔던 다비드가 1953년 12월의 수상직을 사임하고, 네게브(Negev)에 있는 키브츠에서도 은퇴를 했다.
모세 샤레트(Moshe Sharett)가 수상이 되고, 국방장관인 핀차스 라본(Pinchas Lavon)이 국방장관직을 사임함에 따라서 다비드가 내각의 국방장관으로 임명되었다. 이집트에서 활동 중이던 이스라엘 스파이 조직원 중 2명이 처형된 것에 대한 보복으로, 다비드는 가자(Gaza)지역 이집트 군사 시설의 대량보복공격을 명령하여 39명의 이집트인 사상자를 발생시켰다. 이런 극도의 긴장감을 이용하여 다비드는 1955년 말에 수상이 될 수 있었다. 다비드는 수에즈 전쟁 속에 영국과 프랑스와 공모하여 시나이 반도를 침략과 점령을 통해 획득했다. 그러나 미국과 소련의 압박으로 1957년 3월 다비드는 시나이 반도에서 이스라엘 군대를 철수했다.
1959년 11월 다비드의 연합 정권은 불안한 선거 뒤에 형성되었는데, 1960년에 핀차스 라본의 ‘안보 문제’가 다시 대두되었다. 1961년 초 의회 위원회에서 핀차스의 무죄를 입증했지만, 다비드는 사법부 판단을 내세워, 수상과 국방장관의 사임으로써 대응을 했다. 타협안으로서, 그 사건에 대한 더 이상의 조사를 유보하고, 핀차스는 안보장관으로 강등됐다. 1961년 8월 선거 뒤에 다비드는 연합정권을 이끌어나갔지만, 이전 정부처럼 강력한 집행을 할 수 없는 정권이었다. 결국 다비드는 1963년 정권에서 사임을 하였다.
크네셋 마파이(Knesset Mapai)당의 지지도가 하락하자 마파이당의 지도부는 하아보다 포아레(Ahdut HaAvodahPoale Zion)당과의 연합을 모색하였다. 이 연합이 바로 1965년 2월의 마파이(Mapai) 협정이다. 이 연합에 반대하는 다비드와 그의 추종자들은 마파이당에서 탈퇴하여 1965년 11월의 선거에서 라피(Rafi)당이라는 제3당으로 출마를 하였다. 라피당은 10석을 차지했고, 마파이와 하아보다 포아레 시온의 연합당은 45석을 차지했다. 이런 선거의 결과는 조직력의 어려움 속에서도 다비드의 개인적인 인기도를 반영한 것이다. 1967년 6월 아랍과의 전쟁뒤, 다비드는 정복한 아랍영토의 합병을 반대하였다.
1968년에 마라치(maarach)는 3당의 합당을 이끌었던 라피당과의 합당을 포함하여, 이스라엘 노동당으로 거대해졌다. 다비드는 국민을 위한 라암(LaAam)당이라는 새 정당을 창출했고, 라암당은 1969년 선거에서 4석을 차지했다. 그 이듬해 다비드는 정계에서 은퇴를 했다. 1973년 사망한 뒤 그의 일기들이 출판되고 있다.


*대시리아 Greater Syria :

면적은 119,690평방마일/110,000㎢. 대시리아는 북으로 타우루스 산맥, 서로 지중해, 남으로 아라비아 사막 그리고 동으로 유프라테스 강으로 둘러싸인 지역이다. 이곳은 역사적으로 샴(Sham)지역 또는 메카의 북쪽지역으로 알려졌었다.
1516년부터 오스만제국이 대시리아를 통치하였으나 1831~1840년까지 잠시동안 이집트 총독인 이브라힘 파샤가 대시리아를 통치하기도 하였다. 직접적인 오스만 통치로 다시 환원되면서 대시리아는 몇몇 주로 나뉘어졌다. 제1차 세계대전에서 오스만제국의 패배에 뒤따라 전승국들인 영국과 프랑스는 대시리아를 사이코-피코 협정에 따라 북부지역은(이후 시리아와 레바논이 형성됨) 프랑스의 통치권으로 그리고 남부지역(팔레스타인과 트랜스요르단으로 형성됨)은 영국의 통치권으로 분할하였다. 1919년 7월 다마스쿠스의 시리아 국가회의에서는 이러한 분할안에 대해 신랄한 비난을 퍼부었으며 연합 시리아-팔레스타인을 위한 주권을 요구하였으나 영국과 프랑스가 이를 거부하였다.
1920년 국제연맹 최고 위원회는 구 오스만 주들에 세워진 새로운 통일체에 대한 위임통치권을 영국과 프랑스에 줌으로써 영국과 프랑스의 요구를 승인하였다. 이러한 위임통치권이 국제연맹에 의해 명시화되는 동안 프랑스는 다마스쿠스의 파이잘Ⅰ 빈 후세인 알하쉬미 정부를 전복시키고 식민정권을 세워 대레바논을 만들기 위해 시리아의 일부분을 레바논 산맥의 공국들에게 배분함으로써 국경을 재정비하였다. 1921년 10월 시리아의 알레포 주 지역을 터키에 넘겨줌으로써 프랑스는 시리아의 크기를 더욱 축소시켰다. 그 결과로 1946년에 출현한 독립 시리아는 71,500평방마일/185,180㎢가 되었다.

* 대중적인 용어 Titles, Secular (in alphabetical order)
Emir (아랍어 : 왕자, 지배자)
Emira (아랍어 : 공주)
Fakhamah al Rais (아랍어 : 그의 위대함)
Jalalah al Malik (아랍어 : 그의 장엄함)
Khan (터키어 : 지배자, 통치자)
Malik (아랍어 : 왕)
Malika (아랍어 : 여왕)
Mirza (페르시아어 : 왕자의 아들, 귀족으로부터 비롯된 용어)
Pasha (터키어 ; 총독)
Shah (페르시아어 : 왕)
Shaikh (아랍어 : 노인, 연장자에 대한 힘에서 비롯된 단어)
Shaikha (아랍어 : 여자노인, 여자 연장자에 대한 힘에서 비롯된 단어)
Shahbanu (페르시아어 : 여왕)
Shan-en-Shah (페르시아어 : 왕 중의 왕)
Sultan (아랍어 : 통치자)

* 도눔 donum

아랍, 중동에서 사용되는 넓이 측정단위. 1 도눔 = 0.26 에이커 = 318.28 평


*도하 Doha :

카타르의 수도. 해적행위의 온상인 도하는 1867년에 영국군에 의해 철저히 파괴되었다. 이것은 영국의 지원을 받은 쉐이크 무함마드 이븐 타니(Shaikh Muhammad ibn Thani)에 의해 다음해에 복구되었다. 1916년에 카타르는 형식적으로 영국의 보호국이 되었고 영국은 도하에 정치 거점을 유지하였다. 도하의 주민은 낚시, 진주채취 그리고 무역으로 생계를 유지하였다. 1939년에 인근 두칸(Dukhan) 지역에서 석유가 발견되었고 제2차 세계대전 이후에 경제적인 규모로 개발하면서 도하는 극적인 변화를 경험한다. 1971년에 카타르는 독립하였고 현재는 깊은 수심의 항구를 가진 현대적인 도시이다.

* 동방 유대교 Orthodox Judaism

동방 유대인들은 전통적인 믿음과 수행을 엄격하게 따르는 이들이다. 동방 유대인들은 다른 모든 것들 사이에서 할라챠(Halacha, 유대교 관례 법규)만이 시대에 따라 변하지 않았다는 것과 오직 훌륭한 권위자만이 그것을 해석할 수 있다고 믿는다. 동방 유대인들은 매일 전통에 따라 기도하고 예배 의식을 치루며 토라를 공부하고 규정식과 안식일을 따를 뿐만 아니라 매일 예배에 참가한다. 동방 유대교인들은 예배당에서 남녀를 분리하고, 공동으로 예배 시간 동안에는 음악이 금지된다.

* 동방 유대인 Oriental Jews

동방 유대인이라는 명칭은 아랍 국가, 이란, 인도 또는 중양아시아의 라디노어(스페인계 유태인이 쓰는 스페인어의 방언-네이버 사전)를 쓰지 않는 유대인들을 일컫는 말이다. 성서 시대에 그들의 조상은 팔레스타인을 떠나 북아프리카 또는 중동으로 향했다. 이주한 유대인들은 이주했던 중앙아시아나 인도 아대륙에서 적응해 살아 감으로써 문화적 동화를 겪었고 모국어로써 현지 언어를 받아들였다. 1960년대 말 동방의 유대인들은 150만명으로 세계 유대인의 1/9를 차지했다. 동방 유대인들은 오스만 제국의 치하에서 팔레스타인 지역을 차지하고 있던 지배적 집단이었다. 그러나 1882-1939년 사이에 팔레스타인으로 돌아온 유대인들은 동방 유대인이라고 간주하지 않는다. 팔레스타인의 유대인 공동체에서 그들의 비율은 2차 세계 대전이 시작할 때 까지 총 1/5로 감소했다. 그러나 1948-49 중동 전쟁의 결과 많은 수의 동방 유대인들이 이스라엘로 이주하기 시작했다.
그들의 높은 출생률을 고려할 때 그들은 한 세대가 흐르기 전에 유대인 인구의 절반을 차지했고 이 후 10년 동안 유대인 중에서 가장 많은 수가 되었다. 그러나 소련으로부터 1990-94년 동안 54만명의 유대인들이 이주함에 따라, 동방 유대인은 아슈케나짐(중•동부유럽 출신 유대인)에게 인구의 최다수 자리를 내주었다. 지중해로 둘러싸인 국가들로부터 이주해온 유대인들만이 세파르디의 의식과 관례를 따랐다. 그들은 예멘, 이라크, 인도와 같은 나라에서 온 이들로 다른 의식과 관례의 역사를 가지고 있었으나 그들의 새로운 예배당(synagogues) 건설을 위한 공공 자금을 받기위해 종종 세파르디의 랍비 최고위자(Sephardic chief rabbinate)와 제휴했다.
정부는 매년 유럽, 아메리카, 오세아니아, 아시아, 아프리카로 분류 되는 대륙에 따른 이스라엘의 통계 추출에 있어서 총 인구의 76%인 해외에서 태어난 유대인들을 분류한다. 엄격히 말하자면 동방 유대인은 지리학적 분류에 의한 것이며, 세파르딤이란 종파를 뜻한다. 그러나 모로코, 알제리 또는 튀니지와 같이 서쪽 아랍에서 기원한 사람에 대해 표현해야 하기 때문에 동방이라는 단어는 이들 모두를 포괄하기에는 부정확하다는 문제가 있다. 가장 논리적이고 민족적으로 올바른 용어는 아랍계 유대인(Arab jew)이다. 아랍 유대인의 규모는 유럽계 유대인이나 미국계 유대인에 필적할 수준이다.
아랍계 유대인, 세파르딤 참조.

* 동방 정교회 Orthodox Christians/Church

(그리스어 : orthodoxos 의 파생어, right opinion)
공식 명칭은 정통 가톨릭 교회이나, 동방 정교회 혹은 동방교회로 알려졌다. 이 명칭은 이단이나 이교적인 것이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문자 그대로 올바른 교리를 따르는 사람들을 의미한다. 교회의 교파에 관해서 로마에 기초하고 서부 교단으로부터 갈라져 나온 동부 유럽과 서남아시아의 역사적인 종파에 해당한다. 그들은 서기 325-787년 사이에 열린 첫 번째 기독교 공의회(seven ecumenical council)의 결정을 받아들였다. 그러나 로마의 교황이 이끌며 공식어로 라틴어를 사용하는 서방 교회와 공식어로 그리스어를 사용하며 콘스탄티노플(지금의 이스탄불)에 기반을 둔 대주교가 이끄는 동방 교회 사이의 간극은 메우기 어려웠다. 서기 9세기의 대주교 포티우스(Photius)가 교황의 권위에 도전하고, 콘스탄티노플 대주교, 마이클 세룰라리우스(Michael Cerularius)와 1054년 교황 레오 9세(Leo IX)가 상호간에 돌이킬 수 없는 파문을 행했기 때문이다. 1095년에서 1272년 발발한 십자군 전쟁은 양측 사이를 더 멀게 했고 화해를 위한 많은 시도들이 실패로 돌아갔다.
동방정교회들은 화려한 예배식과 종교적인 아이콘의 사용으로 유명하다. 종파 내부의 다양한 교회들과의 관계는 복잡하다. 그리스 교회(Greek Church)란 용어는 예배 의식이 그리스식이고 콘스탄티노플의 총대주교의 관할 교구와 연계된 그리스의 교회(the Church of Greece)란 의미로 쓰인다. 동부 지역에 6개의 동방 정교회가 있는데, 불가리아, 키프로스, 폴란드, 루마니아, 러시아, 유고슬라비아로 분류 할 수 있으며 가장 유명한 교파는 러시아 동방 정교회이다.

*동 아랍 Arab East

동 아랍은 아랍어를 사용하는 중동지역에 적용되는 단어이다. 동 아랍은 아랍 북 아프리카지역 국가 인 알제리, 리비아, 모리타니아, 모로코, 튀니지와 소말리아, 수단을 제외한다. 동 아랍은 바레인, 이집트, 이라크, 요르단, 쿠웨이트, 레바논과 아라비아 반도 내 국가 인 오만, 카타르, 사우디아라비아, 시리아, U.A.E와 예멘을 포함한다.

*동안 (요르단강의 東岸) :

서안 혹은 동안이라는 용어는 요르단강의 양 지역을 의미한다. 동안 지역은 요르단 영토에 속한다.


*동예루살렘 :

면적: 1948년에는 6.5㎢, 1967년에는 73.7㎢
인구: 약 45만6천 여명(2008년 기준). 1948~1949년에 발생한 아랍-이스라엘 전쟁 당시 아랍군에 의해 점령당하였고 요르단에 의해 지배되었다. 당시 면적은 6.5㎢. 동예루살렘에는 약 1㎢의 구 도시(the Old City)와 성소(the Noble Sanctuary), 통곡의 벽(the Wailing Wall, 서벽), 성상의 교회(the Church of the Holy Sculpture), 그리고 예수의 무덤이 있다. 동예루살렘은 6일 전쟁 중 1967년 6월 7일에 이스라엘군에 의해 점령되었다.
이스라엘은 1967년 6월 28일에 당시 요르단에 속했던 서안 지역을 동예루살렘에 편입시키고 광활하게 확장된 이 지역에 이스라엘의 통치법을 확대하였으나, 이는 국제연합안전보장이사회의 중재안 252호(1968)에 의해 거부되었다. 13년 후, 이스라엘 정부는 통일 예루살렘을 이스라엘의 분리될 수 없는 수도라고 선언하는 ‘기본 법’을 통과시켰다. 이 법은 국제연합안전보장이사회의 중재안 476호(1980년 3월)와 478호(1980년 6월)에 의해 14:0으로 거부되었다. 비록 동예루살렘의 아랍계 거주자들에게 지역 투표권이 부여되기는 하였지만, 고작 5% 미만이 투표권을 행사함으로써 동예루살렘을 팔레스타인의 미래의 수도(首都)로 삼겠다는 그들의 의지를 표시하였다. 1994년까지 이스라엘은 동예루살렘에 12개의 유대인 정착촌을 설립하였다. 1993년에 집계된 31만 명의 인구 중에서 약 16만 명이 아랍계였고, 15만 명이 유대인이었다.


*두루즈파 Druze :

드루즈파는 1017년 카이로에서 칼리프 알 하킴(Caliph al Hakim)의 자문관인 무함마드 알 다라지(Muhammad al Darazi)의 이름에서 유래된 다라지야(다라지의 일파)로 구성되었다. 이들은 이맘 하킴이 예언자 무함마드를 대표하는 초자연적인 권한이 있다고 주장하였다. 알 다라지가 사망한 후에 이 활동은 이란인 함자 이븐 알리(Hamza ibn Ali)가 이어 받았다. 드루즈는 라마단 기간의 단식이나 성지 순례 등 이슬람의 5주에 구속되지 않는다. 드루즈파는 하마자(Hamaza)와 그 계승자인 바하 알딘 알 무카타나(Baha al din al Mukatana)들이 명시한 7주를 믿는다.
드루즈파는 알 하킴(al Hakim)과 함자 이븐 알리(Hamza ibn Ali)가 세계의 정의를 실현하기 위해 다시 나타날 때, 그들 중 특별히 신앙심이 깊은 자는 종족을 지배할 것이라고 믿고 있다. 이슬람의 이단의 종파로서 분류되는, 드루즈파는 다수인 순니파 무슬림에 의해 박해를 받았고, 이를 피해 드루즈파는 시리아, 레바논, 팔레스타인과 같은 산악지역으로 이동하였다. 현재 그들은 시리아의 남쪽 드루즈(Druze) 산악지역과 레바논의 쇼우프(Shouf) 지역 그리고 이스라엘 등지에 거주하고 있다.


*두바이 Dubai :

아랍에미레이트 연합국(UAE)의 도시이며 에미레이트. 1799년에 설립된 두바이는 20세기초까지 진주채취가 중요한 생산 활동이었다. 인도에서 온 무역상과 더불어 그곳에 거주하던 이란인이 두바이를 무역항으로 발전시켰고, 경제적∙정치적 중요성을 크게 확대되었다. 1966년에 앞 바다에서의 원유발견과 함께 도시는 급격히 향상되었다. 금의 자유무역 중심이라는 명성과 함께, 각 지역으로부터 이주자들이 모여서 두바이는 더욱 번성하였다.
1971년의 두바이 에미레이트의 독립과 함께 두바이는 수도가 되었다. 1970년대에는 현대적인 항구와 배수장치가 있는 도크(dry dock)를 얻게 되었다. 1980~88년까지 지속되었던 이란-이라크 전쟁동안 서방 상품의 역수출의 중심으로서 두바이의 중요성은 커지게 되었다. 재정 금융의 국제적인 주요도시로서 두바이는 아랍에미레이트 연방에서 가장 큰 도시이다


* 두바이 Dubai city

인구수 2,262,000명 (2010년 통계). 1799년에 건설된 두바이는 20세기 초 중요한 도시로써 부상하였다. 인도와 이란의 무역상들이 두바이로 이주해와 정착함으로써, 두바이는 무역항으로 발전하기 시작하였다. 1954년 영국이 아랍 에미리트의 샤르자(Sharjah)에 두었던 주재관을 두바이로 이전을 할 정도로 두바이의 상업적, 정치적 중요성이 증가하였다. 1966년 두바이 연안에서 석유가 발견됨에 따라 도시의 부 또한 급격하게 증가되었다. 인도 아대륙에서 수요가 많았던 금을 교역 할 수 있는 자유 무역 지대로 명성을 얻게 됨에 따라 두바이는 더욱 번영할 수 있었다.
1971년 두바이가 부족 국가로 독립함에 따라 두바이는 수도로써의 역할을 수행하게 되었다. 1970년대 두바이는 현대식 항국와 선박을 건조하고 수리할 수 있는 건선거 항구로 주목받았다. 1980년에서 1988년에 발발한 이란-이라크 전쟁 시기에는 서구의 제품을 이란으로 수출하기 위한 기지로 각광 받으면서, 두바이의 가치는 극적으로 상승하게 된다. 뛰어난 금융 산업을 기반으로 세계적인 도시로 성장한 두바이는 아랍 에미리트연합에서 가장 큰 도시로 꼽힌다.


*두바이 에미레이트 Dubai Emirate :

에미레이트는 에미르(통치자)가 다스리는 땅이란 뜻이다. 옛날에는 현재와 같은 에미레이트 별 국경 개념보다는 부족간의 친선 정도에 따른 혈연적인 요인에 의해 각 군소 에미레이트 별로 통치 지역이 구분되어 있었으며, 현재와 같이 7개의 에미리트로 구분되기 시작한 것은 원유 발견 이후이다.
아랍에미레이트 연합(아랍어-알 이마라트 알 아라비이야 알 뭇타히다)은 아라비아만에 위치하고 있으며, 두바이를 포함하여 7개의 토후국이 합쳐서 연합 국가의 형태를 하고 있다. 과거 여러 에미르별 부족 국가 형태에서 점차 각 지역별로 강력한 에미르를 중심으로 각 부족들이 통일되기 시작하여, 현재와 같은 연합 에미리트로 구성하고 있다.
전체 아랍 에미레이트의 비 원유 부문 교역량의 75~80%가 두바이를 통하여 이루어져서 두바이는 항만 시설이 가장 잘 발달되어 있으며, 한국으로부터 수입품의 대부분이 두바이 항만청 산하 라쉬드 항구 및 자발 알리 항구를 통해 수입 또는 재수출되고 있다. 두바이 항만에는 125개 세계 유수 선사가 운항하고 있으며 5천의 컨테이너선을 포함하여 연간 1만 척의 선박이 입∙출항하고 있다.
7개의 에미리트가 각각 별도의 국제공항을 운영하고 있으나 상업 중심지인 두바이 공항이 가장 활발하게 이용되고 있으며, 한국으로부터 연결편도 대부분 두바이 공항을 경유하게 된다. 두바이 공항은 두바이 중심지에서 약 5km 정도 떨어진 곳에 위치하고 있다.


*디아스포라 diaspora :

그리스 어원의 분산(이산)이라는 의미. 디아스포라는 원래 B.C. 586년에 팔레스타인에서 바빌론으로 흩어진 유대교의 식민지에 쓰이던 용어이다. 이것은 나중에 집합 명사적으로 팔레스타인 지역 밖에 거주하는 모든 유대교도에게 적용되었다. 아시아, 아프리카를 향한 유럽의 식민지 개척과 함께 유대인의 이산도 그 영역이 확대되었다. 그러나 최근에는 세속적인 의미가 더해져서, 제1차 세계대전 동안 박해를 받았던 아르메니아인이나 팔레스타인 전쟁 이후의 팔레스타인 등에 분산된 모든 공동체에 적용되었다.


*딤미 Dhimmi :

이슬람국가에 거주하는 비무슬림. 딤미스는 개인의 권리와 의무와 더불어 평등을 추구하는 아흘 알 딤마(ahl al dhimma)의 구성원들이다. 사회적 배경을 보면 딤마(Dhimma)는 이슬람 율법을 수용하는 것을 조건으로 하는 다른 종교(유대교와 그리스도교) 구성원들 사이에 맺어진 계약이다. 딤마는 꾸란의 내용을 따른다. 즉, “신과 종말을 믿지 않는 무신론자와 싸워라. 그들의 손으로 지즈야(공물)를 바칠 때까지, 그리고 이슬람에 순종하게 될 때까지”.
예언자 무함마드는 나즈란(Najran)의 기독교도와 카이바르(Khaibar)의 유대인과의 복종과 옹호의 협약을 마무리지었다. 그러나 조로아스터교도 문제를 처리해야 할 상황이 되었을 때, 이전부터 아흘 알 키탑(ahl al kitab, 경전의 백성) 지위로 만들려고 이전에 구두로 전해진 성서인 아베스타를 집필하기로 결정했다.
인두세의 형태로 징수하게된 지즈야는 이슬람 체제의 재정에 큰 역할을 하였다. 그러나 무슬림 통치자가 배교자 또는 이단자로부터의 지즈야를 징수하는 것은 금지됐다. 그러나 세계의 다른 종교 이교도들로부터 지즈야를 받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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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목
<ㄱ> 가쉬미 - 국제연합안전보장이사회 결의안 598
<ㄴ> 나본 - 노루즈
<ㄷ> 다국적군 (레바논내) - 딤미
<ㄹ> 라디노어 - 레바논-이스라엘 평화협정 (1983)
<ㅁ> 마나마 - 무사디끄
<ㅂ> 바그다드 - 베이루트
<ㅅ> 사나 - 샤레트
<ㅇ> 아구다트 이스라엘 - 아랍-이스라엘 전쟁
<ㅈ> 자이드파 - 중동평화회담 (마드리드 1991)
<ㅊ> 천연가스 - 총인민회의(예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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