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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ㅁ> 마나마 - 무사디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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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나마 Manama :

바레인의 수도.
인구는 15만여 명(2010년 기준). 마나마는 바레인섬에 위치하고 있으며, 그 역사는 1345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마나마는 1521년 포르투갈에 의해 점령당했고 1602년 이란에 의해 정복되었다. 이란은 1783년 지방의 알 칼리파 가문에 의해 타도되었다. 1861년과 1892년 사이에 영국과 알 칼리파 가문 간의 조약서명에 따라 바레인은 영국의 보호령이 되었으며, 마나마는 이란의 부쉐르의 지역정치 사무관 관할 바레인 주재 영국 정치 대리인의 소재지가 되었다. 1946년 영국 정치 사무관은 마나마에 주재 사무실을 설치하였고 이것은 마나마가 독립 바레인의 수도가 될 때까지인 1971년까지 계속되었다.
1932년 석유가 발견되기 전까지 지역경제는 어업과 진주산업, 무역에 집중되었다. 2차 세계대전 후 마나마는 상업과 금융의 중심지로 급속히 발전하였다. 마나마는 1958년 자유무역항이 되었고 4년 후 수심이 깊은 접안 시설을 항구에 설치하였다. 마나마의 현대적 항구와 선박수리 시설은 마나마를 걸프의 선도적 항구들 중의 하나로 만들었으며 바레인 전체 인구의 2/5가 거주하는 도시가 되었다. 마나마는 또한 비거주자 외환거래 우대조치의 중심지로 세계적인 명성을 획득하였다.


*마론파 카톨릭 교회 Maronite Catholic Church :

기독교 종파.
독자적 동방 카톨릭 교회(동방정교)의 하나로 로마 카톨릭 교회에 속해 있으나 동방의 교회의식과 관례의 실행을 따르는 교회를 일컬으며, 이 종파를 신봉하는 신도들을 마론파 교도라고 부른다. 마론파 교도들은 4세기 말에서 5세기 초에 시리아 북동 지역에 거주했던 기독교 수행자 마론/마로 성인의 추종자들이다. 이들은 7세기 말 안티옥의 총 대주교인 성 요한 마론의 지도하에 레바논 산악지역으로 이주했다. 평야지대에서 박해받던 기독교인들이 평야지대를 떠나 수세기 동안 이 산악지대에 은신했으며 마론파 교도들은 이 곳에서 꾸준히 성장하여 십자군 전쟁(1095~1272) 때에는 십자군 편에 가담하기도 하였다.
1182년 그들의 교회는 바티칸으로부터 반(半) 자치적 관계를 획득했을 뿐만 아니라 바티칸으로부터 이들에게 그들의 서(西)시리아 전례(典禮) 유지와 레바논에 그들 자신의 대주교의 존재를 허락 받았다. 교황 그레고리(Gregory) 13세는 1585년 로마에 마론파 대학을 설립하였다. 1648년 프랑스는 오스만제국(1517∼1918) 내에 있는 카톨릭 교도들의 수호자임을 스스로 선언하였다. 이것은 프랑스와 마론파들과 특별한 관계의 시작이었으며 제1차 세계 대전 후 시리아-레바논이 프랑스 위임 통치하에 놓이게 되었을 때 그 관계는 더욱 긴밀하게 되었다. 마론파와 다른 기독교도들의 지도자들은 기독교인이 우세한 대레바논을 건설하기 위해 프랑스와 활발히 협력하였고 그 결과 후일 레바논 공화국이 설립되었다.
무슬림 통치자들의 직접 통치에 저항하며 산악지대에서 몇 년간 고립생활을 했던 마론파들은 종교와 정치가 뒤엉켜 혼합된 공동사회로 들어가게 되었다. 마론파의 정신적 지도자는 조우니에(Jounieh)항구 근처 브키르키(Bkirki)에 거주하는 안티옥과 모든 동방의 대주교이다. 오늘날 마론파는 레바논에 가장 큰 기독교 공동체이며, 레바논 헌법에서는 공화국의 대통령은 마론파로부터 나오도록 규정하고 있다.


* 마르자에 타끌리드 marja-e taqlid

이맘은 존재하지 않지만, 평신도들은 이맘의 가르침을 가장 잘 이해할 수 있는 뛰어난 학자의 가르침을 따라야 한다는 이론이다. 이론의 발생 초기에는 종교적 생활에 국한되었으나, 19~20세기를 지나면서 성직자 스스로가 국가와 사회를 통치해야한다는 빌라야티 파끼흐(Vilayat-e-Faqih)란 이론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이 이론은 하메네이에서 호메이니로 이어지는, 성직자가 통치하는 이란 이슬람 공화국의 등장을 초래하게 되었다.
무즈타히드 참조


*마쉬하드 Mashhad :

이란의 도시.
인구 240여 만명(2006년 기준). 칼리프 하룬 라쉬드(786~809년 통치)와 12이맘파의 8번째 이맘이었던 이맘 알리 알리다/레자(818사망)가 묻힌 누칸(Nukan) 거주지는 마쉬하드 또는 마스하데 리다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1220년 몽골 침략으로 도시가 상당히 파괴되었다. 사파비 왕조의 건국자인 샤 이스마일(Sha Ismail, 1501~24년 통치)이 쉬아를 국교로 채택하자 마쉬하드의 중요성이 매우 커졌다.
마쉬하드는 우즈벡 침략자들에 의해 정복되었으나 샤 압바스 Ⅰ세(1587~1629년 통치)에 의해 수복되었다. 그는 이 도시를 쉬아들의 순례를 위한 매혹적이고 으뜸가는 도시로 만들었다. 나디르 샤 아프샤르(Nadir Shah Afshar, 1736~1747년 통치)는 마쉬하드를 이란의 수도로 만들었고 자신의 무덤을 포함한 몇 몇 무덤들을 건설하였다. 그가 암살된 후, 내전이 발발하자 마쉬하드는 이란과 아프가니스탄 사이의 완충지역인 쿠라산 주의 수도가 되었다. 마쉬하드는 결국 까자르 왕조(Qajar Dynasty)의 파트 알리 샤(Fath Ali Shah)에 의해 19세기 초 이란의 통치권 하에 놓이게 되었다. 1833년 왕세자인 미르자(Mirza)에 의해 시작된 궁궐의 건축은 1876년에 완성되었다.
이란 동부의 중심도시인 마쉬하드는 이란의 부유한 농업지역이다. 이 도시는 또한 양털 산업과 카펫 직조의 중심지이기도 하다. 1973∼1974년 유가가 4배로 뛰어 이란의 소득이 크게 증가되자 마쉬하드도 커다란 혜택을 누리게 되었다. 즉, 1974년 이 도시는 320만 명의 순례객을 맞아들였는데 이것은 이맘 알리 리다/레자의 사당을 방문했던 이전 10년 간의 순례 객 수와 비교해 볼 때 15배 증가된 수치이다.


*마아라취 Maarach :

이스라엘의 정치적 연대.
마아라취는 1965년 마파이(Mapai)와 아흐두트 하아보다흐-포알레 시온(Ahdut HaAvodah-Poale Zion) 간의 연대를 가리키는 용어로서 이미 널리 알려진 용어이다. 이후에는 이 말이 1969∼1984년까지 노동당과 마파이 간의 연대를 지칭한 말로 사용되었다.


*마즐리스 Majlis (아랍어/페르시아어-국회) :

이란의 국회.
마즐리스는 1906∼1907년 이란의 헌법 혁명 시작이래, 이란 의회에 대해 사용된 대중적 용어이다. 마즐리스는 중동에서 투표에 의해 구성된 가장 오래된 헌법기구이다(이란 참조).


*마키 Maki (히브리어-Miflaga Kommunistit Israelit의 약성어, 이스라엘 공산당) :

이스라엘의 정당.
마키는 1948년 10월, 팔레스타인 공산당(CPP)과 민족 해방 연맹(LNL)의 잔류 세력과의 합병으로 출범하였다. 마키는 이스라엘 내의 유대인들과 이산 유대인들 사이의 연결이라는 시오니스트 주의를 받아들이지 않으면서도 이스라엘 국가를 인정하였다. 마키는 아랍 피난민들이 그들의 고향으로 돌아올 권리를 지지하였으며 1947년 11월 유엔의 팔레스타인 분할안에 의거 아랍인들에게 할당된 땅에 팔레스타인 국가 설립을 지지하였다.
첫 이스라엘 국회(1949~1951)에서 마키는 4석을 획득하였다. 1951년에 마키는 8천 명의 당원을 확보하였다. 1953년, 마팜(Mapam)이 분리됨에 따라, 반사 이익을 얻은 마키는 1955년 총선에서 6석을 차지하였다. 마키는 아랍 거주지역에 대한 군 행정에 반대하며 당시 인구의 4%이었던 아랍 시민들에 대한 차별대우에 항의하였다. 마키는 1956년, 수에즈 전쟁에서 이스라엘의 공격을 반대한 유일한 정당이었다.
1960년대 초에 소련이 친아랍정책을 추구하기 시작했을 때, 마키 내에서 분열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친아랍파는 아랍 공산당들과 연합할 것을 제안한 반면, 친유대파는 대중적 전선을 형성하기 위해 시오니스트 노동자 그룹과의 연합을 주창하였다. 모스크바가 팔레스타인 해방기구(PLO)에 대해 지지를 표명하고 소련 내에 거주하는 유대인들에 대한 이스라엘로의 이주 허락을 계속 거부하자 마키의 내분은 더욱 심화되었다. 1965년 중반 메이르 빌너(Meir Vilner)와 타우피크 투비(Tawfiq Toubi)가 이끄는 친아랍진영은 마키를 떠나 라카(Rakah)를 형성하였다. 1965년, 총선에서 모세 스네(Moshe Sneh)와 사무엘 미쿠니스 (Samuel Mikunis)가 이끄는 마키는 1석 밖에 얻지 못했다.
마키는 1967년 6월, 아랍-이스라엘 전쟁을 지지하였고 점령 아랍 영토로부터 이스라엘의 무조건적인 철수를 반대하였다. 마키는 1969년 선거에서 한 석의 의석을 유지하였으나 4년 후 총선에서는 한 석도 얻지 못했고 결국 1975년 해체되었다.


*마파이 Mapai (히브리어-Mifleget Poalei Israel의 약성어, 이스라엘 노동당) :

이스라엘의 정당.
마파이는 아흐두트 하아보다-포알레 시온(Ahdut HaAvodah-Poale Zion)과 하포알레 하트자이르(HaPoale HaTzair)의 합병으로 1930년에 창당되었다. 마파이의 당원 5,650명 가운데 3/5은 농민이었다. 1933년, 마파이의 지도자인 샤임 아를로소로프(Chaim Arlosoroff)가 암살되고 난 후, 당의 지도권은 데이빗 벤 구리온(David Ben Gurion)에게 넘어갔다. 마파이는 이슈브(Yishuv)의 대부분의 제도들인 키브츠, 노동조합, 전사, 학교, 의회 등을 지배하였다. 이슈브 의회의 국가위원회 위원 23석 중 11석을 마파이가 확보하였다.
마파이의 지도자들이 국가문제에 대해 그들의 초점을 맞추기 시작하면서 자신들의 사회주의자로서의 의무를 등한시하게 되었다. 좌익파들의 강력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약 2만 명의 회원을 대표한 1941년 마파이 회의에서는 팔레스타인에 유대인 국가건설에 초점을 맞추는 계획을 채택하였다. 1944년 2월, 이 문제로 인해 당은 분열되었고, 결국 좌파들은 당을 떠났다. 2차 세계대전 후, 마파이는 반영국운동을 이끌었는데 이러한 운동에 하가나와 이르군, 레히가 동참하였다. 마파이는 팔레스타인을 유대국가와 아랍국가로 분할하는 것을 선호하였고 1948∼1949년 아랍-이스라엘 전쟁에 적극 참전하였다.
1949년, 총선에서 마파이는 120석 가운데 46석을 획득함으로써 제1당으로 부상하였다. 1951년 선거에서도 마파이는 1949년 선거결과를 반복하였다. 마파이는 이후 구성된 연정에서 가장 지배적인 당이 되었다. 이스라엘의 미래를 구체화한 1948년과 1952년 사이에 채택된 중요한 결정들은 마파이 지도자들의 견해를 반영한 것이었다. 그들은 신권정치가 아닌 세속주의를 선택했으며 사회주의가 아닌 사회 민주적인 관료정치에 의해 운영되는 자본주의 경제를 선택하였고 친서구 외교정책을 추구하였다. 1955년 선거에서 40석으로 의석이 약간 줄었다가 1959년 선거에서 47석으로 다시 늘어났다. 하지만 1961년 선거에서는 42석으로 다시 의석수가 줄어들었다.
이스라엘 건국이래, 25년 동안 이스라엘 인구가 급속히 증가하였고 사회는 상당히 변화하였다. 모든 사회•경제 그룹에 문호를 개방하기로 한 마파이의 결정으로 당의 선도적인 사회주의 이상들은 많이 희석되었다. 마파이의 규모가 급속히 팽창하여 1964년에는 당원이 20여 만 명에 이르렀고 거대한 정당 관료제도를 만들었다.
1954년 발생한 핀차스 라본(Pinchas Lavon)의 안전보호에 대한 재난과 관련하여 벤 구리온과 핀차스 라본 간에 10여 년간 끌어왔던 라이벌 관계는 당에 상당한 피해를 입혀 1930년대 80%의 지지를 얻어 승리했던 것에 비해 1960년 히스타드루트당으로 임한 선거에서는 지지율이 55%까지 감소했다. 히스타드루트당과 정부에서 라본의 모든 직위를 제거한 벤 구리온은 이에 만족치 않았다. 그는 1963년 정부를 떠나 수상 레비 에쉬콜(Levi Eshkol)에 반대하는 운동을 시작하였다. 이러한 도전에 맞서기 위해 당의 지도자들은 아흐두트 하아보다-포알레 시온과의 연합을 추진하였다. 1964년 마파이 회의는 이 계획을 승인하였고 1965년 총선 전에 마파이는 아흐두트 하아보다-포알레 시온과의 연대에 서명하였다. 그 결과 45석을 획득한 정치적 블록이 되었다. 1968년 라피(Rafi)를 포함하는 연대로 확장하여 결국 3당 연합으로 이스라엘 노동당으로 출범하였다.


*마팜 Mapam (히브리어-Mifleget Poalei Meuhedet의 약성어, 연합노동당) :

이스라엘 정당.
1947년 11월, 유엔의 팔레스타인 분할안으로 팔레스타인에 아랍-유대인에 기초한 국가라는 개념이 깨지게 되자, 주요한 양대 좌파 조직인 아흐두트 하아보다-포알레 시온과 하쇼메르 하트자이르(HaShomer HaTzair, 젊은 수비대) 사이의 장벽이 제거되었고 두 그룹의 연대를 위한 길이 마련되었다. 1948년 1월, 두 세력은 연대하였고 그 결과 모세 스네(Moshe Sneh)가 이끄는 마팜이 등장했다. 마팜은 이스라엘 국회 내외에서 주도적인 좌익세력이 되었다. 1949∼1951년의 제1차 국회에서 19명의 의원으로 형성된 마팜은 마파이가 이끄는 정부가 미국으로부터 대규모의 재정적 원조를 받아들이려고 하자 정부를 강력히 공격하였다. 마팜은 새로운 이민자들을 집단 농장과 산업단위로 조직화하는 것을 주장하였고 천연자원과 대규모의 자본주의 기업들을 국유화시킬 것을 주장하였다. 1951년 제2차 국회의원 선거에서 마팜은 15석을 획득하였다. 그러나 2차 국회에서 마팜은 2명의 의원을 마파이에게 빼앗겼고 스네를 포함한 2명의 의원을 마키에 빼앗겼으며 4명의 의원을 아흐두트 하아보다-포알레 시온에 넘겨주었다. 제3차 국회(1955~1959)에서 9명으로 줄어든 의원은 덜 좌익적이고 덜 친소련적이었다. 결국 마팜은 마파이가 이끄는 연정의 한 파트너가 되고 말았다.
수에즈 전쟁 후 마팜은 이스라엘의 시나이 반도로부터 철수에 반대하는 데모를 개최하였다. 1959, 1961, 1965년 선거에서 마팜은 8석 내지 9석을 획득하였으며 마파이와 연합하여 연정을 구성하였다. 마팜이 1967년 6월 아랍-이스라엘 전쟁을 지지하고 나서자 마팜의 좌익 세력은 마팜을 떠나게 되었다.
1969년 1월, 마팜은 노동당-마팜의 연대를 형성하기 위해 새로 창당된 노동당과 연합하였다. 그리고 노동당-마팜의 연대는 1969년 총선에서 56석을 획득했다가 1977년에는 32석으로 떨어지고 1981년에는 47석을 획득하는 등 불규칙적인 지지를 받았다. 연대는 1984년 9월까지 유지되었으나 노동당이 리쿠드와 국가 통일 정부를 구성하기로 결정하자 이에 항의하여 마팜은 노동당과의 연대를 끝내고 마팜은 소속의원 6명을 이끌고 야당으로 돌아갔다. 1988년 선거에서 마팜은 3석을 획득하는데 그쳤으며 1992년 총선에서 메레츠(Meretz) 연합의 한 분파로 참여하여 4석을 확보하였다.

* 마프달 Mafdal

히브리어로 국가 종교 정당이라는 뜻이다.
이스라엘의 국가 종교 정당 (National Religious Party (Israel)) 참조


*마하바드 쿠르드 공화국 (1945∼1946) :

쿠르드 공화국 참조 (1945∼1946).


*마흐디 Mahdi (아랍어-지도자, 안내자) :

마흐디란 ‘올바르게 안내하는 자를 뜻하며 정의롭지 못한 모든 것을 청산할 것이며 하나님의 법이 요구하는 신앙을 회복시켜 줄 구세주’임을 뜻한다. 마흐디란 개념은 유대교, 기독교 그리고 이슬람교의 쉬아 12이맘파에 잘 정의되고 있다. 12이맘파는 11번째 이맘인 하산 알 아스카리(Hassan al Askari)의 어린 아들이며 12번째 이맘이 될 이맘 무함마드 알 카심 (Muhammad al Qasim)이 그들의 마흐디라고 믿고 있다. 이 마흐디는 A.D. 874년에 성령에 의해 자취를 감추었으나 심판의 날 이전에 지구상의 정의와 법을 구현하기 위해 다시 나타나게 되실 분이라고 12이맘파는 믿고 있다. 한편 순니파 내에서 마흐디는 새로운 제도들로부터 순나(Sunna, 무함마드의 언행)를 방어하기 위해 매 이슬람 세기의 전환기에 출현하는 무자디드(Mujadid, 새롭게 하는 자)의 개념이 일반적이다.


*마흐무드, 다르위쉬 Mahmud, Darwish (1941∼) :

팔레스타인의 작가이자 시인. 아크레(Acre) 부근의 바르와(Barwa) 마을에서 지주계층이었던 순니파 무슬림 가정에서 태어났다. 1948∼1949년, 마흐무드와 그의 가족은 팔레스타인 전쟁을 피해 레바논으로 탈출했다. 그들은 후에 갈릴리(Galilee)에 있는 데이르 알 아사드(Deir al Assad)에 돌아와 정착했다. 그는 카프르 야시드(Kafr Yasid)에 있는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아크레에서 아랍어 인쇄공으로 일하였다. 이스라엘 공산당인 마키(Maki)의 출판물인 월간 문학지 「알 자디드(al-Jadiid, 새소식)」와 격주 간행물인 「이티하드(al-ItiHaad, 연합)」와 함께 아랍어로 시를 출판하기 시작했다. 그 후 이 잡지의 편집장으로 임명되어 언론 활동을 시작하였다.
다르위쉬는 『날개 없는 새들(1961)』, 『팔레스타인으로부터 온 애인(1964)』, 『그리고 올리브 잎(1964)』 등 세 권의 시집을 출판했고, 이를 통해 유능한 시인으로 인정받았다. 특히, 독창적인 깊이, 풍부한 심성과 격렬한 느낌이 살아있는 그의 서정적인 시구는 고향에서 추방되고 망명자 난민촌에서 삶을 강요당한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고통을 전달하고 있었다. 비록 1967년 6월 아랍-이스라엘 전쟁에서 아랍인은 굴욕적으로 패배하였지만, 그의 시에서 팔레스타인 국민은 자유를 쟁취하기 위해 투쟁하는 용맹과 자기희생 정신으로 충만한 저항적인 영웅의 모습으로 그려졌다.
1970년 모스크바의 대학에서 1년을 수학한 후, 그는 이스라엘로 귀환하지 않기로 결정했다. 그는 카이로에서 일간지의 선두 주자였던 알 아흐람(al-Ahraam)에 시와 글을 기고하면서 그곳에 머물렀다. 1972년, 팔레스타인 해방기구(PLO)가 베이루트로 이주하면서, 그는 PLO의 월간지인 「슈우운 팔라스티니야(Shu`un Falastiniyyah, 팔레스타인 문제)」의 편집장으로 근무하기 시작했으며, 1975년 PLO의 조사기관에 이사로 임명되었다. PLO의 레바논 내전으로 1976년 수천 명의 팔레스타인 난민이 팔랑헤 민병대에 의해서 학살된 사건 이후부터 그의 시상은 침체되었다.
그가 PLO 의장이었던 야세르 아라파트(Yasser Arafat)와 함께 지냈던 1982년, 레바논의 이스라엘 침공으로 인해 서베이루트가 장기간 포위되었을 때, 그의 시는 가장 암울한 분위기를 내포하고 있었다. PLO가 베이루트에서 추방된 후, 그는 싸이프러스로 건너가, 어두운 기억들을 되살려서 시를 썼다. 그 무렵 그의 목소리는 현재의 정치적인 힘의 세계에서 영웅의 임무수행을 위한 죽을 이유나 용기가 충분하지 못한 것을 자각하는 사실주의에 들떠 있었다. 그의 시에 등장한 주인공들은 계속되는 추방과 패배의 역사 속에서 투쟁하고 있었다. 그는 의기 양양한 목소리로 영웅적인 희생을 예찬했고, 산을 오를 때 사망하는 사람들처럼 영웅적인 최후를 맞이한 사람들을 예찬했다. 이처럼 성숙미가 그의 시구에 더해졌다.
싸이프러스에 머무는 동안 다르위쉬는 팔레스타인 작가와 기자단 의장으로 선출되었으며 그 잡지의 편집도 맡았었다. 1982년에는 소련이 후원하는 이븐 시나상(Ibn Sina Prize)을 수상했으며, 일년 후 레닌 평화상을 수상하였다. 1980년 인간 프라쉬크스의 음악(The Music of Human Flashfks)이란 이름으로 그의 대표작들이 영문으로 출판된 후, 그가 파리로 이주하기 전인 1980년대 말에 거주했던 영국과 미국에서 알려지기 시작했다. 그는 무소속으로 1987년 PLO 행정관에 당선되었으며, 4년 후 재선되었다. 1993년 9월 이스라엘-팔레스타인 협정(Israel-PLO Accord)에 반대하여 사임하였다.


*마흐푸즈, 나집 Mahfouz, Naguib (1911∼) :

이집트 작가. 1988년 노벨 문학상 수상자.
카이로의 상인 집안에서 출생한 마흐푸즈는 1934년 카이로 대학 철학과를 졸업하였다. 잠시동안 철학사를 가르치다가 1939년 공무원이 되어 33년간 봉직하였다. 1939∼1954년까지 종교성에서 근무한 후 문화성의 감독관으로 옮겼고 후에 국가 영화분과 위원장으로 재직했다.
그는 대학교에서 유럽 소설들을 접했고 불어로 발행된 작가들의 소설들을 닥치는 대로 열심히 읽었는데 이 작가들로는 드 발작, 카뮤, 도스토예프스키, 플로베르, 월터 스코트, 톨스토이와 에밀 졸라 등이 있다. 그의 첫 번째 소설인 『운명의 게임(1939)』은 월터 스코트의 영향을 받은 작품이다. 파라오 시대를 배경으로 한 이 소설은 압제 정권과 외국 통치의 타도를 그린 작품이다. 당시 군주제인 이집트는 영국의 보호 하에 있었던 시기였으므로 소설의 주제는 동시대적이었다.
보다 더 역사성을 띤 두 편의 소설을 집필한 후, 마흐푸즈는 소설 『새로운 카이로 (1946)』를 기점으로 사회적인 사실주의로 방향을 전환하였다. 이 작품은 3명의 대학생들인 사회주의자 학생, 독실한 무슬림 학생 그리고 기회주의적인 학생들의 주변에 집중한 작품이다. 다음 3권의 소설들인 『칸 알칼릴(Khan al-Khalil, 1945)』, 『미다끄 골목(Midaqq Alley, 1947)』과 『시작과 끝(The Beginning and the End, 1949)』은 카이로 서민계층의 주위를 배회한 작품들이다. 이 소설들은 이집트의 사회문제를 과감하게 제기하였고 당시 만연한 사회적 갈등을 살펴볼 수 있는 계기를 열어준 작품들이다. 그의 이러한 영감은 발자끄에게서 영향을 받은 것이었다. 마흐푸즈는 페르시아 만으로부터 대서양 지역까지 이해되고 있는 문어체 아랍어의 경계에 사실주의적 대화체를 창작활동에 사용하여 그 범위를 확장시켰다. 이것은 마흐푸즈와 다른 아랍 작가들에게 그들의 작품 속에 사회적 사실주의를 주입시키고 그들의 독자들에게 사실주의를 확대시키도록 한 독특하게 정형화된 장치였다.
마흐푸즈의 가장 성숙된 작품인 『삼부작(1956~57): 바인 알 카스라인(Bayn al-Qasrein), 카스르 알 샤우크(Qasr al-Shawq), 알 슈카리야(al-Shukariyya)』은 카이로의 거리 이름에서 제목을 따온 작품이다. 삼부작에서 마흐푸즈는 카이로 방언을 사용하는 한 가족의 30년 역사를 통해 제1차 대전과 2차 대전 한 가운데 놓였던 이집트에 대한 한 목격자의 이야기를 제공하고 있다. 이 작품은 마흐푸즈를 이집트에서 그리고 아랍세계에서 문학 스타로 만들어 주었다. 작품의 길이와 규모에 있어서 삼부작은 아랍 문학에서 경쟁자가 없는 채로 남아 있다. 7년 간 침묵을 지킨 후, 마흐푸즈는 이집트의 유력 일간지인 알아흐람 지에서 「게발라위의 어린이들(Children of Geballawi, 1964)」이란 작품을 연재하였다. 인간 창세기부터 현재까지 인간의 삶에 대한 인습 타파를 비유한 이 작품은 구원의 실마리를 위해 쓰레기 더미를 뒤지고 있는 인간의 모습을 묘사하고 있다. 이 작품은 이집트 당국이 민심을 동요시킨다는 이유로 책으로 출판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마흐푸즈는 문화성의 영화 방송 위원회장으로 근무하면서 자신의 몇몇 소설들을 영화 제작을 위해 각색하였다. 그는 1973년 전업작가가 되었고 소설과 단편소설들을 꾸준히 출판하였다. 마흐푸즈는 77세에 노벨 문학상을 수상했는데 이때에 그는 32편의 소설과 13권의 단편소설집, 그리고 30여 편의 시나리오를 가지고 있었다. 그는 가장 널리 외국어로 번역된 작품을 가진 이집트 작가였는데 노벨 문학상 수상 이후 그의 소설들은 즉각 다양한 외국어로 번역되었다.
1993년 『나일강에서의 표류』라는 작품이 출판되었고 뒤이어 1994년 몇 세기동안 뒷골목에서 살아가는 이집트 가족의 이야기인 『하라피쉬(Haraafish)』가 출판되었다. 마흐푸즈의 작품들은 당파적인 면은 가지고 있지 않았으나, 정치적 성격은 확연히 드러난다. 전통적인 관습을 소유한 사람들 가운데 가장 현대화되었던 사람인 마흐푸즈는 사회적 정의를 실행하는 가장 진보된 양심을 가진 작가였다. 또한 그는 확고한 독립적 사상을 소유한 사람이었으며 1994년에는 이슬람 원리주의자에 의해 공격을 받아 부상을 당하기도 하였다.


*말리키 법학파 Maliki Code :

순니파 이슬람 학파.
말리키 학파는 메디나에 거주한 한 법학자인 말리키 이븐 아나스(Malik ibn Anas, 714~796)에 의해 설립된 순니파 이슬람 법학파이다. 다른 학파들과 마찬가지로 말리키 학파는 꾸란과 순나(Sunna, 무함마드의 언행), 이쥐마(ijmaa', 합의)에 근거를 두고 있다. 그러나 순나(예언자 무함마드와 그의 교우들의 전통)에 있어 말리키 이븐 아나스는 4명의 정통 칼리프들 중 마지막 칼리프로 순니파에 의해 간주되는 예언자 무함마드의 사위이자 사촌인 칼리프 알리 이븐 아부 탈립(Ali ibn Abu Talib)을 제외시켰다. 이쥐마(공동체의 전원합의제)에 관련하여 말리크 이븐 아나스는 만일 한 문제의 해결을 이끌어 내는데 실패한다면 끼야스(qiyas, 유추해석)가 해결점을 찾기 위해 법학자에 의해 실행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처음에 말리키 학파는 이슬람•아랍에서 우세한 학파였으나 이후 샤피이(Shafi'i) 학파에게 눌리고 말았다. 완강한 보수 학파인 말리키 학파는 오늘날 북부아프리카, 서아프리카와 수단 등지에서 지배적인 법학파로 자리잡고 있다.


*메나헴 베긴 울포비치 Begin, Menachem Wolfovitch (1913∼1992) :

이스라엘의 정치가 및 수상. 베긴은 브레스트 리토프스크(Brest-Litovsk)에서 태어났다. 베긴은 바르샤바대학에서 공부하였다. 16세 때 진보 시온주의 청년조직에 가담하였고, 진보주의 운동의 창시자인 블리디미르 야보친스키(Vladimir Zeev Jabotinsky) 보다 더 극단주의자였던 베긴은 빌리어스(Vilnius), 리투아니아(Lithuania), 소비에트 등지로 옮겼다. 1940년에 베긴은 시베리아 수용소에서 8년 간의 노역을 선고받았다. 그러나 1941년 중반, 소련이 제2차 세계대전에 참가한 후, 베긴은 석방되어 자유 폴란드군에 가담하였다. 1942년 그 군대의 일원으로서 팔레스타인에 도착하였다.
1943년 제대 후 그는 지하조직인 이르군(Irgun Zvai Leumi, 국가군 조직)의 사령관으로 임명되었다. 베긴은 1944년 1월 영국에 대항하여 무장 투쟁을 선언하였으며, 전쟁 후 1945년 10월 이를 재차 요구했다. 1946년 7월 이르군은 예루살렘의 킹 다비드 호텔에 있는 영국정부 사무실에 폭탄을 투척하여, 91명의 영국, 아랍, 유대인 간부들과 사무원들이 사망했다. 이 사건 이후 팔레스타인에 있는 유대인의 주력군대인 하가나(Haganah)는 이르군과의 협력을 중단하였다.
베긴은 1948년 4월 10일 예루살렘 근처의 데이르 야신(Deir Yassin)의 아랍마을 공격의 핵심적인 계획자였다. 이 공격으로 254명의 남녀와 어린아이들 심지어 태아까지 대량 학살되었으며, 팔레스타인으로부터 아랍인들의 대이동을 야기하였다. 베긴을 선봉으로한 이르군은 1948년 5월 26일 다비드 벤 구리온(David-Ben-Gurion)의 임시정부가 조직한 이스라엘 방위군(IDF)에 편입을 거부하였다. 이르군은 아랍국가와의 전쟁에 독자적으로 참가하였다. 이르군에 무기와 지원자들을 인도하기 위해 텔 아비브(Tel Aviv)에 정박한 배를 파괴하도록 벤 구리온이 명령한 6월말까지 베긴과의 대립이 계속되었다. 9월 베긴은 이르군을 해체했으나, 곧 베긴의 주도하에 이르군 군대와 수정 시온주의자들이 헤루트당과 재 합병했다.
1949년 베긴은 크네셋(Knesset)으로 선출되었으며, 1948년까지 회원직을 유지하였다. 처음 5년간의 선거에서 베긴이 이끄는 헤루트(Herut)당은 12%의 지지율을 획득했으며, 국회에서 가장 큰 정당으로 출현했다. 그는 권위적인 방법으로 조직을 이끌었으며, 어떠한 도전도 용납하지 않았다. 1965년 그의 지시대로 헤루트당은 자유당과 연합하여, 그 해 선거에서 21%의 의석을 확보했다. 1967년 6월 아랍-이스라엘 간 전쟁 전날에 베긴은 레비 에쉬콜(Levi Eshkol)이 이끄는 정부와 연합하였다.
베긴은 1970년 7월 시나이 반도로부터 이스라엘군을 철수시키자는 미국의 평화계획을 찬성하는 다수의 결정에 항의하였다. 그 이후 국회에서의 반정부 역할을 재개했다. 1973년 모든 우익 단체들을 통합한 리쿠드(Likud)당이 구성되었고, 베긴은 리쿠드 당대표로 선출되었다. 1977년 5월 리쿠드의 선거에서 승리한 후 베긴은 6년 이상 수상직을 유지하였다. 그는 1978년 9월 이집트 대통령 안와르 사다트와 함께 캠프 데이비드(Camp David) 협정에 서명했으며, 이스라엘과 이집트 간의 평화조약체결로 이어졌다. 그 해 베긴과 사다트는 노벨 평화상을 수상했다.
베긴은 1982년 11월 아내의 죽음으로 상심하였고, 점차 공직 생활에서 멀어져가다 1983년 10월 사임하였다.


*메디나 Medina (아랍어-도시) :

사우디아라비아의 도시.
인구 130여만 명(2006년 기준). 아랍어로 메디나 알 라술라(Madiinat al-Rasuul Allah, 알라의 사도의 도시)로 알려진 메디나는 이슬람 제2의 성지이다. 이슬람 이전에는 야스립(Yathrib)이라 불리던 이 오아시스 도시는 135년 팔레스타인에서 추방된 소수의 유대인들이 정착하면서 형성된 도시였다. 예언자 무함마드가 622년 메카로부터 이 곳으로 이주하고 난 후, 그는 이곳에 인구 5천의 도시국가(city-state)를 건설하였다. 10년 후, 예언자가 사망하자 메디나는 이슬람 칼리프의 수도가 되었다. 그리고 661년, 수도가 다마스커스로 옮겨질 때까지 이슬람 칼리프의 수도로 남아있었다.
메디나는 이슬람 학문 특히 꾸란과 순나와 관련된 학문의 중심지였으며 또한 8세기 말리키 학파 설립의 토대가 되었다. 후에 메디나는 메카와 이집트의 샤리프들의 통치하에 놓이게 된다. 1517년 오스만제국은 이집트를 정복하였고 메디나에 대한 통치권도 장악하게 되었다. 예언자 무함마드의 묘, 그의 딸이자 칼리프 이맘 알리의 부인인 파티마의 묘, 칼리프 아부 바크르의 묘, 그리고 칼리프 오마르의 묘가 있는 대모스크가 이 도시에 있어, 메디나는 이슬람의 제2의 성지가 되었다. 오스만의 메디나에 대한 종주권은 1차 세계대전과 함께 끝났다. 샤리프 후세인 이븐 알리 알 하쉼에 의한 메디나의 통치는 1924년 압둘 아지즈 알 사우디에 의해 끝났다. 그리고 메디나는 사우디아라비아의 일부가 되었고 비무슬림들에게 문을 닫아버리게 되었다.
메디나의 경제 및 종교 생활은 성지순례와 그 궤를 같이하고 있다. 대부분의 순례객들은 메카 방문과 함께 메디나 방문을 함께 한다. 이슬람 최초의 모스크가 메디나 근처에 있으며 예배 방향을 예루살렘 방향에서 메카 방향으로 바꾼 것을 기념하는 모스크 또한 메디나 근처에 있다.


*메레츠 Meretz (히브리어-힘) :

이스라엘의 정치 연합. 공식명칭-Meretz Israel HaDemokratit(힘, 민주적 이스라엘).
1984년 9월 노동당이 리쿠드와 함께 국가 통일 정부를 구성하기로 결정하자 노동당과의 연대를 절연한 마팜은 1988년 총선 후, 라츠(Ratz)와 쉬누이(Shinui)와 메레츠 연합을 결성하였고 이 연대는 10명의 의원을 가진 정치세력이 되었다. 메르츠의 정강은 종교와 국가의 분리, 선거개혁, 아랍 점령지에서의 유대인 정착촌 건설의 중지, 팔레스타인인들에게 자결권 인정 등을 포함하고 있다. 그리고 메레츠는 야당으로 활동하였다. 1992년 선거에서 12석을 획득하였고 노동당이 이끄는 연정에 참여하였다.


*메소포타미아 Mesopotamia (그리스어-티그리스와 유프라테스강 사이의 땅) :

티그리스(Tigris)와 유프라테스(Euphrates) 강 사이의 터키 남부의 산악지대로부터 페르시아만까지 펼쳐져 있는 메소포타미아는 현재 이라크 영토의 대부분을 지칭하고 있다. 지난 150년간 행해진 고고학 발굴은 메소포타미아 문명을 기원전 1만 년 전의 시대로 거슬러 올라가게 하는 증거들을 제공하였다. 메소포타미아는 역사상 가장 일찍 농경 사회가 형성되었던 지역으로 관개 기술과 수공예 그리고 점토벽돌로 만든 건축물들이 존재했었다. 이곳에 최초로 건설된 도시는 약 B.C. 4천년이었으며 글자는 B.C. 300년경에 이곳에서 발명되었다.
B.C. 2세기에 페르시아 제국(B.C. 250∼A.D. 226)으로 합병된 메소포타미아는 쇠퇴하기 시작했다. B.C. 38년 이후에 메소포타미아는 페르시아제국 이후 사산제국(A.D. 226~640)과 로마제국(B.C. 27∼A.D. 395)이후 비잔틴제국(A.D. 395~1453) 사이의 완충지역이 되었다. 메소포타미아는 637년 아랍무슬림들에 의해 정복되었고 그때부터 이라크의 역사가 되었다.


*메시아 messiah (히브리어-mashiach의 파생어로 의미는 구세주) :

메시아의 개념이 유대교와 기독교에서 공통적이기는 하나 유대인들과 기독교인들에 의해 서로 다른 견해를 보이고 있다. B.C. 586년 바빌론 유수 이후 유대인들은 신앙의 전형이자 군주인 다윗(B.C. 1010∼970년 통치)과 같은 지도자에 의해 유대민족이 해방되기를 갈망하였다. A.D. 135년 유대인들의 마지막 디아스포라(이산) 이후, 유대인들은 모든 부정 행위를 청산하고, 죽은 자의 부활을 전하며, 자신들을 회복된 이스라엘로 이끌 메시아를 생각하기 시작했다. 기독교인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구약에서 약속하신 메시아로 간주한다. 그 분은 부정의를 끝내는 것과는 동떨어져 오히려 자신을 희생함으로써 고통받았다는 사실이 그의 메시아적 지위에는 어떠한 차이를 만들지 않는다고 기독교인들은 생각한다.


*메이어 Meir (Meyerson), 골다 Golda (1898∼1978) :

이스라엘의 정치가.
우크라이나 키에프의 한 목수인 모세 마보비치의 딸인 메이어는 그녀가 8살 때 가족과 함께 미국의 밀워키로 이주하였다. 그녀는 선생님으로 근무하다 1917년 회계원인 모리스 메이르손과 결혼하였다. 4년 후 부부는 팔레스타인 지역으로 이주해 키부츠에 정착하였다. 1926년부터 메이어는 히스타드루트에서 활동하기 시작했고 그 후에 마파이에서 활동하였다. 1932년 남편과 별거한 후 그녀는 미국에서 2년 간 여성조직의 선구자로 활동하였다.
1936년 그녀는 히스타드루트의 정치담당 책임자가 되었다. 그녀는 1937년 영국의 필(Peel) 위원회에 의해 제안된 팔레스타인 분할안을 반대하였다. 1946년 외국문제를 다루는 유대 정보기관의 정치분과의 책임자인 모세 샤르트가 체포되자 그녀는 그를 대신하여 그 일을 수행하였다. 메이어는 트랜스요르단의 통치자인 압둘라 이븐 후세인을 1947년 11월 말과 1948년 5월 10일 만나 아랍 국가들과 이스라엘 간의 전쟁을 피하기 위한 협정체결을 시도했으나 실패하였다.
메이어는 잠시 모스크바 주재 이스라엘 공사관의 공사로 일하다가 1949년 초 국회의원 선거에 당선되었고 약 25년 간 국회의원 자리를 유지하였다. 메이어는 1949∼1956년까지 노동부 장관으로 재직하였고 1956∼1966년까지 외무부 장관을 역임하였다. 장관직을 사임하고 난 후 메이어는 마파이의 초대 사무총장으로 파벌간의 분열을 조정하기 위한 노력을 기울였다. 마파이가 1968년 노동당으로 바뀌게 되었을 때 마이어는 공직 생활을 은퇴하였다. 하지만 1969년 2월 수상인 레비 에슈콜이 갑작스럽게 사망하자 메이어는 노동당 내부의 권력다툼을 피하고 국가통일 정부를 원만히 이끌 인물로 추천되어 결국 수상으로 취임하게 된다. 1970년 7월 로저스 평화안을 메이어가 수용하자 가할은 연정으로부터 탈퇴하였다.
모든 정당들의 관심이 1973년 10월 말 있을 총선에 맞추어 지고 있을 즈음 이스라엘은 10월 6일 이집트와 시리아에 의해 공격받았다. 전쟁 기간동안 메이어는 강력한 지도력을 발휘하였다. 특히 그녀는 이스라엘이 비축하고 있던 10기의 원자폭탄을 일부 특별 폭격기에 탑재할 것을 명령했다고 전해지고 있다. 1974년 3월 공식조사 위원회로부터 1973년 10월 아랍-이스라엘 전쟁 기간 중 그녀가 펼쳐 보였던 지도력을 높이 평가받았음에도 불구하고, 메이어는 1974년 4월 11일 수상직 사임을 결정하였다. 메이어의 사임 결정은 크게는 내각의 붕괴를 가져왔고 작게는 모세 다얀의 사임을 가져왔다. 1975년 메이어는 이스라엘 국가에 대한 공헌을 인정받아 이스라엘 상을 수상하였다.


*메카 Mecca :

사우디아라비아의 도시.
인구 170여만 명(2008년 기준). 그리스계 이집트왕조인 프톨레미아 왕조(B.C. 323∼30)때에 마코라바(Macoraba)로 알려졌던 메카는 고대 상업의 중심지였다. 메카는 인도로부터 지중해 지역으로 가는 향료 무역로 상에 위치하였고, 메카는 이슬람 부흥이전부터 아랍부족들의 성지인 카바 신전과 잠잠 우물을 포함하고 있었으므로 경제적으로 크게 발전되어 있었다.
예언자 무함마드 이븐 압둘라 알 쿠라이쉬(A.D. 570∼632)의 출생지인 메카는 초기 신자들에게 그의 최초의 계시가 전달된 곳이다. A.D. 622년 메카로부터 예언자 무함마드의 이주는 이슬람 시대의 시작을 의미한다. 이주한지 8년 후 예언자는 메카를 정복하였다. 매년 성지순례의 장소로서 메카는 이슬람 최고의 성지가 되었다.
메카는 930년에 씨르포토 무슬림 종파(cyrpto-Muslim sect)인 카르마시안(Karmathians)에 의해 약탈당했다. 이들은 카아바 신전으로부터 흑석을 제거하여 약 20년 간 카바 신전에 흑석이 없도록 한 장본인들이다. 11세기 말에 메카는 하쉼가에 의해 지배받게 되었고, 메카의 지배자는 샤리프란 명칭이 붙게 되었다. 히자즈(Hijaz)의 주변 지역과 함께 메카는 이집트에 식량을 의존하고 있어서 카이로를 통치하는 지배자의 종주권 하에 놓여있었다. 1517년 오스만제국이 이집트를 정복하였을 때, 메카의 지배권도 오스만제국에 떨어지게 되었다. 메카는 1804∼1813년까지 와하비의 통치하에 있었고 1869년 수에즈 운하가 개통되었을 즈음 이스탄불과 메카 사이의 관계는 호전되었다. 후세인 이븐 알리 알 하쉼은 1908년 샤리프가 되었다. 1916년 6월 그는 스스로 히자즈의 왕으로 선언하였고 메카를 수도로 선포하였다. 그는 1924년 압둘 아지즈 알 사우드에 의해 타도되었다. 메카는 사우디아라비아의 일부가 되었고, 비무슬림들에게 문을 닫아버렸다. 메카의 경제적, 종교적 생활은 약 1주일간 계속되는 성지순례와 궤를 같이하고 있다. 메카의 심장부는 하람 사원이다. 고대 도시의 중심부에 위치하며 카아바 신전을 포함하고 있는 하람 사원은 1979년 11월 20일(이슬람력 1400년 1월 1일) 주하이만 알 우타이바(Juheiman al Utiba)에 의해 주도된 300명 이상의 이슬람 전사들의 무장 폭동의 진압을 위해 보안군이 2주간 포위 공격을 단행한 이후 다시 광범위하게 수리되었다.
젯다 항구와 공항을 이용하여 도착하게 되는 메카는 이미 현대적인 도시로 바뀌었고 성지순례 기간에 방문하는 약 200만 명의 순례객을 위한 현대적인 시설이 잘 정비되어 있다. 1987년 순례 기간에 메카에서 주로 이란인들이 주도한 폭동이 발생하였으나 경찰은 총기를 사용하여 이 폭동을 성공적으로 진압하였고 그 결과 402명의 사상자가 발생하였다.


*모사드 Mossad (히브리어-기관) :

이스라엘의 해외정보 기관.
1951년 4월 이스라엘 정부는 외무부 정치국(이스라엘 국외 정보수집 업무를 맡은 국)을 모사드로 바꾸고 총리실로 이관하였다. 최초의 모사드 책임자인 루벤 실로아흐는 임무를 맡은 지 2달만에 미중앙정보국(CIA)과 비밀 상호협력 협정을 체결하였다. 1952년 9월 실로아흐가 사임한 후 이서르 하렐이 책임자가 되어 1952∼1963년까지 모사드를 이끌었다. 1963∼1968년까지 메이르 아미트가 책임자로 일했고 1968∼1974년까지 즈비 자미르가, 그리고 1974∼1982년까지 이츠하크 호피가 책임자였으며 1982∼1989년까지 나훔 아드모니가 책임자로 근무했다. 현재 책임자의 이름은 국가비밀로 되어 있다.
1970년대 초반이래 모사드의 유명한 활동으로는, 1972년 9월 뮌헨 올림픽에서 11명의 이스라엘 선수단이 PLO의 ‘검은 9월 단’에 의해 살해된 지 1년이 채 경과되지 않은 시간에 12명의 팔레스타인 사건(직접적 또는 간접적) 개입자들을 암살한 것이 있다. 또한 요르단 후세인 왕과 이스라엘 수상 이츠하크 라빈 사이의 비밀회담을 1975년, 1977년에 주선하였으며 그 중 한 번은 텔아비브에서 개최되었다. 또한 1976년 7월 40명의 팔레스타인 죄수들을 석방시키기 위해 2명의 팔레스타인 게릴라와 바다르-메인호프 그룹의 두 명의 독일 요원에 의해 텔아비브 발 에어 프랑스 비행기를 납치하여 100명의 인질들을 태우고 우간다의 엔테베 공항에 있던 납치범들을 급습하는 작전도 모사드가 지휘하였다. 1979년 4월 모사드는 프랑스의 세인-서-메르 항구로부터 이라크로의 선적을 기다리고 있던 2대의 탐무즈 핵 원자로의 노심을 폭파하는 작전을 수행했다. 14개월 후 파리에서 모사드 요원이 이라크-이집트 핵 발전 상호협력을 감독하는 이집트 핵 물리학자 야흐야 알-메샤드를 암살하였다. 1981년 6월 4일 모사드와 군 정보부대인 아만은 이라크에 대한 공습을 계획했고 바그다드 근교에 건설되던 핵 시설을 파괴하였다.
레바논 내전동안 기독교 지역의 중심도시인 주니에흐에서 1975∼1976년까지 주둔하며 바쉬르 제마엘과 협력하여 일하던 모사드는 1982년 6월 레바논에 대한 이스라엘 침공을 위한 국방장관 아리엘 샤론 계획에 주도적으로 참여하였다. 모사드와 아만은 1985년 10월 1일 56명의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사망한 튀니지의 PLO 본부에 대한 공습을 단행하였다. 모사드는 1986년 11월 밝혀진 이란 게이트 사건에 깊숙이 관여하기도 하였다. 1986년 9월 말에 모사드의 기관원인 신디는 1977년 8월부터 1985년 11월까지 이스라엘의 디모나 핵 발전소의 교대 운영자로 선데이 타임지에 이스라엘의 핵무기 생산에 대한 상세한 사항을 넘겨주었던 모르데 차이 바누누를 런던에서 로마로 유인했다. 로마에서 바누누는 모사드 요원들에 의해 마취제를 강제 복용하고 이스라엘로 납치되어 장기간의 감옥형이 선고되었다. 1988년 4월 16일 모사드는 튀니지에서 팔레스타인 최고위 인물 중 한 명인 칼릴 와지르를 암살하였다. 하지만 모사드는 1991년 걸프전 기간 중 그리고 그 후 사담 후세인 이라크 대통령에 대한 암살 시도를 성공시키지 못했다.


*모세 다얀 Dayan, Moshe (1915∼1981) :

이스라엘의 군인 및 정치가. 갈릴리 호수 근처의 데가니아 키부츠(Deganiaa Kibbutz) 태생으로 십대에 하가나(Haganah)에 가입했다. 영어가 유창하지 못했기 때문에 1935년 영국 런던의 경제학교에서 공부를 계속하지 못하고, 팔레스타인으로 돌아와 아랍 폭동에 반대하는 하가나 습격 작전에 참여했다(1936∼1939). 2차 세계 대전 발발 당시, 영국의 식민지 정책의 변화에 따라서 당국은 하가나를 탄압하였고, 그는 5년형을 언도 받았다. 1941년 초 석방된 후, 후에 친나치 프랑스 단체가 된 영국의 정찰대를 이끌고 시리아로 잠입하였으며, 다얀은 부상당했고 왼쪽 눈을 잃었다.
1차 아랍 이스라엘 전쟁(1948∼1949)에서 다얀의 부대는 람레(Ramle)와 로드(Lod)를 생포한 공으로 이스라엘 지역 사령관으로 임명되었다. 그 후 다비드 벤 구리온(David Ben-Gurion)은 총리 겸 국방 장관의 보좌관이 되었으며, 1950년에는 남부 병력의 사령관, 1952년에는 북부 병력의 사령관을 역임한 후, 육군 최고 사령관에 임명되었다. 1953년에는 총사령관이 되었으며, 그의 군 통솔력은 수에즈 전쟁(1956년 10월∼11월)에서 최고조에 이르렀다.
1958년 군에서 은퇴 후 그는 마파이(Mapai)파 정치가가 되었으며, 1959년 국회의원에 선출되었고 또한 농업부 장관으로 재직하였다. 총리인 레비 에쉬콜(Levi Eshkol)과 의견 대립으로 1964년 퇴임했다가 1965년에 라피(Rafi)에 합류하여 반대파의 국회의원으로 선출되었다. 그러나 1967년 6일 전쟁 전날 에쉬콜 총리는 내각의 개편을 단행하였고 그는 국방 장관에 임명되었다.
1968년 다수의 라피 지도자들과 노동당의 결성을 위해 “마파이 아흐두트 하아보다 포아레 시온(Mapai-Ahdut HaAvodah-Poale Zion)” 연합을 조직하였으며, 정치의 주류 세력으로 복귀하였다. 그는 점령지에서 호전적인 강경 노선을 취했으며, 그의 주장을 노동당 동지에게 강요하여 그 자신의 독자적인 계파를 분리시키기 위해 협박 등의 저질적인 수단을 이용하였다. 1973년 4월 골란(Golan) 고원과 시나이(Sinai)의 일부인 서안을 차지하기 위한 군사 활동을 벌였다.
다얀은 점령지에 유대인 식민지를 구축하는데 혼신을 기울였다. 이집트-시리아는 1973년 10월 이스라엘이 점령한 아랍영토를 기습 공격해 이스라엘과 다얀의 무적이라는 이미지를 깼다. 비록 이스라엘군의 뛰어난 전과에도 불구하고 그에게는 실패의 꼬리표가 붙었다.
1977년 5월 선거에서 리쿠드당에게 패하자, 다얀은 당을 이적해 메나헴 베긴(Menachem Begin) 수상 하에서 외무부장관이 되었다. 1971년 3월에 다얀은 이집트와 평화회담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였다. 1972년 그는 정부요직에서 물러나 그 자신의 정당을 창당했다. 1981년 선거에서 단지 의석 2자리를 얻는데 그쳤다.


*모술 Mosul :

이라크의 도시. 인구 180만여 명(2008년 기준).
오랜 역사를 가진 도시로서 니네베흐(Ninebeh) 고대 유적지 맞은 편, 티그리스 강변에 위치한 모술은 압바스 왕조(A.D. 751∼1258) 시대에 북메소포타미아의 중심도시였다. 모술은 1258년 몽골의 침략자 훌라구(Hulagu)에 의해 약탈된 이후 뚜렷한 통치자 없이 방치되었다가 1508년 이란의 샤 이스마일(Sha Ismail, A.D. 1501∼24년 통치)에 의해 정복됨으로 다시 중요성을 갖게 되었다. 모술은 1538년 오스만 터키에 정복되었다. 중요한 상업 중심지인 모술은 터키 지배 하에서 번창하였다. 제1차 세계대전에서 오스만 터키가 패하자 모술의 중요성도 상실되었으나 1927년 이 지역에서 석유가 발견됨으로써 다시 중요성을 가지게 되었다. 모술에는 기울어진 미나렛 모스크와 교회들이 있고 여러 곳에 모스크 자리의 흔적이 있다. 니네베주의 주도인 모술은 이라크의 3번째로 큰 도시이다.


*모스크 Mosque :

이슬람 성원.
아랍어로는 마스지드(예배하는 장소). 최초의 모스크는 예언자 무함마드(A.D. 570∼632)에 의해 메디나 근처 꾸바(Quba)에 건설된 것으로 단순한 안마당의 구조였다. 칼리프 알 왈리드(A.D. 705∼15) 통치 기간동안 모스크에 여러 요소들이 첨가되었는데, 그것은 바로 미흐랍(Mihrab, 끼블라 방향의 벽 중앙에 반원형의 움푹 파인 형태), 민바르(Minbar, 설교를 위해 설교자가 설교단으로 사용하는 계단식의 단) 등이다. 그 때부터 모스크는 완전히 또는 부분적으로 지붕이 씌워졌으며 하나 또는 두 개의 미나렛(Minaret, 첨탑)이 있게 되었다. 큰 모스크에는 때때로 신학생들을 위한 수도원을 갖추기도 하였다.
모스크의 지도자는 이맘으로 불리며 그는 예배 인도자로 활동한다. 때때로 이맘은 종교적 지도자(마울라위)로 활동하기도 한다. 모스크는 미나렛에서 하루 다섯 번 예배를 알리는 무앗진(예배를 알리는 사람)이 있다. 살라(아랍어) 또는 나마즈(페르시아어)라 불리는 종교적 예배는 맨발로 그리고 바닥에 줄지어 서서 이맘의 안내에 따라 절을 하고 엎드리는 행위이다.
예배의 대상물이나 사진과 조각상들은 모스크 안에 설치되는 것이 허락되지 않는다. 신자들은 예배 전에 대부분의 모스크에 부속되어 있는 흐르는 물의 우두 장소에서 자신들의 몸을 깨끗이 닦아야한다.
무슬림들은 이슬람의 휴일인 금요일 합동예배를 드리는데 이 합동예배는 매우 중요하다. 합동예배를 위해 대도시는 집합적 모스크들로 발전한다. 이 모스크들은 다양한 목적을 가진 공공건물로 이용되고 있는데, 즉 군사, 정치, 사법, 사회, 교육의 목적으로 사용된다. 이처럼 모스크가 다용도로 사용되는 가장 훌륭한 전형은 카이로의 아즈하르 모스크이다. 아즈하르 모스크는 A.D. 969년 알 아즈하르 대학으로 발전되었다. 현대에 모스크들의 교육적 기능들은 세속적 교육 기관들에 의해 많이 사라졌으나 아직도 많은 이슬람•아랍국가에서 무슬림 어린아이들을 위한 이슬람 교육 기관으로서 중요한 역할을 계속하고 있다.
이란에 이슬람 공화국이 수립된 후에 모스크들은 전통적 용도로 사용되었는데 이란 혁명위원회는 모스크에 본부를 두고 식량 배급카드의 발급과 전사 지원자들의 모집과 같은 국가 행정을 수행하였다.


*몬타제리, 후세인 알리 Montazeri, Hussein Ali (1922∼2009) :

이란의 종교 정치 지도자.
나자파 바드의 가난한 농부 집안에서 출생한 몬타제리는 이스파한에서 그의 초기 신학 교육을 받았다. 이후 쿰(Qom)으로 갔고 그곳에서 아야톨라 루훌라 호메이니의 학생이 되었다. 1960년대 초에 그는 꿈에 있는 파이지야 신학교에서 가르치다가 1963년 6월 반정부 항의에 참여하였다.
샤(Sha)에 대한 반대적인 성직자 그룹의 활동 멤버인 몬타제리는 아야톨라 마흐무드 탈레까니와 가까웠다. 1964∼1978년까지 호메이니의 망명 후반기에 호메이니는 몬타제리를 이란에 있는 자신의 개인적 대표로 임명하였다. 몬타제리는 1975년 3월 반라스타키즈당 항의 도중 체포되었다. 감옥에서 심한 고문을 받았던 그는 1978년 11월, 이란 혁명이 절정에 이르렀던 시기에 석방되었다. 1979년 2월 호메이니가 이란으로 귀국했을 때, 호메이니는 몬타제리를 매우 명예로운 자리인 꿈의 금요기도의 인도자로 임명하였고 이슬람 혁명 위원회의 위원으로 임명하였다. 몬타제라는 군사 성직자 조직의 지도자로 선출되었고 헌법 초안을 위해 소집된 전문가 회의(1979)의 의장으로 선출되었다. 1980년 호메이니는 그에게 꿈에 본부를 둔 금요 기도 지도자들의 비서로 임명하였다.
몬타제리는 많은 문제에 있어 극단적인 입장을 취하였다. 몬타제리의 입장을 지지하기 위한 공식 운동은 1983년 봄에 시작되었는데 그 때 모든 정부 관리들은 호메이니의 초상화에 몬타제리의 작은 사진을 같이 들고 있었다. 그러나 몬테제리가 보여준 일련의 급진적인 활동과 시도는 전문가 회의에서 호메이니의 후계자로 자신이 지목되는 것의 장애물이 되었다. 하지만 1985년 11월 짧은 회기 후에 의원 아흐마드 바크르 빈은 의회가 사실상 호메이니의 후계자로 몬테제리를 선택했다고 언급하였다. 몬테제리는 호메이니가 그에 대한 마음을 바꾼 1989년 3월까지 호메이니의 후계자적 위치를 점하였다.
통치 권력기구내의 한 파벌이나 다른 파벌들을 번갈아가며 후원하는 호메이니의 통치 방식과는 다르게 몬테제리는 꾸준히 중도적 정책을 유지하였는데 이는 경제 자유화 조치나 야당에 대한 공정한 대우 등을 허락하자는 정책이었으며, 이 노선은 결국 중도파와 급진주의자들 간의 불화를 야기했다. 그는 이슬람 혁명이 성취한 것들을 무시함으로써 혁명의 약속을 널리 알리는데 실패했다고 주장했다. 몬타제리는 ‘지도부 위원회’의 설립을 통해 권력 분산을 주장하였으나 이것은 거부되었고 결국 그는 사임하였다. 그때부터 몬타제리는 종교적 교육 사업에 몰두하였다. 1989년 6월 호메이니가 사망했을 때 몬타제리는 전문가 회의에 의해 고려된 호메이니 후보자 명단에 올라가 있지 않았다.
몬타제리는 이슬람 공화국의 국내외 정책에 대해 20년 이상 비평해 온 주요 비평가 중 한 사람이었으며, 이란에서의 바하이의 권리, 시민권, 여성의 권리에 대해 활발하게 지지하였다. 그 후 그는 쿰에 있는 자신의 집에서 잠을 자던 중 심부전으로 2009년 12월 19일, 87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하였다.

*몰레데트 Moledet (히브리어-고국) :

이스라엘의 정당.
몰레데트는 1988년 서안지구와 가자지구로부터 팔레스타인인들을 추방할 계획을 주도한 제에브 레차밤 장군에 의해 설립되었다. 1988년 선거에서 2석을 획득했으며 선거 후 국가 통일 정부를 지지하였다. 1991년 10월 마드리드에서 개최된 중동 평화 회담에 이스라엘의 참여에 항의하여 몰레데트는 3개월 후 정부에 대한 그들의 지지를 철회하였다. 1992년 1월 총선에서 몰레데트는 3석을 획득하였다.


*무라비툰 Murabitun (아랍어-설교에 충실한자들) :

레바논 민병대.
1970년대 초 이브라힘 쿨라일라트(Ibrahim Qulailat)에 의해 창설된 무라비툰은 ‘독립 나세르 운동(INM)’의 군사 조직이다. 전통 순니파의 통치에 반대하며 베이루트에 본부를 둔 INM의 추종자들은 주로 가난한 순니파이며 이 조직은 PLO를 후원하고 있다. 1975∼1990년 내전에서 ‘레바논 민족운동(LNM)’의 일부분인 무라비툰은 팔랑훼당의 가장 강력한 반대세력이다. 무라비툰의 최전성기에 약 3천 명에 이르는 전사를 보유하였으나 이는 여러 파벌들 가운데 가장 규모가 작은 파벌 중의 하나이다. 이스라엘 정부는 무라비툰과 PLO와의 밀접한 관계를 이유로 삼아 1982년 8월 PLO와 함께 무라비툰도 베이루트에서 추방하였다. 1984년 2월 서베이루트로 돌아오기 위한 무라비툰의 노력은 아말과 드루즈 민병대에 의해 좌절되었다. 이후 PLO조직들이 서베이루트에서 그들의 군사력을 재건하기 시작할 때 무라비툰도 재건하였다. 1990년 10월 내전이 끝나자 무라비툰은 다른 민병대와 함께 해체되었다.


*무바라크, (무함마드) 호스니 Mubarak, (Muhammad) Hosni (1928∼) :

이집트 군 지도자이자 정치인. 1981년부터 2011년까지 대통령 역임.
법원 공무원의 아들로 나일 델타 마을인 카프르 알 무살리하에서 출생한 무바라크는 1950년 공군사관학교를 졸업했다. 1950∼1954년까지 공군 전투기 조종사로 근무한 후 공군 사관학교에서 교관으로 근무했으며, 이후 공군사관학교장에 임명되었다. 1961년 서카이로 공군기지 사령관으로 임명된 무바라크는 소련에서 참모학교 과정을 이수하였다. 1964년 그는 소련의 프룬제 군사학교로 가 그곳에서 1년간 머물렀다.
1967년 6월 아랍-이스라엘 전쟁에서 이집트가 패배하고 난 후 무바라크는 공군사관학교의 학교장으로 돌아왔으며, 2년 후 공군참모총장으로 승진하였다. 1973년 아랍-이스라엘 전쟁에서 이집트 공군은 그의 지도 하에 전쟁 초기 그들의 임무를 성공적으로 수행하였다. 다음 해에 공군 대장으로 승진하였다. 1975년 4월 안와르 사다트 대통령은 무바라크를 부통령으로 임명하였는데 그 이유는 무바라크가 권력 핵심부로 발전할 가능성이 없는 인물로 보았기 때문이다. 무바라크는 1976년 집권당인 ‘국민민주당(NDP)’의 부총재가 되었다. 부통령으로서 무바라크는 국내외 문제에 대해 사다트의 노선을 충실히 보좌하였다.
1981년 10월 사다트의 암살이 있자 무바라크는 대통령직을 승계했으며, 또한 집권당 총재도 맡게 되었다. 이슬람 원리주의자들과 잠시 유화적 자세를 보였던 무바라크는 곧 사다트의 강경 노선을 따랐다. 미국과 밀접한 우호관계를 유지하면서 소련과의 관계도 점진적으로 강화하였다. 무바라크는 1982년 이스라엘의 레바논 침공에 항의하여 텔아비브 주재 이집트 대사를 소환하였으나 이스라엘과의 외교단절을 요구하는 아랍국가들의 요청은 거부하였다. 그는 이란-이라크 전쟁에서 이라크에 대한 군사적 지원을 추구했던 사다트의 정책을 계승하였는데 그것은 이집트-이스라엘 평화협정으로 인해 아랍 연맹에서 축출되었던 이집트가 다시 연맹의 회원국이 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주된 목적이었다. 1984년 9월 이라크의 동맹국인 요르단이 이집트와 외교 관계를 재개하면서 무바라크의 정책은 성공하였다. 1983년 레바논으로부터 야세르 아라파트가 최종적으로 추방되었을 때 무바라크는 아라파트의 분산된 군을 재정비하는데 많은 도움을 주었다.
1986년 2월 카이로의 중앙보안군 1만7천 명의 신병 주도 하에 발생한 폭동으로 무바라크 정권은 큰 위협을 받았다. 성공적인 폭동 진압으로 국방장관 피델 마르셀 압둘 할림 아부 가잘라가 명성을 드높이게 되자 무바라크는 자신의 권력에 도전할 유력한 잠재적 라이벌을 제거하기 위해 그 해 4월 그를 국방장관직에서 해임하였다. 그리고 1987년 대통령 선거에서 그는 단독후보로 나와 재선되었다.
무바라크는 1989년 초 아랍협력회의(ACC)에 이집트를 가입시켰고 다음해 아랍연맹 회원국으로 복귀시켰다. 1990년 8월 사담 후세인이 쿠웨이트를 점령하자 그는 즉각적으로 사담의 행위를 비난하였다. 그리고 그는 아랍연맹에서 회원국들을 선도하여 이라크의 즉각적이고 무조건적인 철수를 요구하도록 만들었다. 무바라크는 사우디 방어를 후원하기 위해 사우디아라비아에 이집트군을 파병하였다. 미국이 주도한 다국적군의 일원으로 이집트군은 제2차 걸프전에 참전하였다.
무바라크의 정책들은 이집트 사회의 점증되는 다양한 요구에 부응하지 못하였고 대부분의 야당들은 1990년 총선을 거부하였다. 자마아트 알 이슬라미야(Jama'at al-Islamiyyah)와 지하드 알 이슬람(Jihad al-Islam) 같은 무장 이슬람 과격주의 그룹들은 1992년 무바라크 정권에 반대하는 투쟁을 전개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1993년 대통령에 3선되었다.
그러나 무바라크는 2011 이집트 혁명 동안 18일의 시위가 있은 뒤 2011년 2월 11일에 대통령직에서 축출되었다.


* 무사디끄, 무함마드 Mussadiq, Muhammad(1881-1967)
이란 정치인, 수상 역임(1951-53)
아마다바드의 부유한 관료의 아들인 무사디끄는 프랑스에서 대학을 다닌 후, 스위스의 라우산 대학교(Lausanne)에서 법학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1914년 이란으로 돌아온 뒤 그는 파르스주 주지사로 임명된다. 1921년 레자 칸(Reza Khan)의 쿠데타로 무사디끄는 정부의 경제장관으로 임명되었고, 1923년 국회의원으로 선출되었다. 1925년 칸의 왕위 즉위식에 반대 의사를 밝혔고, 이로 인해 정계 은퇴 압박을 받게 되었다.
1941년 레자 칸의 퇴위와 더불어 무사디끄는 다시 주목받게 된다. 1944년 재선에 성공하여 의원직을 갖게 되었으며, 민족주의자로써, 1945년 소련으로 넘어가게 된 석유채굴권을 지켜내기 위한 운동을 성공적으로 이끌었다. 3년 뒤 그는 무함마드 레자 샤 팔라비 치하의 수상직 입후보하였으나, 이브라임 하키니에게 한 표 차이로 패하였다. 1949년 무사디끄는 국민 전선당을 공동 설립하였다. 무사디끄는 영국인 소유의 석유 회사인 영국-이란 석유 회사가 가지고 있던 석유 채굴권을 국영화 하였고, 이로 인해 그의 대중적 인기가 증가 하였다. 1951년 4월 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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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목
<ㄱ> 가쉬미 - 국제연합안전보장이사회 결의안 598
<ㄴ> 나본 - 노루즈
<ㄷ> 다국적군 (레바논내) - 딤미
<ㄹ> 라디노어 - 레바논-이스라엘 평화협정 (1983)
<ㅁ> 마나마 - 무사디끄
<ㅂ> 바그다드 - 베이루트
<ㅅ> 사나 - 샤레트
<ㅇ> 아구다트 이스라엘 - 아랍-이스라엘 전쟁
<ㅈ> 자이드파 - 중동평화회담 (마드리드 1991)
<ㅊ> 천연가스 - 총인민회의(예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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