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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ㄹ> 라디노어 - 레바논-이스라엘 평화협정 (19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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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디노어(語) Ladino Language :

라디노어는 역시 유대-스페인어로 알려져 있으며 세파르딕 유대어의 모국어이며 중세 스페인어에서 유래된 언어이다. 히브리어 문자로 쓰여지며 라디노어 어휘는 히브리어, 포루투칼어, 희랍어, 터키어 등의 단어로 이루어져 있다. 라디노어로 된 첫 번째 책은 1510년 이스탄불에서 출간되었다.


*라마단 Ramadan :

이슬람의 성스러운 단식의 달. 아랍어의 어원으로는 “여름의 열기”이며 이슬람력의 9월에 해당한다. 예언자 무함마드가 최초의 계시를 받았던 밤 즉, 라이라트 알 카드르(laylat al-Qadr, 권능의 밤)가 라마단의 26~27의 밤이기 때문에 라마단을 성스럽게 여기고 있다. 꾸란에 계시되어 있는 것처럼 무슬림은 라마단에 단식을 하며, 동이 터서 해가 질 때까지 무슬림 성인 남녀는 음식과 물과 담배, 성행위 등을 삼가 한다.


*라마단 전쟁 Ramadan War (1973) :

헤지라력 1393년 라마단 월(9월)에 이집트와 시리아가 연합하여 이스라엘과 벌인 1973년 10월 4차 중동전쟁.


*라본, 핀카스 Lavon, Pinchas (1904~1976) :

이스라엘의 정치가. 라본은 폴란드의 르와우에 있는 루비안커에서 태어났으며 아론 다윗 고르돈의 이념의 언저리에서 만들어진 유대청년운동의 공동창시자였다. 그는 1929년에 팔레스타인으로 이주하였고 1938~1939년에 마파이의 공동 비서가 되었다. 그는 여러 해 동안 히스타드루트 집행부의 위원으로 근무한 후에 1949~1950년 사무총장이 되었다. 1949년 제1대 크네셋이 선출된 후 그는 1961년까지 위원으로 일했다. 그는 1950~1951년에는 농업성 장관, 1954~1955년에는 국방성 장관으로 재임했다. 그의 두 번째 직책에서 이스라엘 역사상 가장 긴 정치적 논쟁이 되었다. 1954년 이집트 정권을 동요시키고 서방과의 관계를 파괴하기 위한 이스라엘 주민들로 구성된 이스라엘 첩보망에 의한 시도가 이집트에서 실패했다. 이 시도는 미국 영사관과 정보센터는 물론 극장, 우체국과 철도에 폭탄을 설치하는 것이었다. 모두 13명의 이스라엘 정보원들이 체포되었다. 1955년 2월 이 작전이 라본 자신도 모르게 선임장교들에 의하여 행하여진 것이라고 단언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국방장관직에서 물러나야만 했다. 다음 해, 그는 히스타드루트의 사무총장으로 선출되었고 1961년까지 유임했다. 1960년 여름 안전사고에 대한 라본의 입장을 지지하는 새로운 증거가 겉으로 드러나자 자신의 명예회복을 요구했다. 데이빗 벤 구리온 수상은 다수에 의하여 제안된 그 문제에 대한 조사를 내각이 수용하는 것을 거부했으며 사법적 조사를 주장했다.
벤 구리온은 1961년 1월에 수상직을 사임했으나 라본의 문제가 끝난 것은 아니었다. 실로 이 문제는 집권당인 마파이가 소용돌이에 빠져들면서 1960년대 중반까지 지속되었으며 마파이와 마파이의 지도자인 벤 구리온을 약화시켰다. 레비 에쉬콜 정부는 1963년 6월에 구성되었으나 1964년 12월에 라본 문제에 대하여 계속적으로 논쟁이 한창일 때에 실각했다.
라본은 민 하예소드(창설로부터)라고 불리는 정치적 집단을 이끌었다. 이 집단은 주로 지식층들과 1964년 11월 마파이로부터 팽개친 키부츠의 회원들로 구성되었다. 1967년 6월 이스라엘-아랍 전쟁에 이어서 라본은 점령지로부터 이스라엘의 철군에 호의를 보였다.


*라빈 이츠하크 Rabin Yitzhak (1922~1995) :

이스라엘군부 지도자이며 정치가, 총리(1974~1977, 1992~1995). 예루살렘의 중산층 가정에서 출생하였고, 1940년 농대를 졸업했다. 1941년 나치 프랑스정부 하에 시리아에서 팔마의 일원으로 동맹운동에 참여했다(1948~1949). 또한 아랍과 이스라엘 전쟁에서 전투 여단 사령관과 야전사령관 등을 지냈다. 그는 군사훈련 부대장(1954~1956), 북군의 지휘관(1956~1959), 작전지휘관(1959~1961), 참모부의 부장으로(1961~1964), 그리고 참모장으로(1964~1968) 근무했다.
그의 지휘하에 이스라엘군대는 1967년 6월 아랍과 이스라엘 전쟁에서 놀라운 전공을 세운다. 미국대사로 근무하는 동안에도 총리에게 군사의 중요성을 조언했다. 귀국한 뒤 노동당에 참여했다. 그리고 1973년 11월 크네셋에 당선되었다.
라빈은 1974년 3월, 골다 메이어의 정부에서 노동장관이 되었다. 그의 업적들은 1973년 아랍과 이스라엘 전쟁 후에 1975년 9월 이집트의 시나이 제2 협정과 군과 경제의 재건을 들 수 있다. 노동당내에서 점령 아랍의 영토에 관한 문제로 인한 당파싸움은 더욱 격렬하게 되었다. 그리고 당 지도부가 연루된 여러 가지 자금 추문이 표면화되었다. 더욱이 라빈의 도시행정에 대한 무경험, 빈약한 대화 능력 그리고 국방장관인 시몬 페레스와 의견 대립은 노동당 정부의 위치를 위태롭게 하였다.
리빙턴에 은행구좌를 가지고 있었다는 사실이 드러난 다음달 그는 당의 지도부에서 사임했다. 노동당은 5월 총선에서 졌으나, 라빈은 정치적으로 역량을 확보하고 있었고 1948년 설립된 국민연합(National Unity) 정부에서 국방장관이 되었다. 이스라엘의 레바논에서 지속적 군사 작전으로 인하여 여론이 악화되자, 그는 이스라엘 군대를 국경안전지대에 주둔한 소규모의 병력을 제외하고 모두 철수시켰다. 라빈은 1988년에 형성된 국민연합 정부의 국방장관을 계속 수행하였으며, 노동당이 정부에서 물러날 때까지 팔레스타인 봉기(인티파다)에 대한 그의 주요정책을 고수했다.
라빈은 1992년 노동당 당수로 선출되고 6월 선거 이후 노동당을 이끄는 당의 총리가 되었다. 라빈은 PLO(팔레스타인 해방기구)와 대부분의 비밀제휴사항을 감독했다. PLO와의 협의는 외무부장관인 페레스에 의해 시작되었다. 1993년 9월 이스라엘 PLO의 워싱턴에서 오랜 적대관계인 야세르 아라파트와 화해함으로써 1994년 10월 국경에서 후세인 왕과 요르단-이스라엘 평화조약에 서명하였다. 그는 1994년 시몬 페레스와 아라파트와 함께 노벨 평화상을 수상했다. 1995년 9월 그는 팔레스타인 자치규약에 관한 합의에 서명했다. 그리고 11월 텔아비브의 광신적인 유대 극렬주의자인 이갈 아미르(Yigal amir)에 의해 암살되었다.


*라스 알 카이마 에미레이트 Ras al Khaima Emirate :

1,300㎢의 면적에 인구 26만여 명(2008년 기준). 아랍에미리트 연합국(UAE)의 에미레이트(토후국)이다. 1972년 쉐이크 사끄르 이븐 무함마드 알 까시미(1948~)가 UAE에 편입하였다. 1984년부터 석유 채굴에 들어가 80년대 후반에는 일산 1만2천 배럴을 생산하고 있다.


*라스타키스 당 Rastakis Party (이란) :

이란의 정당. 1975년 무함마드 레자 샤 팔레비가 1963년 창립했던 신 이란당을 해체하고 정부 여당으로 창립하였다. 아미르 압바스 호베이다 수상의 지휘아래 이루어진 단일 여당은 1975년 의회 선거에서 7할의 찬성 지지를 얻었다. 라스타키즈 정부는 물가 안정을 위해서 반 이윤법을 통과시키고 가격 규제를 시행하였다.
1977년 샤는 호베이다를 잠쉬드 아무즈가르로 대체시켰다. 정부 반대세력에 대항하기 위해 라스타키즈 관리들은 형사들을 차출하여 저항부대를 창설하였다. 1978년 여름 혁명운동이 치열해지자 샤는 라스타키즈당을 해체하였다.


*라자비 마수드 Rajavi Massoud (1948~) :

이란의 정치가. 코라산 지방 타바스의 중류 가정에서 태어났다. 라자비는 테헤란 대학에서 정치학을 전공하였고, 1965년 무자헤딘 칼크에 가입하여 5년 후 중앙 위원회 위원이 되었다. 또한 요르단의 팔레스타인 부대에서 게릴라 훈련을 받았다. 1971년 서방 외교관을 피격하려 했다는 죄목으로 체포된 2명의 무자헤딘 지도자 중의 하나였으며 사형 선고를 받았다. 감형을 받고 1978년 12월 석방되었다.
라자비는 이슬람 혁명에 적극 가담하였고, 혁명이 성공한 후 라자비는 쿠르드족의 자치를 지지하였다. 혁명정부로부터 무자헤딘 칼크가 기피되고 아야톨라 호메이니가 1980년 대통령 선거에서 지지를 거절하자, 라자비는 아불 핫산 바니 사드르를 지원하여 대통령에 당선되도록 하였다. 1981년 바니 사드르가 실각하자 라자비와 바니 사드르는 지하에 숨어들었다가 7월에 프랑스로 탈출하였다. 프랑스에서 국가 저항위원회를 조직하여 이란 정부에 대한 태업과 게릴라 공격을 주도하였다.
이란 정부의 지속적인 압력에 프랑스가 라자비를 추방하였고, 라자비는 바그다드에 무자헤딘 칼크 본부를 세웠다. 이란 이라크 전쟁 말기에 라자비의 무자헤딘 부대는 이란 영토 깊숙히 침투하였으나, 포위되어 거의 전멸하였다. 라자비는 부인 마르얌과 같이 지속적으로 무자헤딘 칼크의 군사활동을 지속하고 있다.


*라자이 무함마드 알리 Rajai, Muhammad Ali (1933~1981) :

이란의 정치가, 수상(1980~1981), 대통령(1981). 까스빈의 가난한 상점의 점원의 아들로 태어났다. 라자이는 16세에 학교를 그만 두고 테헤란에 가서 벽돌공이 되었다가 1951년 공군에 훈련병으로 입대하였다. 이때에 페다인 이슬람과 가까이하였으며, 5년 후 사범학교에 입학하여 1959년 졸업하였다. 라자이는 지방에서 교사직을 맡고 있다가 1963년 봉기에 연루되어 잠시 투옥되었다. 출감 후 테헤란의 고등학교 교사가 되었다.
라자이는 해방운동에 관심을 가지고 1967년 정치 세력인 이슬람 봉기 상호협력기구에 가입하였다. 1970년에는 무자헤딘 칼크에 가입하였으나, 조직의 좌익 성향에 적응하지 못하여서 2년 후에 탈퇴하였다. 1974년 테헤란의 이스라엘 항공사 사무실 엘알의 폭파기도 혐의로 체포되었다가 고문으로 다리에 심한 상처가 생겼다. 수감 기간 라자이는 아야톨라 무함마드 탈레까니와 후세인 카마네이와 친분을 맺었으며 1978년 출감하였다.
1979년 2월 이슬람 혁명 후, 라자이는 교육부 장관에 임명되었다. 1980년에는 국회 부위원장으로 선출되었고 수상직을 맡게 되었다. 1980년 9월 이라크가 침입하자 국제연합안전보장이사회에서 공론화하였다. 1981년 6월 대통령 선거에서 라자이는 3명의 경쟁자를 물리치고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라츠 Ratz :

이스라엘 정당. 라츠는 슈러마트 아즈니가 1973년 노동당을 탈당하면서 구성한 정당이다. 팔레스타인 점령지에 유대인 정착촌 건설을 반대하며, 종교나 성, 인종 차별을 반대하여서 세속주의자나 여성들로부터 지지를 얻고 있다.
1973년 선거에서 3개의 크네셋 의석을 차지하였고, 1977년 선거에서는 1개의 의석만 차지하였다. 1988년 5개의 의석을 얻은 뒤, 마팜(Mapam)과 쉬누이(Shinui)와 연합하여 메레츠(Merez)를 창설하여 1992년 선거에서 6개의 의석을 확보하였고 노동당 주도의 연합 정부 구성에 참여하였다.


*라카 Rakah :

이스라엘의 정당. 1965년 8월 2천 명의 아랍 회원과 같은 수의 유대인 회원의 모임인 마키(Maki)가 해체되고 라카가 창설되었다. 1965년 11월 선거에서 라카는 크네셋에서 3개의 의석을 얻었다. 1967년 아랍-이스라엘 6월 전쟁에서 아랍 점령지에 대한 합병을 반대하였다. 1969년 투표에서 3석을 얻었다. 1973년 선거에서 라카만이 유일하게 아랍 점령지에서 철수할 것을 촉구하고 팔레스타인의 주권을 인정하였다. 이후 의석은 4개로 늘었고, 1977년 라카는 체코슬로바키아 프라하의 국제회의에 대표단을 파견하여 팔레스타인 해방기구의 대표와 회합을 하였다. 1977년 5월 선거 전날 검은 판더당과 합병하여 평화 평등 민주전선을 구성하여 5석을 확보하였다.


*라타키아 Latakia :

시리아의 도시. 이 도시의 인구는 30여만 명이며 라타키아의 아랍어명은 라디키야(Ladhikiya)이다. 이것은 희랍의 통치자인 셀레쿠스 2세(기원전 226년 사망)의 어머니인 라오디세아에서 유래했다. 이 도시는 기원전 2~3세기에 세레우시드 통치기간동안 주요 항구로 638년 아랍무슬림들의 침입으로 패망할 때까지 두 번이나 지진으로 파괴되었다. 그때부터 1920년 프랑스 위임통치까지 이 도시는 간헐적으로 십자군, 아랍인과 터키인들의 통치하에 있게 되었다. 천부적 여건을 지닌 항구로 이 항구는 오늘날 시리아의 주요항구이다. 이곳의 지역 산업은 어업, 채유 생산, 무두질과 조면 등이 유명하다. 잔존하고 있는 유물로는 바커스의 주랑이라 불리는 고린도 기둥들과 로마의 승리 아치 등이 있다.

* 라프산자니, 알리 아크바르 하쉬미 Rafsanjani, Ali Akbar Hashemi(1933- )
이란 종교인, 정치적 지도자, 대통령직 역임(1989-1997). 라프산자니는 케르만(Kerman) 주의 베르하만(Berhaman)의 종교적인 가정에서 태어났으며, 신학공부를 위해서 곰(Qom)으로 이주하였다. 1951년부터 1953년 사이에 있었던 무함마드 무사디끄(Muhammad Mussadiq)와 무함마드 레자 샤 팔라비(Muhammad Reza Shah Pahlavi)의 권력 다툼 기간 동안, 라프산자니는 무사디끄를 지지했다. 그 후, 라프산자니는 곰 지역에서 아야톨라 루홀라 호메이니 (Ayatollah Ruhollah Khomeini)의 학생이 되었다. 1964년 호메이니의 추방 이후에도 호메이니와 지속적인 접촉을 하면서 호메이니를 지지하였다. 라프산자니는 이슬람 재단을 운용하였으며, 호메이니와 정치적 사안에 대해서 논의 하였으나, 1970년 중반, 체포되어 고문을 당하기에 이르렀다.
라프산자니는 OMC(Organisation of Militant Clergy)의 테헤란 지부의 공동 설립자 중의 한명이었으며, 1977년부터 1978년 발생한 혁명 운동에 활발하게 가담했는데, 특히 Rebolutionary Komitehs의 형성에 깊이 관여 하였다. 그는 이슬람 혁명 의회의 일원이었으며, 이슬람 혁명당의 공동 설립자였다. 그는 내무 장관직에 지목 되었으며 1979년에는 전문 의회(Assembly of Experts)에서 헌법의 초안을 작성하는 책임을 맡아 활동 하였다. 라프산자니가 국회의원(Majlis)으로 선출 된 1980년 7월에는 국회의 대변인으로 활동 하였으며, 1984년 의회가 해산 될 때까지 계속해서 재선에 성공하였다. 국회(Majlis)의 대변인으로써 그는 1981년에 있었던 바니-사드르(Bani-Sadr) 대통령의 탄핵의 중심적 역할을 수행 하였다. 1982년, 새 전문 의회의 선거 이후, 라프산자니는 전문 의회의 부의장으로 활동하게 되었다. 또한 그는 호메이니의 개인 대변인으로써 최고방어회의(Supreme Defence Council)에서 활동하였다.
이란-이라크 전쟁 중이던 1982년 중반 이란은 이 전에 이라크에게 빼앗겼던 지역을 수복 하였다. 라프산자니는 이라크에게 전쟁에 대한 보상금으로 1조원을 요구하며, 이라크가 이란의 요구를 들어 주지 않을 경우 이라크로 전진하겠다는 의사를 밝혔다. 1984년 국회(Majlis)선거 이 후, 그는 국회의 대변인으로 재 선출 되었으며, 이 후 4년 동안 대변인 직을 유지 하였다. 제 6회 전쟁기념일에 라프산자니는 전쟁은 사람들을 계몽하기 위한 도구로 사용 될 수 있으며, 이슬람 혁명을 위협하는 문제들과 투쟁해 나갈 것이라고 밝혔다. 1988년 봄, 이란 군사력에 차질이 발생하였고, 호메이니는 라프산자니를 이를 해결하기 위한 국책 노선의 총 책임자로 임명하였다. 라프산자니는 당시의 상황이 명백하게 악화되고 있다고 판단하였고, 1988년 7월 중순 전문 의회(Assembly of Experts)를 설득하여 유엔안전보장회의를 통한 휴전을 제의하도록 호메이니에게 건의하였다. 호메이니는 이 같은 충고를 받아들였다.
1989년 6월 호메이니의 죽음 이후, 대통령이었던 알리 후세인 하마네이(Ali Hussein Khamanei)가 호메이니의 뒤를 잇게 되었고, 이에 라프산자니는 자신이 맡고 있던 대변인 직을 사임하고 대통령직에 도전하였다. 그는 선거에서 94퍼센트의 지지를 받았다. 헌법 개정으로 인하여 라프산자니는 국가의 1인자로써 나라를 다스릴 수는 없었으나, 그는 자신의 정부에서 원리주의적인 요소를 배제하는 정책을 펼쳤으며, 경제 자유화를 이란 사회에 소개하기도 하였다. 또한 라프산자니는 외국인 정책을 실용적인 노선을 유지하기 위해 노력 하였으며, 독일, 프랑스, 일본, 러시아와의 우호증진을 위하여 힘썼다. 그러나 오일 가격 하락과 경제 불황, 인플레이션이 발생하였고 1993년 치러진 대통력 선거에서 그의 지지율은 63퍼센트로 하락하였다. 1997년 대통령직에서 물러났다.

*라피 Rafi :

히브리어 라시마 포아레 이스라엘(Reshima Poalei Israeli, Israel workers List)의 첫 글자를 딴 이스라엘 정당이다. 1965년 초기에 좌파 아흐두트 하 아보다(Ahdut ha Avodah)의 다비드 벤 구리온과 합치기 위해 마파이의 결정에 동의하지 않으면서 1965년 총선에서 마파이(Mapai)와 결별하고 자신의 세력을 제공했다. 이때 라피는 단지 10석을 크네셋(Knesset)에서 얻었고 마파이(Mapai)는 45석이었다. 2,500석 중 라피의 의석 수는 마파이의 10분의 1에도 미치지 못했다.
1968년 라피는 마파이와 아흐두트 하 아보다(Mapai and Ahdut Ha Avodah)와 이스라엘 노동당(Israeli Labour Party)을 결성하기 위해 통합했다. 라피의 다수의견을 무시하면서까지 벤 구리온(Ben-Gurion)은 1969년 선거에서 새로운 세력을 이끌었으나, 단지 4석만을 차지했다.

* 러시아 동방 정교회 Russian Orthodox Church

6개의 동방 정교회 중, 러시아 동방 정교회는 오래된 슬라브 전통 형식의 예배를 행하는 종파로 가장 중요한 종파 중의 하나이다. 이 종파는 콘스탄티노플의 케이브(Keiv)지방을 거점으로 하였으나, 1589년 총 대주교에 의해서 모스크바로 이동하였다. 1721년 표트르 대제 통치 하에 개최된 종교 회의에 의해서 러시아 동방 정교회는 국교의 지위를 상실했다. 1917년 볼쉐비키 혁명 전날, 총 대주교는 지위를 되찾았고 후에 공산당원으로 활동하였다. 총대주교는 1943년 2차 세계대전 기간 동안 각광받은 러시아 민족주의와 함께 다시 한 번 주목받기 시작하였다. 이 후, 러시아 동방 교회는 국가와의 협정을 통하여 1991년 공산주의가 붕괴될 때까지 자신들의 종교를 유지할 수 있게 되었다. 예루살렘에 건설되어 있는 러시아 동방 정교회의 성당은 현재까지도 중요한 랜드 마크로써의 역할을 하고 있다.

*레바논 Lebanon :

공식명: 레바논 공화국 Republic of Lebanon
수도: 베이루트(Beirut)
면적: 10,400㎢
인구: 410만여 명(2012년 추산)
국내 총생산(GDP): 440억 달러(2012년 추산)
화폐: 레바논 파운드(LP)
정부형태: 공화정, 국회에서 대통령 선출
공식언어: 아랍어
공식종교: 없음
행정구역: 레바논은 6개의 주로 나뉘어져 있음
헌법: 1926년 5월 프랑스 위임 통치령에 의해 공포된 헌법은 1927년, 1929년과 1943년 프랑스에 의해 개정되었고 1947년과 1990년 레바논 국회에 의한 개정이 있었는데 마지막 개정 헌법은 31개항에 대해 개정하였다. 레바논은 다당제 국가이며 다종교 국가이다. 1943년 이래로 신조주의가 정치와 행정 조직을 구성하였다. 공화국의 대통령은 마론파 기독교가 맡으며 수상은 순니파 무슬림이고 국회 의장은 쉬아파 무슬림이 맡도록 규정되어 있다.
인종구성: 아랍인 92.5%(레바논 아랍인 81%, 팔레스타인 아랍인 11.5%), 아르메니아인 2.5%, 다른 인종 5%.
행정부: 1990년 헌법 개정으로 국회가 선출하는 6년 임기의 대통령의 권한이 삭감되었으며 내각에 더 많은 자율권을 줌으로써 내각의 권한을 증대시켰다. 대통령은 국회에 의해 통과된 법을 이행하고 승인하는 권한을 가진다. 하지만 그의 결정은 수상에 의해 연대 서명되어야 한다. 어떤 일에 대해서는 대통령은 국회의장과 고위직 의원들과 협의를 거쳐야만 한다. 내각의 장관들은 국회의원이 될 필요는 없으나 국회의원의 책임이 있다.
고위 공직자:
역사: 1920년 국제연맹으로부터 대시리아에 대한 위임통치권을 부여받은 프랑스는 레바논 산맥의 북, 서, 남쪽의 일부분을 증가시켜 새로운 대레바논 통일체를 형성시켰다. 1926년 프랑스는 국회와 국회에 의해 선출된 행정수반을 두는 공화국 헌법을 공포하였다. 또한 국가명을 레바논 공화국으로 개명하였다. 프랑스는 1932년 헌법을 중지하였다. 그리고 1932년에 인구조사를 실시하여 16개의 인정된 종파에 대한 인구수를 산출했다. 1936년 프랑스는 헌법을 회복시켰으며 11월에 서명된 프랑스-레바논 조약은 레바논에 상당한 자치권을 부여하였다.
2차 세계대전 동안에 친독일 정부였던 비시(Vichy) 프랑스 정부는 1940년 레바논을 포함한 해외의 프랑스 영토를 점거하였다. 비시 정부의 레바논 점거는 1941년 6월 자유 프랑스 군대와 영국에 의해 타도되었으며 레바논은 명목상의 독립이 주어졌다. 1943년 3월 국가조약은 6명의 기독교 의원과 5명의 무슬림 의원이라는 공식을 명기하였다. 9월에 비샤라 쿠리(Bishara Khouri)가 대통령으로 선출되었다. 1945년 레바논은 아랍연맹의 설립 회원국 중의 하나가 되었다.
1946년 12월 프랑스 철수와 더불어 레바논은 완전히 독립하게 되었다. 레바논은 팔레스타인 전쟁(1948~1949)에 참여하였고 1949년 3월 이스라엘과의 정전에 서명하였다. 1949년 후반에 쿠리가 대통령에 재 선출되었으나 1952년에 강제적으로 사임 당했으며 카미엘 샤몬이 대통령이 되었다. 샤몬은 아이젠하워 독트린을 서명, 승낙하였고 그의 군과 카말 줌블라트군 사이에 발생한 1958년 5월~7월의 레바논 내전의 와중에 미군의 도움을 요청하였다. 대통령직에 성공적으로 오른 푸아드 샤합은 봉건적 가치와 종파적 분열에 빠져 있는 레바논의 정치-행정 조직을 현대화하려고 노력하였다. 혁신적인 발걸음은 샤를 헬로우(Charles Helou) 대통령 하에서 그 활력이 떨어졌다.
레바논은 1967년 6월 아랍-이스라엘 전쟁에서 떨어져 있었다. 무장 팔레스타인인들의 증가는 레바논과 그들과의 충돌을 야기했으나 잠정협정으로 이러한 사태를 막았고 1969년 카이로 협정에 의해 완전히 해결되었다. 술레이만 푸렌지에 대통령의 임기 동안에 PLO는 1972년 그들의 본부를 베이루트에 세웠다. 레바논은 1973년 아랍-이스라엘 전쟁에서도 비껴나 있었다.
1975년 4월 레바논 내전이 발발하였다. 1976년 봄, 레바논민족운동(LNM)과 PLO의 연합군이 국가의 2/3를 통제하게 되자 시리아가 기독교 레바논 전선 측에 개입하게 되었다. 9월 시리아가 지명한 일리아스 샤르키(Elias Sarkis)가 대통령으로 선출되었다. 1977년 3월 LNM의 지도자인 카말 줌블라트가 암살 당하자 그의 아들인 왈리드가 그를 계승하였다.
1978년 3월 이스라엘은 PLO 기지들을 파괴하기 위해 남부 레바논을 침공하였다. 6월 이스라엘은 철수하였으나 남부 레바논의 주요 기지들을 기독교 전사들에게 넘겨주었다. 마론파 전사들은 이스라엘과 강력한 관계를 맺을 계획을 세우고 1981년 중반 베카 계곡의 자흘레(Zahle)까지 그들의 영향력을 확대하려고 시도하였으나 시리아에 의해 그들의 시도는 좌절되었으며 지금 그곳은 무슬림 진영이 후원하고 아랍 연맹의 보호 하에 3만 명의 평화유지군이 주둔하고 있다.
이집트-이스라엘 평화협정에 따라 1982년 4월 말 이스라엘은 시나이 반도로부터 철수를 시작하여 철수를 완전히 끝낸 6주 후인 6월초에 다시 레바논을 침공하였다. 이스라엘은 베이루트를 포함한 레바논의 2/5를 점령하였고 바쉬르 제마엘이 대통령에 선출되는데 도움을 주었다. 그러나 제마엘은 대통령직에 오르기 전에 암살 당하고 말았다. 이스라엘의 침공은 11,644명의 팔레스타인 전사와 2,700명의 시리아군이 서베이루트를 떠난 후인 9월 1일 끝났다.
아민 제마엘이 대통령으로 선출되었다. 미국의 압력 하에 그는 1983년 5월 이스라엘과 평화 협정 초안에 가 조인하였다. 그러나 협약에 대한 시리아의 반대와 더불어 강력한 국내의 반발은 1984년 3월 협정이 파기되는 결과를 낳았다. 스위스 라우센에서 국가 화합회담이 개최되었고 그 결과 국가 통일 정부가 구성되었다. 1985년 6월 이스라엘은 철수를 완료하였고 남부레바논의 진지들을 자신들의 대리군인 남부레바논군(SLA)에게 넘겨주었다. 1987년 초 시리아는 아말(Amal)과 쉬아파 전사들과 좌파의 비쉬아파 무슬림 간에 발생한 계속되는 싸움에 대한 질서를 회복시키기 위해 그들의 군대를 파견하였다.
제마엘을 계승하는 새 대통령을 선출하는데 국회가 실패하자 1988년 9월 22일 제마엘은 자신의 참모장인 미셀 아운 장군에게 임시 군사 정부를 형성할 것을 요구하였다. 내각에 임명된 5명의 장교들 가운데 3명의 무슬림 장교들 모두는 임시 군사 정부에 합류할 것을 거부하였다. 1989년 5월 아운 장군은 시리아로부터의 해방전쟁을 개시하였다. 5달 후, 사우디 아라비아의 타이프(Ta'if)에서 개최된 ‘타이프 협정(Ta'if Agreement)’ 내전종식과 국민화합을 위해 개최한 국회의원 회의에서 정치혁신을 포함한 국가 화해 헌장을 채택하였고 그 헌장은 후에 레바논 내에서 개최된 회의에서 승인되었다. 그들은 또한 시리아가 추천한 엘리아스 하라위를 대통령으로 선출하였다.
마론파 레바논군이 타이프 헌장을 받아들인 반면, 아운 장군은 이를 거부하였다. 이것은 기독교 내부에서 폭력을 야기했으며 아운은 격렬한 폭력을 행사하였다. 1990년 8월 국회가 타이프 협정을 법으로 통과시키고 합법적으로 무슬림들과 기독교도들에게 동등함을 부여하고 마론파 대통령의 권한을 삭감시키고 난 후, 1990년 10월 13일, 레바논군과 시리아군은 아운 장군의 군대를 패퇴시켰다. 그것으로써 레바논 내전은 끝나게 되었다. 국가 통일 정부는 여러 전사 파벌들을 무장 해제시키고 수도의 경계를 동, 서베이루트로 하였으며 1991년 5월 시리아와 ‘형제애와 협력과 조화’의 협정에 서명하였다.
보다 확대된 국회 총선이 1992년 8월~10월 사이에 있었다. 마론파가 지배하는 파벌들의 선거 보이콧 때문에 새 의회와 새 대통령은 강력한 친시리아 성향이 되었다. 레바논은 1991년 10월 마드리드 중동평화 회담으로 시작한 중동 평화 회담의 과정에 참여하였다. 그러나 시리아와 이스라엘 간의 회담이 고착상태에 빠져들자 레바논-이스라엘과의 쌍무회담도 거의 진척되지 않았다. 레바논 정부는 이스라엘에게 1978년 안전보장이사회의 결의안 425항에 따라, 무조건적으로 남부 레바논으로부터의 완전 철수를 요구하였으며 그 지역의 남부레바논군(SLA)에 대한 반대세력인 히즈볼라(Hizbullah)에 대해 그 지역에서의 활동을 허락해 줄 것을 요구하였다.
입법부: 국회라 불리는 의회는 128명의 의원으로 구성된 단원제이며 기독교인과 무슬림 간 동수로 나뉘어진 의원들은 4년 임기로 보통선거로 선출된다. 의회는 합법적이고 헌법적인 권한을 갖고 있으며 또한 의회는 대통령 선출을 위한 선거인단이 된다. 만일 제1차 비밀 투표에서 2/3 이상의 지지에 의한 대통령 선출이 실패한다면 과반수에 의해 대통령이 선출된다. 헌법 문제에 대해서는 2/3의 정족수가 요구되지만 다른 결정사항들은 과반수에 의해 채택된다.
1975년 4월 레바논 내전이 발발함에 따라 1972년 선거로 구성된 의회는 1992년 9월 개정된 헌법 하에서 새로운 선거가 시행될 때까지 주기적으로 의회의 기간을 연장하여 왔었다. 이슬람 종파에 할당된 새로운 의석은 순니파 27석(헌법 개정 전 20석), 쉬아파 27석(19), 드루즈파 8석(6), 알라위파 2석(없었음)이다. 기독교 종파에 할당된 의석은 마론파 34석(30), 그리스 정교 14석(11), 그리스 카톨릭 6석(6), 아르메니아 카톨릭과 아르메니아 정교 6석(5), 프로테스탄트와 비무슬림 소수파 4석(2)이다.
종교구성: 1986년 비공식 통계. 무슬림 60~73%(쉬아파 31~39%, 순니파 21~26%, 드루즈파 7%, 알라위파 1%)이고 기독교는 26~39%(마론파 16~25%, 그리스 정교 5~6%, 그리스 카톨릭 3~4%, 아르메니아 카톨릭과 정교 2~3%)이며 그 외에 1%가 있다.


*레바논 공산당 The Communist Party of Lebanon, CPL :

레바논의 공산주의 활동은 1924년 레바논 인민당이 지식인과 무역 조합원을 규합하면서 시작되었다. 1925년 좌익 조직인 스파르타커스당에 흡수되면서, 시리아 레바논 공산당(CPSL)으로 개칭하였다. 1925~1927년까지 CPSL이 드루즈 반군을 지원하였기 때문에 프랑스법에 따라 지도부가 체포되었다. 1928년 미국의 기독교 세력이 득세하기 전까지, 모스크바에 거점을 둔 국제공산당(코민테른)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였다.
1936년 코민테른의 의견을 수용하여 CPSL의 당권을 기독교도 후아드 세말리와 시리아 쿠르드 출신 칼리드 바크다쉬에게 양분하였다. CPSL이 반제국주의와 노동자 농민 혁명 노선을 추구하자, 프랑스 정부는 무역 조직을 인정하지 않았다. 1936년 프랑스에서 공산당의 지지를 받는 좌익 인민전선이 정권을 잡게되자 상황이 바뀌었다. 제2차 세계 대전 중에 2백 명이었던 당원이 2천 명으로 증가하였다. 1943년 의회 선거에 참가하게 되었고, 1946년 독립 당시 규모는 1만6천 명으로 확대되었으나, 1947년 소련이 팔레스타인 분할안에 동의하자 CPL은 침체되었다. 당시 CPL이 소련의 정책 노선에 동의하자, 정부는 공산당 활동을 금지하고 무역 조합을 해체하였다.
1956년 영국, 프랑스, 이스라엘이 연합하여 이집트를 공격하였을 때, 까밀 사몽 대통령은 이 3국에 대한 비난을 거절하자, 지방 나세르주의자를 중심으로 아랍민족주의자들이 CPL을 계승하는 분위기가 되었다. 1958년 레바논 내전 당시, 좌익 민족주의 진영과 연합하여 샤몽 대통령과 대립하였다. 1965년 CPL은 공산주의자 가말 줌블라트가 이끄는 국민진보당에 합류하였다.
1974년 노동자 고용인 연합을 구성하였다. 1975년 레바논 내전 발발 직전, CPL은 레바논 공산당 행동기구(OCAL)와 레바논 국민운동(LNM)과 연합하여 우익진영과 전투를 벌였다. 1975년 CPL의 당원은 1만5천 명에 이르렀고 이 중 쉬아파 무슬림이 반수에 달했다.
1978년 베이루트에서 열린 10개 아랍 공산당 회의에서, 반시온주의 운동이 결의되었다. 내전이 끝날 무렵 대부분의 공산당은 아말파나 히즈볼라로 이적하였다. 1990년 10월 레바논 내전이 끝나자 CPL의 활동은 쇠퇴하였다.


*레바논군 Lebanese Force :

레바논 민병대와 정당.
1976년에 설립된 레바논군(LF)은 팔랑당(Phalange), 국민자유당과 삼목당(Guardians of the Cedars)과 알-탄짐(al-Tanzim)의 마론파 민병대들로 구성되어 있다. 이 연합군은 바쉬르 제마엘에 의해 통솔되었다. 1982년 그가 암살 당하고 난 후, 새 사령관인 파디 아프람 (Fadi Afram)은 공개적으로 친이스라엘 정책을 채택하였고 레바논과 이스라엘 간의 회담을 촉구하였다. 1984년 3월 레바논-이스라엘 평화협정의 초안이 파기되자 LF의 지도력은 푸아드 아부 나디르(Fuad Abu Nadr)로 넘어갔다. 1985년 3월 무혈 쿠데타 후, 사미르 게아제아(Samir Geagea)가 LF의 군대를 맡았다.
1989년 12월, 타이프 협정에 대한 게아제아의 지지는 LF와 기독교 지역에 기지를 둔 기독교 레바논군을 지휘하고 있던 미셀 아운 장군과의 전투를 유발시켰다. 이 전투는 게아제아가 1990년 4월 국가수반으로 아운과 맞서고 있던 엘리아스 하라위 대통령에게 충성을 맹세한 후 더욱 격렬해졌다. LF가 아운의 지역에 대한 하라위의 봉쇄 지원을 시작한 5개월 후에 아운의 영향권 하에 있던 기독교 지역의 약 1/3이 그의 영향력에서 벗어났다. 1990년 10월 내전을 끝나게 했던 아운의 붕괴 당시 LF는 바쉬르 제마엘 하의 병력 2만 명과 예비대 2만 5천 명으로 최고의 정점에서 엄청나게 약해져 1만 명 정도의 군대였다.
게아제아는 12월에 구성된 국가 통일 내각에 참여하였다. 다음해 25살 이하의 모든 전사들을 정규군으로 통합하는 국가의 공식 절차에 따라 정부는 6천5백 명의 LF전사들을 군으로 흡수하였다. 그 당시에 LF는 정당으로 변신하였다. LF는 1992년 총선을 보이콧하였다. 1994년 초, 조니에(Jonieh)의 마론파 교회 폭파사건이 발생하자 5월에 LF는 활동이 금지되었고 게아제아는 폭발사건에 연루된 죄로 체포되었다.


*레바논 군사력 Military in Lebanon (1994) :

총 무장 군: 현역 44,300명. GDP 대비 군사비 지출 4.1% (1992)
육군: 정규군 4만3천 명. 사용무기: 탱크 100대, 장갑차 550대, 주 포 150문.
공군: 정규군 8백 명. 사용무기: 전투기 3대, 전투 헬리콥터 4대.
해군: 정규군:  5백 명. 사용무기: 순시 연안 전투함 9척.
준 군사부대: 현역 1만3천 명(이 가운데 내부 보안군 5천 명).
레바논 주둔 시리아군: 육군 3만 명.


*레바논 내전 Lebanse Civil War (1958) :

1958년, 레바논 내전은 5월부터 6월까지 지속되었다. 대통령인 카밀레 샤문과 카말 줌블라트가 이끄는 무슬림 사회주의 민족전선(SNF)이 주축인 반대주의들 간의 차이는 1958년 2월 아랍연합 공화국이 탄생한 후에 샤문이 야당에 대한 끊임없는 탄압을 가중시키면서 더 커졌다. 5월 8일 대통령을 비난한 혐의로 복역했던 기독교 신문 발행인 나십 메트니가 살해되었다. 이로 인하여 35명의 사망자를 낸 반정부 폭동이 트리폴리에서 일어났다. SNF는 전국적인 파업을 계획하자 샤문은 비상사태를 선포했다. 5월 12일 내전이 군대의 중립으로 헌병대와 마론파 민병대로 구성된 샤문 지지자들과 줌블라트 지지자들 간에 시작되었다. 양측간에 싸움이 격화되자 그것을 끝내기 위하여 군대가 개입했다. 6월 중순 줌블라트 진영이 레바논의 1/3를 장악했을 때 친서 이라크 황제인 파이잘 2세 이븐 가지는 공화국 장교들에 의하여 전복되었다. 그 지역에서 그의 유일한 동맹을 빼앗기자 샤문은 아이젠하워 닥트린 하에 미국으로부터 군사적 원조를 요청했다. 곧 14,300명의 미 해병대와 공수부대가 도착하여 미 6함대의 765척의 군함을 후원 받았다. 내전은 종전 직전에 잠깐 치열했으나 양측은 군사령관으로 유일한 대통령 후보인 푸아드 샤합 장군을 받아들였다. 전쟁은 1,400~4,000의 레바논 희생자를 내었다. 미군 철수는 10월 25일에 이루어졌다.


*레바논 내전 (1975~1990) :

좌파의 무슬림과 우파의 마론파 간의 전통적 경쟁관계는 1970년대 초 팔레스타인 해방기구와 팔레스타인 의용군이 레바논에 도착함으로써 눈에 띄었다. 또한 1975년 3월쯤 중동평화과정을 진전시키기 위한 미 국무장관 헨리 키신저의 왕복외교는 힘을 소진해버렸다. 이것은 미국에게 있어서 미국의 외교실패에 대한 아랍인들의 관심을 돌리기 위해 내전에 곤경에 빠진 아랍인들을 살피기에 적합했다. 1975년 4월 13일 동베이루트의 팔랑훼 민병대에 의한 팔레스타인에 대한 공격은 내전의 시작을 알리는 것이었다. 내전은 1990년 10월 13일까지 지속되었으며 다음과 같은 국면을 겪었다.

<제1국면> 1975년 4월에서 1976년 5월- 개혁연합의 주도권. 폭력이 전국에 만연. 주요 야당 진영은 카말 줌블라트가 이끄는 레바논 국민운동(LNM), 민병대를 가지고 있는 샤문에 의하여 주도되는 레바논 전선, 바쉬르 게마일의 명령을 받는 레바논군 등이었다. 팔레스타인 해방기구(PLO)는 LMN과 연합을 하고 공동지휘체계를 세웠다. LNM은 신앙고백주의의 종결과 다수인 무슬림에게 적합한 정치 체제로 개혁할 것을 요구했다. 레바논 전선은 정치적 제도적 개혁 논의 이전에 레바논으로부터 팔레스타인들을 추방하자고 주장했다. 이 국면 동안에 양측은 그들 지역 내에서 호전적인 것들은 없애기로 결정했다. 1976년 1월에 전국적으로 일어난 격렬한 전쟁으로 국가기관들과 공공건물들이 파괴되었고 레바논 군대가 분열이 되었다. 레바논 전선은 자포자기하여 술레이만 프란지에 대통령을 통하여 시리아로 돌렸다. 이스라엘과의 투쟁에서 PLO에게 광범위한 범위를 부여함으로써 급진적 레바논이 이스라엘을 자극하게 되는 것이 두려워 하피즈 아사드 시리아 대통령은 마론파가 주도하는 레바논 전선을 돕기로 결정했다.

<제2국면> 1976년 6월부터 1978년 2월- 시리아의 간섭과 주도권. 시리아 군대가 개입함으로써 완전패배에서 레바논 전선은 구사일생으로 살아났다. 리비아의 중재로 다음의 휴전은 대통령 선거의 근거를 마련했다. 시리아인 후보 일리아스 사르키스는 승리하여 1976년 9월에 대통령직을 차지하게 되었다. 두 달 내에 휴전이 레바논의 남부지역을 제외한 전역에서 취해졌고 남부지역은 이스라엘에 대항하는 팔레스타인의 활동이 이스라엘 지원을 받는 기독교 민병대에 의하여 방해를 받고 있었다.

<제3국면> 1978년 3월부터 10월- 첫 번째 이스라엘의 침공. 1978년 3월 11일 팔레스타인 게릴라가 유대인 주를 공격하자 이스라엘은 남부 레바논을 침공했다. 5월에 마론파 지도자들인 피에르 게마일과 샤문이 무기지원을 위하여 이스라엘을 방문했다. 6월 13일 팔랑훼 분대는 대통령직에 대해 바쉬르 게마일에게 만만치 않은 어떠한 경쟁자라도 제거하기 위하여 술레이만 프란지에의 아들인 토니 프란지에를 암살했다.

<제4국면> 1978년 11월부터 1982년 5월. 기독교 미니국가의 강화. 1979년 5월~6월에 팔랑훼는 국민자유당(NLP)과 충돌하기 시작했다. 분쟁은 팔랑훼가 NLP 전사들을 패배시킴으로써 1980년 6월 극에 달했다. 1980년 4월말 팔랑훼와 팔랑훼의 시리아 반대파들 간에 자흘의 북서쪽에 있는 사닌산을 쟁취하기 위한 싸움에서 이스라엘이 개입하여 시리아의 헬리콥터 2대를 격추했다. 3달 후에 미국의 중재로 이스라엘, 시리아, 팔레스타인 해방기구 간의 3가지 방법의 이해를 따라 휴전이 남부 레바논에서 실시되었다. 이스라엘 국방장관인 아리엘 샤론이 1982년 1월에 이스라엘의 레바논 침공을 계획하기 위하여 LF의 지휘관들과 의논하였다.
이스라엘은 마론파 민병대에 대한 무기 선적을 재개했다.

<제5국면> 1982년 6월부터 1984년 2월. 이스라엘의 제2차 침공과 이의 여파. 6월 3일 영국 주재 이스라엘 대사인 슐로모 아르고브에 대한 암살시도가 실패하자 이스라엘은 레바논을 공격했다. 9월 13일 대통령으로 선출된 바쉬르 게마일이 그의 팔랑훼 본부를 파괴한 폭발사고에서 죽음을 당했다. 이스라엘 군부대는 질서 유지와 보복적 폭력을 방지한다는 목적으로 베이루트를 점령하였다. 9월 16~18일 사이에 약 2,000명의 팔레스타인 난민들이 베이루트의 사바 진영과 샤틸라 지역에서 팔랑훼 민병대에 의하여 학살당했다. 9월 20일 미국, 영국, 프랑스, 이태리군으로 편성된 서양의 다국적군(MNF)이 출범하였다. 다음 날 아민 게마일은 의회에서 대통령으로 선출되었다. 9월 29일 이스라엘은 베이루트를 떠났다. 1983년 5월 17일 이스라엘은 레바논 의회가 압도적으로 레바논-이스라엘 평화협정을 채택한 후에 이에 서명하였다. 그러나 아민 게마일 대통령은 서명을 보류했다. 9월 3일 쇼푸지역에서 이스라엘이 철군함에 따라 그들의 자리는 팔랑훼 민병대와 레바논 군대에 흡수되었다. 이것은 그들과 드루즈 연맹간의 싸움을 야기했다. 미국과 프랑스는 레바논 군부 측에 군용기와 군함을 가지고 개입하였다. 휴전이 사우디아라비아에 의하여 9월 25일에 중재되었다. 그러나 미국은 항공모함으로 레바논 서 중부에 대한 정찰을 계속했다. 10월 23일 미국과 프랑스 군 사령부에 대한 트럭 폭탄투하로 241명의 미군과 59명의 프랑스군들이 사망했다. 11월초에 제네바에서 제1차 민족 화합위원회가 열렸다. 1984년 2월 3일 레바논군과 레바논 무력단체(LF)에 의한 서베이루트에 있는 쉬아파 교외에 대한 공격이 있는 후에 레바논군과 LF측, 그리고 아말-드루즈 연합측 간의 싸움이 일어났다. 미 군함들은 무슬림군에 반대하여 개입하였다. 레바논군으로부터 무슬림군의 탈퇴에 이어 아말-드루즈 연합은 서베이루트로부터 기독교 군대를 추방했다. 1984년 2월 7일 미국은 베이루트에서 군대를 철수했고 나머지 서방의 다국적군의 회원국들도 선례를 따랐다.

<제6국면> 1984년 3월부터 1986년 1월. 시리아의 주도권 반환. 아사드의 격려를 받은 게마일 대통령은 레바논-이스라엘 평화 협정안을 폐기하기로 결정했다. 레바논 의회도 3월 5일에 같은 결정을 했다. 스위스의 로잔에서 제2차 민족 화합위원회가 있은 후 3월 중순 민족 화합정부가 구성되었다. 1985년 6월 6일 이스라엘은 기독교 민병대에게 레바논 남부지역의 그의 진지를 양도함으로써 레바논에서의 철군의 마지막 단계를 완수했다. 그러나 이스라엘 군대를 1,000명 남겨두었다. 12월말에 아말, 드루즈 그리고 LF의 사령관들은 레바논 사태를 해결하기 위하여 정치개혁과 레바논-시리아 관계에 대한 개요를 설명하는 국민협정에 서명했다. 하지만 협정은 LF 사령관이 그의 집행위원회의 서명을 보장할 수 없어서 실패로 돌아갔다.

<제7국면> 1986년 2월부터 1988년 9월. 시리아 군사력의 한계. 1987년 2월 서베이루트 지역에서 아말과 드루즈 민병대 간의 싸움에 이어 시리아는 1982년 9월에 철수한 그의 군대를 질서를 유지하기 위하여 파병했다. 1988년 4월 초 남부 레바논에서 아말과 히즈볼라 간의 몇몇 충돌이 있었다. 이런 일들이 5월말까지 지속되었다. 4월 중순에 아사드와 미 국무장관인 조지 슐츠는 레바논의 정치 개혁에 대하여 협조하기로 합의하였다. 의회가 새 대통령 선출에 실패하자, 1988년 9월 22일 퇴임하는 게마일 대통령은 그의 비서실장인 미셀 아운 장군에게 임시 군사정부를 구성하라고 지시했다. 그는 5명 장교로 내각을 구성하였는데 3명의 무슬림 장교는 이를 거부했다.

<제8국면> 1988년 10월부터 1989년 9월. 해방 전쟁. 아운은 1989년 2월 기독교 지역에서 LF의 억압과 공격에 이어 3월 중순에 시리아에 대하여 해방전쟁을 선포했다. 시리아는 기독교 지역에 대하여 영공과 육로를 차단했다. 5월 25일 아랍연맹 정상회담은 6개월 이내에 레바논 사태를 해결하기 위한 알제리, 모로코, 사우디아라비아로 구성되는 정상 위원회를 구성했다. 8월 중순 14개의 레바논 단체들이 반아운 전선을 구축했다.

<제9국면> 1989년 10월부터 1990년 10월. 타이프 협정. 9월 30일과 10월 22일 사이에 레바논국회의원 62명 가운데 58명이 사우디아라비아의 타이프에서 있은 민족 화합 헌장에 대하여 논쟁을 벌이고 이를 채택했다. 아운은 이를 거부했으나 마론파 레바논 전선은 이를 수락했다. 11월 5일 꿀라이야트의 레바논 땅에서 타이프 협정을 서명한 후에 레바논 의회는 레느 무아와드를 대통령으로 선출했다. 그는 11월 22일에 암살을 당한 후에 이틀 후 의회는 일리아스 흐라위를 대통령으로 선출했다. 1월부터 1990년 3월까지 아운 당원들과 LF 간에 치열한 싸움이 있었다. 결과적으로 아운은 기독교 지역의 1/3을 차지하는 것으로 끝났다. LF는 흐라위에 대한 충성을 선언했다. 8월 21일 의회는 타이프 협정에서 윤곽을 잡은 헌법을 철저히 조사하기로 결정했다. 한 달 후에 흐라위의 아운 지역에 대한 육로봉쇄 결정은 LF의 지지를 받았다. 이라크의 쿠웨이트 침공과 점령으로 야기된 위기 가운데 시리아는 반이라크 미국 주도의 연합군에 가담했다. 10월 13일 영공과 지상 군사작전에서 레바논과 시리아 군대는 아운의 군대를 패배시키고 전쟁을 종결했다.

인적 손실- 15년 6개월간의 전쟁동안에 제2차 이스라엘 침공으로 죽은 17~19,000명의 사망자를 포함하여 사망자 수는 주로 민간인으로 약 15,000명에 달했다.

경제적 손실- 제2차 이스라엘 침공전 제1차 7년 전쟁동안 전쟁으로 인한 직접적 연손실은 9억불에 달했다.

전쟁 후- 1991년 5월 9일 의회는 1943년에 정해진 국가협정의 기독교 6, 무슬림 5의 비율을 변경함으로써 의회에서 무슬림과 기독교인의 동등 수를 부여하는 법안을 통과시켰다. 아울러 의회 규모를 99명에서 108명으로 수를 늘렸다. 5월 22일 흐라위 대통령과 아사드 대통령은 경제와 국방, 외교문제에 있어서 그들의 정책을 조율하기 위하여 양국이 필요로 하는 레바논-시리아 간의 형제애, 협조, 평등관계 조약을 체결했다.


*레바논 민족 운동 Lebanese National Movement :

레바논-팔레스타인 정치동맹.
1975년 4월~1990년 10월까지 계속된 레바논 내전 발발 직전에 형성된 레바논 민족운동 (LNM)은 여러 민족주의와 진보적인 무슬림 정당들의 동맹으로 이에 속한 것으로는 아랍 바아스 사회주의당, 시리아 사회 애국당, 공산당, 공산주의 행동 조직, 대중 나세르 조직과 독립 나세르 주의자 그룹이 있다. 카말 줌블라트에 의해 이끌어진 레바논 민족운동은 신조주의 제도의 폐지, 여러 행정부처의 특권에 대한 재 규정을 하기 위한 헌법개정과 군의 재 조직화를 주장하였다.
레바논 민족 운동 LNM은 마론파 레바논 전선과 레바논군과 상대하는 전투에서 PLO와 연합하였다. LNM와 PLO의 연합군이 전투에서 우세를 잡게 되었을 때 시리아가 1976년 6월 기독교인들의 편으로 가담하였다. 시리아 군대는 LNM-PLO연합군이 점령하였던 기독교 지역으로부터 LNM-PLO군을 몰아내었다. 이것은 결과적으로 시리아가 동, 남부 레바논 지역의 점령을 합법화시키려는 계획을 수행토록 하였으며 줌블라트로 하여금 시리아 대통령인 하피즈 아사드와 적으로 변화하게끔 하였다.
1977년 3월 카말 줌블라트의 암살은 LNM에서 카리스마적인 인물이 사라지게 만들었다. 그의 아들인 왈리드가 계승하였으나 아버지에 비해 지도자적인 자질과 경험이 부족하였다. 왈리드는 시리아와 평화를 체결하였는데 그는 이로써 자신의 정책과 행동에 관해서 다마스커스로부터 조정을 받는 입장이 되었다. 레바논 전선이 정치적 혁신의 문제를 다루기 전에 시리아와 팔레스타인 군의 존재 문제를 해결하자고 주장했던 반면, LNM은 시리아와 팔레스타인 동맹국들의 지지를 받을 수 있는 동안에 즉각적인 정치적 혁신의 문제를 해결하기 원했다.
1982년 8월 베이루트에 대한 이스라엘의 포위는 PLO와 LNM의 전사들이 서베이루트로부터 철수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이것은 LNM을 더욱 약화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1년 후인 1983년 7월 LNM의 구성파벌들은 2달 전에 시작된 레바논-이스라엘 평화조약의 초안을 반대하는 다른 모든 파벌들과 협의하기 위하여 트리폴리에서 다시 모였다. 조약을 파기시키는데 성공하고 난 후 LNM은 응집력 있는 구성체로서의 예전의 기능을 상실하고 각 파벌들은 각자의 길을 걷게 된다. LNM의 이전 구성 파벌들은 파벌들 각각의 전사들로서 내전에 참여하였다. 그들은 미셀 아운 장군을 타도하기 위해 1989년 8월 레바논 민족 전선으로 잠시 동안 다시 함께 하기도 하였다.

* 레바논의 민족화해헌장 1989 National Reconciliation Charter (Lebanon)

민족화해헌장은 1989년 10월 사우디 타이프에서 열린 회의에서 레바논전쟁의 근저에 있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레바논 의회에 의해 채택된 문헌이다. 아랍연맹의 트로이카(알제리, 모로코, 사우디아라비아)가 작성한 초안은 9명의 국회의원을 제외한 62명의 국회의원에 의해 논의되었고 최종견해는 타결되었다. 국가 인구에서 무슬림이 다수(60~75% 추산)를 차지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무슬림 의원들은 기독교인들과 무슬림들이 99석에서 128석으로 늘어난 의석수를 동등한 수로 갖는 것에 동의했다. 그들은 또한 장기간에 걸쳐 행정기구에만 신조주의를 폐지할 것에 동의하였고, 권력이 줄어들지라도 기독교인들이 대통령직을 유지할 것을 허용하였다.
국가 단일 정부가 헌법 개정에 동의한 지 적어도 2년이 지나서 시리아의 지속적인 주둔이 수용됨으로 인해 기독교 의원들은 시리아에 적법성(1976년 아랍 연맹의 의무가 1982년 중반 기간 만료됨과 함께 잃게 된 것)을 부여하였고, 레바논에서 시리아의 전략적 관심사를 인정하였다.

*레바논-시리아 형제애와 협력과 조정에 대한 협정 (1991) :

6개항의 레바논-시리아 형제애와 협력과 조정에 대한 협정은 1991년 5월 다마스커스에서 양국 대통령에 의해 서명되었다. 제1항은 ‘양국의 주권과 독립이라는 큰 틀 안에 정치, 안보, 문화, 과학과 다른 모든 관심분야에서 양국간에 협력과 조정에 있어 최고위의 단계를 실현’하기 위한 분과를 설치하도록 요구한다. 제2항은 경제, 농업, 산업, 상업, 운송, 통신, 관세와 개발 분야에서 양국간 협력과 조정을 성취하도록 양국에게 요구하고 있다. 제3항에서는 ‘양국가의 안보의 상호관계는 어떠한 상황에서든지 레바논이 시리아의 안보를 위협하는 원천이 되지 말아야하며 또한 시리아가 레바논의 안보에 위협이 되어서는 아니 된다’라고 천명하고 있다. 또한 ‘레바논은 자국의 안보나 시리아의 안보를 침해하려는 목적을 가진 어떠한 세력이나 국가나 조직에 대해서도 기지나 통과지가 되는 것을 결코 허락하지 않을 것’ 임을 천명하고 있으며 마찬가지로 시리아는 ‘레바논의 안보나 독립이나 주권에 위협을 가하는 어떠한 행위도 허락하지 않을 것’임을 천명하고 있다.
제4항은 레바논 내에 시리아군의 주둔 존속 기간과 규모를 결정하기 위한 레바논-시리아 군사 위원회의 설치에 관하여 상술하고 있다. 제5항은 협정 당사자들의 외교 정책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으며 양 국가는 그들의 아랍과 국제정책에 있어서 상호 조정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 마지막 항은 협약을 이행하기 위한 다양한 단계의 공동 위원회의 구성을 명기하고 있는데 이 위원회는 양국의 대통령, 수상, 부수상, 국회의장으로 구성된 최고위 위원회가 있고 국방, 안보, 외교, 경제, 사회에 대한 위원회들이 각각 구성되어 있다.


*레바논의 이스라엘 침공 (1978) :

레바논에 근거를 둔 11명의 팔레스타인인들이 1978년 3월 11일에 보트를 타고 비밀리에 하이파에서 가까운 북이스라엘에 도착하였다. 그들은 해변가와 하이파-텔아비브 도로의 공격을 통하여 35명의 이스라엘 사람들을 죽였다. 그들 가운데 9명은 이스라엘군에 의하여 압도되어 죽었다. 중부 이스라엘의 고속도로에서 팔레스타인의 행동의 격렬함이 있었기에, 정부는 그 지역으로부터 기간 시설과 약 5,000여 명의 팔레스타인 게릴라들을 제거함으로써 남부 레바논 문제를 해결하기로 결정하였다. 3월 14일, 이스라엘은 62마일/100km 경계를 따라 6마일/10km 폭넓은 완충지대를 만들 목적으로 레바논을 침공하였다. 이스라엘은 20~25,000병력과 중고 미제 F-1 전투기들과 집속탄을 급송하였다. 도주하는 팔레스타인인들을 발견하자마자, 이스라엘은 남부 레바논의 반을 점령하였는데 이는 레바논 영토의 약 10%에 해당하였다. 당시에 이스라엘은 82개의 마을을 파괴하였고, 1,000명의 사람들을 죽였으며 그리고 160,000 여명의 난민이 생겼으며, 3월 21일에 국제연합안전보장이사회 결의안 425(정전이라고 일컫는)를 수락하였다. 4월 11일에 시작된 이스라엘의 철수는 완료되기까지는 2개월이 소요되었고 레바논 국경지역(2~6마일/4~12km 폭에 50마일/80km 길이)을 이스라엘 기금으로 적립된 기독교 민병대의 사법권 아래에 두는 것으로 끝났다. 기독교 민병대는 전 레바논군 소령인 사디 핫다드에 의하여 명령을 받는 것으로 되어 있었다. 이스라엘이 물러난 나머지 지역에서, 레바논의 유엔긴급군(UNIFIL)은 출발한 군대로부터 인계 받았다.


*레바논의 이스라엘 침공 (1982) :

이스라엘의 레바논에 대한 두 번째 침공은 1982년 6월 6일에서 1982년 9월 3일까지 지속되었고 다음 과정을 겪었다.
<1 단계> 1982년 6월 6일 아침, 이스라엘은 레바논으로부터 모든 외세들의 철수를 보장하고, 그리고 그것과 평화 조약을 맺게 될 정권을 베이루트에 설치할 두 가지 목적을 가지고 갈릴리에서 평화활동을 시작하였다. 약 40,000 여명의 이스라엘 국방군(IDF)들은 동쪽, 중앙 그리고 서쪽 지역으로 나뉘어져 육로 국경을 가로질러 레바논으로 중무장한 공군력 엄호아래 행진하였다. 6월 6일의 국제연합안전보장이사회 결의안 509조, 즉 이스라엘이 레바논의 국경에서 즉각 철수할 것을 호소를 무시하면서, IDF는 타이레(Tyre)로 가는 연안 고속 도로를 따라 전진하였고 그리고 다음 날 그곳을 점령했다. 시돈(Sidon) 가까이 보다 더 많은 수륙 양용 착륙의 후원을 받게되자, IDF는 6월 8일에 그 도시를 점령하였다. 그 날밤 다모르 가까이 이스라엘의 수륙 양용 착륙은 다음 날 그 도시의 붕괴의 근거를 마련했다. 중심 지역에서 IDF 종대는 리타니강 다리들을 점령하였고 나바티예를 에워쌌다. 그런 다음에 시돈을 포위하기 위하여 다른 종대들과 연결하기 위하여 시돈의 북서쪽으로 밀고 나갔다. 6월 8일 땅거미가 질 무렵, IDF가 남쪽 베까 계곡에 있는 시리아군을 포위하였다. 반면에 그것의 서쪽 종대는 북쪽의 맨 앞에서 엣진에 시리아의 전진위치들을 포위하기 위하여 시돈으로부터 쇼푸 산악지대로 동쪽으로 밀어붙였다. IDF의 동쪽 종대는 전략적인 베이루트-다마스커스 고속 도로로 전진하기 위하여 남쪽 베까에 발판 마련에 집중하였다.

<2 단계> 6월 9일 오후에, 이스라엘 전자 대항 장치가 시리아의 레이더를 파괴한 후에, IDF는 19 시리아의 반 비행기 전지들 19개 중에서 17개를 파괴했다. 70명의 시리아인 그리고 100 IDF 초음파 제트 비행기들을 포함하는 연이은 공중전은 29대의 시리아 비행기 손실이라는 결과가 생겼다. 이러한 손실에도 불구하고, 시리아 대통령인 하피즈 아사드는 이스라엘의 진격을 지연시키기 위하여 대규모의 공군력을 배치하였다. 다마스커스는 35대 이상의 군용기들을 잃었지만 귀중한 시간을 벌었다. 6월 10일에, 한 시리아 장갑사단이 이스라엘이 수 킬로미트 물러설 것을 강요하면서 레바논-시리아 국경선 근처의 라샤야에 있는 한 IDF 여단과 교전을 하였다. 서쪽의 IDF 종대는 칼데의 교외에 이르렀는데 그곳은 베이루트의 국제공항으로부터 3마일/5km 떨어져 있었다. 아사드는 모스크바로 급히 갔다. 그리고 소비에트 연방 지도자인 레오니드 브레즈네프와 미국 대통령인 레오날드 레이건 사이의 직통 전화의 활성화를 이끌어냈다. 워싱턴은 특별 외교사절인 필립 하비브에게 그의 평화조성 노력을 강화하도록 압박하였다.

<3 단계> 6월 11일에 이스라엘과 시리아 사이의 정전이 발효되었고, 동쪽 그리고 중심지역에서 전투가 끝났다. 다음 날, 하비브가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해방기구(PLO) 간의 휴전을 막후 조정하였다.

<4 단계> PLO와의 휴전을 무시하면서, 6월 13일 IDF는 레바논 대통령인 일리야스 사르키스를 베이루트 동쪽 교외의 밥다에 있는 그의 궁에서 추방했다. 6월 13일부터 7월 12일까지 침공을 지휘하던 이스라엘 국방장관인 아리엘 샤론은 포병 일제사격과 공습을 감행함으로써 먼저 팔레스타인의 무조건적 항복을 받으려고 하였다. 이것으로 인하여, 음식과 연료뿐만 아니라 전기 공급과 물 공급이 심각했다. 시리아와의 휴전을 깨면서, IDF는 밥다의 베이루트-다마스커스 고속 도로 동쪽을 따라 6월 22일, 공격하였으며 소파까지 15km의 도로로부터 그들을 물러나게 하였다. 당시에 다음 휴전이 6월 26일 발효되자, 이스라엘은 베이루트-다마스커스 도로를 따라 소파의 동쪽, 다흐르 알 바이다르 통로를 장악했다.

<5 단계> PLO와 IDF사이의 휴전은 7월 12일부터 7월 21일까지 계속되었고, 그때 팔레스타인은 휴전선 뒤에서 IDF를 공격하였다. 7월 22일부터 7월 29일까지 IDF는 서베이루트에 대하여 보다 강력한 폭격을 감행하였고 이것을 베까 계곡의 시리아 모든 전선에 대한 폭격과 연계시켰다. 7월 31일까지 지속된 잠깐의 휴전 후에, 8월 1일부터 8월 12일까지 IDF는 11시간 반 동안 융단 폭격을 요청하면서 인 폭탄과 충격폭탄을 사용하여 육∙해∙공으로부터 좀 더 강력한 폭격으로 서베이루트를 복종시켰다. 물 공급이 단절되어 도시는 타 들어갔다. 샤론의 행동은 이스라엘 수상인 메나헴 베긴으로 하여금 중재의 압력을 가했던 워싱턴을 화나게 만들었다. 결과적으로 서베이루트의 63일 점령은 끝나고 평화는 8월 13일에 돌아왔다.

<6 단계> 8월 19일에 이스라엘은 하비브의 막후 조종을 받았던 PLO와 시리아의 철수계획을 받아들였다. 이틀 뒤에 미국, 영국, 프랑스, 그리고 이탈리아 등에서 평화유지를 위해 모여든 1,000여명의 다국적군이 PLO와 시리아 군대의 안전한 철수를 보장하기 위하여 배치되었다. PLO의 8,144명 게릴라, 시리아 휘하의 3,500명의 팔레스타인 해방군(PLA) 그리고 2,700명의 시리아 군인들이 1982년 9월 1일에 서베이루트를 떠났다. IDF는 76,000명의 병력을 배치하였고, PLO 전사와 그들의 레바논 동맹국은 18,000명 그리고 시리아 군대는 5,000명에 달했다.

<인적 손실> 레바논인과 팔레스타인인은 17,000~19,000명이 죽었는데 110명의 팔레스타인 전사와 1,350명의 시리아군 그리고 이스라엘군 350명이 죽었다.

<무기 손실> 시리아는 항공기 92대, 42대의 탱크, PLO는 20대의 탱크, 이스라엘은 2대의 항공기, 2대의 탱크.


*레바논-이스라엘 평화협정 (1983) :

1982년 9월, 아민 제마엘 대통령은 대통령에 취임한 후 곧 바로 미국의 압력 하에 미국을 중재자로 하여 이스라엘과의 평화회담에 들어갔다. 이 회담으로 1983년 5월초에 레바논과 이스라엘 간의 평화 협정 초안이 나오게 되었다. 이 협정은 공식적으로 두 나라 간의 전쟁 상태를 끝내는 것을 뜻하며 또한 이 협정은 레바논으로 하여금 이스라엘과 외교 관계를 가지지 않은 어떤 국가에게도 군대나 군사장비의 통과를 위한 레바논 영토나 영공의 사용을 허락하지 않도록 하는 것이었다. 이 협정은 또한 레바논-이스라엘 협정에 반하는 어떠한 규정이나 법이나 조약들을 폐기하도록 요구하고 있는데, 이러한 요구에는 1945년이래 아랍연맹의 설립 회원국이 되었던 레바논의 연맹 회원국으로서의 모든 의무도 폐기하도록 하였다. 이 협정은 레바논 정부가 미치는 힘을 자흐라니 강과 아왈리 강 사이의 주둔군으로 감소시키는 것이었고 자흐라니 강 상류지역의 통제에 대한 권한의 부여를 이스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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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목
<ㄱ> 가쉬미 - 국제연합안전보장이사회 결의안 598
<ㄴ> 나본 - 노루즈
<ㄷ> 다국적군 (레바논내) - 딤미
<ㄹ> 라디노어 - 레바논-이스라엘 평화협정 (1983)
<ㅁ> 마나마 - 무사디끄
<ㅂ> 바그다드 - 베이루트
<ㅅ> 사나 - 샤레트
<ㅇ> 아구다트 이스라엘 - 아랍-이스라엘 전쟁
<ㅈ> 자이드파 - 중동평화회담 (마드리드 1991)
<ㅊ> 천연가스 - 총인민회의(예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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