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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ㅂ> 바그다드 - 베이루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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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그다드 Baghdad :

이라크의 수도. 인구 7백여만 명(2011년 기준). 티그리스 강변에 위치한 바그다드는 무역과 관광의 중심지였다. 역사에 따르면 칼리파 만수르(Mansur, 754~75)가 이 도시를 건설한 것으로 전해진다. 이 도시는 칼리파 하룬 알 라쉬드(Harun al-Rashid, 786~809) 치하에서 전성기를 맞았으며, 당시 상황은 천일 야화에 잘 묘사되어 있다. 바그다드는 836년경, 압바스 왕조의 수도가 사마라(Samara)로 이전함에 따라 쇠퇴기에 접어들었으며, 892년까지 계속되었다. 바그다드는 1258년 몽골의 침략을 목격했고 이 사건으로 압바스 왕조는 그 화려한 막을 내린다. 1400년에는 티무르의 침략을 받았으며 1524년에는 페르시아의 이스마엘(Shah Ismail)의 통치를 받게 되었다. 1638년에는 오스만 터키제국의 점령 하에 놓이게 되었으며, 당시 인구는 15,000명을 넘지 않았다.
1918 년 오스만제국이 멸망하고 뒤이어 메스포타미아와 모술 지방을 포함하는 이라크가 건국되었고, 바그다드는 이라크의 수도가 되었다. 이라크는 중동 산유국 중 한 국가로서 자연히 경제는 석유 수출에 크게 의존하게 되었다. 바그다드는 상업 이외에도 산업, 운송, 금융의 중심지였다. 1970년 중반 석유 수입이 증대되자 바그다드는 근대화에 박차를 가하게 되었다. 1980∼88년 이란-이라크 전쟁에서 바그다드는 이란의 공습의 주요 목표로서 지대지 미사일 공격이 집중되었던 지역이다. 6주간 계속되었던 걸프 전쟁 당시 막대한 손해를 입었다.
관광지로는 무스탄시리야 대학(Mustansiriya) 법과대가 있으며 13세기 중엽 지어진 압바스 궁이 있다.


*바니-사드르, 아불 하싼 Bani-Sadr, Abulhassan (1933∼) :

이란정치가, 1980년부터 1981년까지 대통령 역임. 하마단에 있는 종교가문에서 태어난 바니 사드르는 테헤란에서 대학교육을 받았으며, 경제학, 사회학, 그리고 이슬람법(참조) 등을 전공했다. 그는 국민전선에 동조적이었다. 1963년 6월에 반정부시위에 참여한 그는 4월 징역형을 선고받았다. 그는 파리에 있는 소르본대학에서 장학금을 받았다. 그는 사회학뿐만 아니라 경제학분야에서 박사학위를 획득했으며, 그 후 파리에 줄곧 머물렀다. 그는 1972년 부친의 장례식 참석 차, 이라크에 있는 나자프를 방문했을 때, 아야톨라 루홀라 호메이니와 회담을 가졌다. 바니-사드르는 그 때 파리에 있는 이슬람학생회(ISS)와 유대를 강화했다. 호메이니가 1978년 10월 초 이라크로부터 파리에 도착했을 때 바니-사드르는 아야톨라의 비공개 자문위원의 한 일원이 되었다. 6개월 후 호메이니와 고국으로 돌아온 그는 이란의 경제 정책을 입안하는 주요 설계자가 되었다. 그는 이슬람혁명이라는 신문을 통해서 급진정책을 추구했고 11월초에 마흐디 바자르간 정부의 몰락을 보고 매우 기뻐했다.
새 내각에서 바니-사드르는 재정경제부장관이 되었다. 그는 전문가회의 일원으로서 헌법에 통합된 권리장전을 획득하는데 성공했다. 호메이니의 지지를 통해서 1980년 1월에 실시한 대통령선거에서 총 투표의 75%를 획득한 바니-사드르는 그의 능력을 높이는데 성공했다. 호메이니는 그를 군사령관으로 임명했다.
1980년 9월 이라크와의 적대감이 폭발하자, 바니-사드르는 자신의 정적이자 의회 다수당이었던 이슬람공화국지도자들에 의해 전쟁 운영 문제에 있어 비판을 받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그는 의회를 떠맡았던 무함마드 알리 라자이 수상과도 충돌했다. 처음에 호메이니는 양측 간 중재를 위해 노력했으나, 바니-사드르가 아야톨라가 탐탁하게 생각하지 않았던 무자헤딘 칼끄당과 가까워지자, 호메이니는 1981년 6월 20일 그의 입장을 바꿔서 바니-사드르를 대통력직에서 해임했으며, 이란의회는 바니-사드르를 무자격자로 평결했다. 결국 바니-사드르는 지하로 숨어들었으며, 당시 무자헤딘의 지휘관인 마수드 라자비와 함께 프랑스로 도주했다.
바니-사드르와 라자비에 의해 형성되었던 국민저항회의(NRC)는 암살과 테러를 성공적으로 조종했다. 그러나 라자비가 이란과 피비린내나는 전쟁을 벌이고 있었던 이라크와 협력하기 시작하자, 바니-사드르는 1984년 4월에 라자비와의 관계에 금이 가게 되었고 NRC의 활동을 정지했다. 그는 파리근교에서 독립적으로 자신의 정치활동을 계속했다.
바니-사드르는 혁명 발발 전 출간되었던 『신성한 통합의 경제학』에서 자본주의와 소비에트사회주의를 거절했던 이슬람경제를 상술했고, 이슬람교리는 정의롭고 평등한 사회의 한 수단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내가 말할 차례』에서 그의 마지막 정치경험들을 요약하기도 했다.


*바레인 Bahrain :

공식명: 바레인 왕국(Kingdom of Bahrain)
수도: 알마나마(Manama)
면적: 760㎢
인구: 124만 명(2012년 추산)
국내총생산(GDP): 270억 달러(2012년 추산)
화폐: Bahraini Dinar(BHD)
정부 형태: 입헌군주제
국교: 이슬람교
행정 지역: 5개의 행정 구역으로 나뉨(Capital, Central, Muharraq, Northern and Southern)
헌법: 바레인의 통치자는 외교와 국방을 담당하는 영국과 바레인의 1892년 협정이 파기됨에 따라 1971년 8월에 군주(원수)가 되었다. 부분적으로 선출된 헌법의회에 의해 입안된 헌법은 제한된 선거권 하에서 선출된 30명의 대의원과 함께 42명의 국민의회를 명시했다. 1973년 12월에 선출된 첫 번째 의회는 1975년 8월에 해산되었고 헌법은 중지되었다.
자문의회: 아랍어로 마즐리스 알 슈라(Majlis al-Shura)라 불리며 1993년 1월 시작되었다. 평의회는 통치자에 의해 임명된 30명의 자문위원으로 구성되었다. 자문회의의 성격은 자문기구로서 입법권은 없다.
민족구성: 아랍인77%, 남아시아인13%, 이란인8%, 유럽인3%, 기타 1%
집행기관(행정당국): 통치자가 행정당국을 지배한다. 통치자에 의해 임명된 각료회의 의장인 수상은 일반 국가 행정을 경영하는 책임을 맡고 있다.
역사(대략 1900년부터): 1983년부터 바레인의 33군도를 통치했던 칼리파 왕조는 1861, 1880, 1892년 바레인을 영국의 보호령에 두며, 페르시아만에 영국의 행정구역을 기지화 한다는 안에 영국과 서명했다. 1932년에 바레인은 걸프 지역 국가들 중 최초로 원유를 발견한 국가가 되었다.
한편 1930년대 말, 석유노동자들이 노동조합 결성을 시도를 했으나 결국 실패했다. 1956년 영국, 프랑스, 그리고 이스라엘이 함께 이집트를 공격했던 시기에, 바레인은 수에즈전쟁으로 반영시위가 불붙었다. 이 사건을 계기로 바레인 국민은 그들의 높은 정치의식을 보여주었다. 1961년 쉐이크 이사 알칼리파가 즉위한 후, 정치개혁을 요구하는 시위가 일어났다. 이 사건 또한 1965년에 있었던 석유노동자파업과 함께 실패로 돌아갔다. 1970년에 가서야 통치자는 12명으로 구성된 국가자문회의를 구성하는 미봉책을 썼다. 1971년에 영국이 바레인을 떠날 준비를 함에 따라 그는 그 회의를 내각으로 변화시켜 헌법의 틀을 만드는 일을 맡겼다. 1972년 3월과 9월에 일어난 심각한 폭동과 파업이 쉐이크 이사로 하여금 헌법을 입안할, 1/2은 선출되고 나머지 1/2은 지명된 42명으로 구성된 헌법의회를 인정하게 만들었다. 이 선거는 1972년 12월 제한된 선거권 하에서 치러졌다. 헌법의회는 1973년 6월에 족장에게 헌법초안을 제출했고 그는 그것을 승인했다. 같은 해 12월에 국민의회선거가 제한적인 선거권 제도 하에 치러졌으나 그 족장은 의회를 해산했고 1975년 8월에 헌법을 중지했다.
바레인은 국민의 70%가 쉬아파로 구성되어 있으며, 1979년 대다수가 쉬아파인 이란에서 일어난 이슬람혁명에 많은 영향을 받았다. 그래서 이슬람 야당이 바레인을 이슬람 공화국으로 선포할 것을 요구했을 때 순니파인 쉐이크 이사는 난색을 표명했다. 1981년에 바레인은 걸프협력회의(GCC)의 한 일원이 되었다. 이듬해 초 정부는 쿠데타를 모의했다는 명분으로 60명을 체포했다. 이란-이라크 전쟁 기간 동안 바레인은 이라크 편을 들었다. 쿠웨이트위기(1990~91)동안 바레인은 쿠웨이트를 확실히 지지했다. 나날이 증가하는 개혁욕구에 대한 응답으로 바레인 족장은 1993년에 30명의 자문 위원을 임명했다. 이것으로도 부족해서 1994년 12월에 범국민적인 반정시위가 해산된 의회복구를 요구하는 항의와 함께 발발했다. 정부의 지속적인 탄압에도 불구하고, 바레인 이슬람자유전선에 의해 부분적으로 폭력적인 대 정부 시위가 일어났으나, 1995년 3월에 대규모의 체포와 통행금지 조치가 다시 취해졌다. 1995년 4월에 소동이 일어나 12명의 종신형을 주장했고, 많은 수가 부상당했으며, 1,600명 이상이 구금되었다.
입법부: 1975년 국민회의의 해산과 헌법정지와 더불어 입법권이 통치자에게 귀속되었다.
종교구성: 무슬림85%, 기독교7%, 그 외8%. 무슬림 중에는 쉬아파70%, 순니파30%이고 칼리파왕조는 순니파이다.


*바레인 군사력 Military in Bahrain (1994) :

총 군사 병력 8천 1백 명: 현역 8천 백 명.
GDP 대비 군사비 지출 4.5% (2006).
육군(지상군) : 정규군, 현역 6천8백 명.
사용무기: 탱크 80대, 장갑차 235대, 주포 33문.
공군: 정규군 7백. 사용무기: 전투기 24대, 전투 헬리콥터 17대.
해군: 정규군 6백. 사용무기: 순시 연안 전투함 10척.

* 바레인의 석유와 가스산업 Oil and gas industry, Bahrain
석유 매장량 124.6 million bbl (1 January 2011 est.) 66위
가스 매장량 92.03 billion cu m (1 January 2011 est.) 57위
석유 생산량 46,430 bbl/day (2010 est.) 63위
가스 생산량 12.58 billion cu m (2009 est.) 38위
1929년 캘리포니아의 스탠다드 석유 회사(Standard Oil Company)가 바레인 석유 회사(Bahrain Petroleum Company, BAPCO)를 세우기 위해 텍사스 회사(Texas Company)와 합병하면서, 영국령의 캐나다에 회사를 등록하였다. BAPCO는 1932년부터 바레인에서 석유의 상업적인 생산을 시작했다. 석유 생산량은 1940년 하루 19 000 배럴에서 1970년에는 77 000 배럴로 증가했다. 1990년대 초에는 하루에 42 000 배럴로 생산량이 감소하였다. 이 같은 생산 속도로 석유를 생산 할 경우 1990년대 후반까지 석유 생산이 가능할 것이라 예상 되었다. 가스 생산량은 1980년대 하루 2천만 세제곱미터씩 생산하였으며, 이 같은 생산량이 유지 된다면, 2017년까지 가스 생산이 가능할 것이라고 예상되었다. 바레인은 아랍 석유 수출국(Organization of Exporting Countries, OAPEC)기구의 창립 국가 중 하나였다.

*바르자니 마수드 Barzani, Masud (1947∼) :

이라크의 쿠르드계 지도자. 바르자니는 그의 아버지인 무스타파가 지휘하는 마하바드 쿠르드 공화국이 붕괴되는 격동기에 태어나 모스크바에서 자랐다. 1958년에 쿠르드 공화국의 공격기간의 2년 동안 바그다드에 머물다가 그의 가족은 바르잔(Barzan)으로 되돌아온다.
1970년, 그의 형인 우바이둘라(Ubaidullah)가 바그다드 정부로 망명함에 따라 그의 아버지의 정치적, 군사적 지휘권은 전적으로 바르자니와 그의 동생, 이드리스(Idris)에게 넘겨졌다. 1976년, 무스타파가 미국으로 이주하면서 쿠르드 민주당의 지도권은 그와 그의 동생이 맡게 되었다. 1979년, 이슬람 혁명이 일어난 후 그들은 이란으로 탈출하여 이란 측의 원조를 받게 되었다.
이란-이라크 전쟁이 일어났을 때 이라크 정부는 쿠르드 지역에서 군대를 철수할 수 밖에 없었다. 이로써 이라크 국경지역의 쿠르드 민주당의 세력 하에 있던 지역은 팽창하였다. 그는 1986년에 테헤란에서 열린 이슬람 혁명의 최고 회의에 참석하였다.
1987년에 동생인 이드리스가 사망하자, 바르자니는 쿠르드 민주당(KDP)의 유일한 지도자로 자리 잡았다. 이란-이라크 전쟁동안 쿠르드 민주당은 이라크와 이란의 경계 근처에서 그들의 자유 지역을 확장하였다. 이란-이라크 전쟁이 끝난 후에는 이라크의 후세인은 쿠르드 민주계의 근거지에 대하여 보복하였다. 후에, 이라크 군대가 제2차 걸프 전쟁에서 패하게 되자, 쿠르드 반란군은 중앙 정부에 반기를 들며 저항했다. 이라크의 억압에 따라 많은 쿠르드족은 터키와 반이라크 국가로 이주하였다. 바르자니의 이라크에 대한 평화 노력은 실패하였다.
1992년 5월, 연합국의 보호아래서 치루어진 의회 선거에서 바르자니는 쿠르드 애국연합(PUK)의 지도자인 잘랄 탈라바니(Jalal Talabani)와 동등하게 세력을 공유하게 되었다. 그러나 2년 후에 쿠르드 민주당과 애국연합의 협정은 깨지고 두 당은 충돌하였다. 1998년, 클린턴은 두 지도자를 워싱턴에 초청하여 화해를 종용했고 사담 후세인 축출투쟁 방안을 논의했다.


*바르자니 무스타파 Barzani, Mustafa (1903∼1979) :

이라크 쿠르드 민족의 지도자. 바르자니는 바르잔(Barzan)의 명문 가문에서 태어났다. 그는 이라크 북부지역에서 바르자니 부족의 지도자로 성장했다. 바르자니 가문은 전통적으로 모술(Mosul)과 바그다드(Baghdad)에 기반을 둔 정부의 권위에 대해 적대적이었다. 바르자니는 그의 형 아흐마드(Ahmad)와 함께 1931∼1932년 쿠르드 독립투쟁에 참가하였다. 그러나 1935년 이 투쟁이 진압되면서 이들 형제는 술레이마니아(Suleimaniah)로 추방되었다. 바르자니는 1942년에 탈출에 성공하여 또 다른 독립 항쟁에 참가하였지만, 결국 실패하였다.
바르자니는 1천 명의 무장병력과 함께 이란의 쿠르드 지역(테헤란의 북부지역, 1941년 이후 소련의 점령 하에 있었음)으로 이동하였다. 1945년 쿠르드 주(州) 공화국이 그곳에 설립되자, 바르자니는 1천 명의 무장병력의 수석 지휘관으로 임명되었다. 1946년 5월 소련이 철수함에 따라, 이 공화국은 쿠르드 민주당(KDP)에 의해 통치되지만, 그 해 12월, 이란 정부에 의해 공화국은 붕괴된다. 1947년 6월 바르자니는 부하들과 함께 이란 국경을 넘어 소련의 트랜스 코카서스(Trans-Caucasia)로 건너가고, 모스크바의 어학원에 입학한다.
1958년 이라크의 독재자에 대한 습격이 일어나자, 바르자니는 이라크로 돌아가서 KDP를 합법화한 압둘 카림 카심 밑에서 새로운 정권을 창출하였다. 그러나 바르자니가 제출한 자치 단체에 관한 계획을 카심이 거부하자, KDP는 반란을 일으켰다. 1961년 9월 카심이 쿠르드 반군에 대해 공격을 개시한 이후, 이라크 정부 내의 변화에도 불구하고, 중앙정부와 바르자니의 관계는 개선되지 않았다.
1970년 3월에 양측은 합의를 도출하였고, 이 합의는 4년 간 이행되었다. 이 협정에는 쿠르드족을 아랍민족과 동등하게 대우해 줄 것, 쿠르드 지역에서는 쿠르드어를 공용어로 할 것 등 쿠르드인의 요구사항을 포함하고 있다. 그러나 양측간에 불신이 깊어서 결국 협정은 유지되지 못한다.
1974년 3월 바르자니는 다시 한번 이라크 정부와의 전쟁을 벌였다. 이 시기에 그는 이란의 무함마드 레자 샤 팔레비 왕으로부터 실질적인 지원을 받고 있었다. 당시 무함마드 팔레비는 이라크의 친소련 정권이 약해지기를 원했다. 1975년 초에 이 전쟁은 점차 이란과 이라크간의 전면전으로 확대될 기미를 보였다. 1975년 3월, 전쟁을 피하기 위해 이란과 이라크는 바르자니의 부대에 대한 이란의 병력 및 병참 지원을 중단한다는 협정을 맺었고, 결국 바르자니의 반군은 실패하였다. 이란을 탈출한 바르자니는 미국의 버지니아 북부에 정착하였고 1979년에 사망하였다.


*바비 종파 Babis :

이슬람 종교 집단. 1844년 5월 20일 바비 종파(Babis)가 생겼는데 당시 알리 무함마드 쉬라지(Ali Muhammad Shirazi, 1819∼1850)는 자신을 숨겨진 이맘(Hidden Imam)에 이르는 문이라고 선포했다. 그는 쉬라즈(Shiraz) 출신으로 쉬아파의 중심이었던 나즈프와 카르발라에서 이론신학을 공부했다. 그는 설교 중 예언에 대해 언급했으며 모든 예언자들은 늘 새로운 예언을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자신을 예언자라 주장하면서 바얀(Bayan)이라는 책을 저술했으며, 여기서 꾸란의 예언과는 다른 새로운 예언을 했다. 이 때문에 이슬람교도인들이 그를 배척하였으며 그의 추종자들인 바비 종파 추종자들은 1848년 이슬람교에서 개종을 하였다. 그는 1850년 7월 9일 순교하였는데 이유는 사도 무함마드가 알라 최후의 선교자라는 사실을 거부했기 때문이다. 순교 몇 년 후 이란 정부는 바비 운동을 탄압하기 시작했다.


*바빌론 Babylon :

이라크 도시. 1991년 기준으로 인구 15,000명.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도시 가운데 하나이며 유프라테스 강변에 자리하고 있다. B.C. 4000년경에서 약 1000년 동안 바빌로니아 (Babylonia)의 수도였다. 힐레(Hilleh)근처에 있는 고대 유물은 1899∼1914년 독일 고고학자들이 발굴한 것으로 바빌론의 번영과 네브차드네자르(B.C. 605~562) 왕의 세력을 가늠케 해 준다. 당시 바빌론은 200에이커/1000헥타에 달하는 최대 규모의 도시였다. 네브차드네자르는 영생을 얻기 위해 사원을 건설하였다. 또 바벨탑을 짓는데 건물마다 바빌론의 왕이라는 글을 넣으라고 명령했다. B.C. 539년 사이러스 대제 치하의 페르시아인들에게 정복당했을 때도 역시 바빌론은 세계 최대의 도시였으며 기원전 331년 알렉산더 대왕은 바빌론을 정복하고 네브차드네자르의 궁전에서 생을 마감했다.


*바스라 Basra :

이라크의 도시, 인구 180여 만 명. 샤트 알 아랍(Shatt al Arab) 근처에 위치한 바스라는 고대부터 주거지역이었다. A.D. 636년 칼리파 오마르(재위 A.D. 634∼44)는 바스라의 전략적인 위치를 고려하여 이곳에 군사기지를 설치했다. 아랍 무슬림이 페르시아의 사산왕조 통치자에 대항하여 바스라 지역에서 작전을 펼쳤다. 이곳은 문학과 과학, 상업, 재정의 중심지로 성장하였다.
8세기 초, 바스라에서 다마스커스에 기반을 둔 우마이야드 칼리파에 대항하는 반군이 조직되었다. 750년 압바스조가 우마이야조를 물리치고 바스라를 넘어 바그다드에 정착했다. A.D. 923년 호전적인 까르마트 무슬림에 의한 공격으로 바스라는 심각한 피해를 입었다. 13세기에는 몽골의 침략에 의해 심한 타격을 입고 결국 멸망하였다. 15세기 초, 샤트 알 아랍에서 가까운 곳에 바스라라는 이름의 새로운 도시가 형성되어 번성하였다.
최근에는 바그다드에서 남이라크의 유전으로 연결된 철도가 이곳의 부(富)를 증폭시키고 있다. 그러나 1980년, 이란-이라크전쟁이 발발하자, 이곳은 전선(戰線)에 위치한 도시가 되었다. 1987년 이란의 공격에서 시청이 포격 사정거리 내에 위치하게 되어 심한 손상을 입었고, 인구의 2/3가 이 곳을 떠났다. 2차 중동전쟁 기간에는 쿠웨이트 전선과 가까이 위치하고 있어서, 공중 폭격 및 미사일에 의해 타격을 입었다.


*바아스 사회당 Bath Socialist Party :

범아랍 정당. 공식명칭은 아랍 바아스 사회당(Arab Baath Socialist Party)으로 1954년 3월 다마스카스에서 결성되었으며 아랍 바아스당(Arab Baath Party)과 아랍 사회당(Arab Socialist Party)이 합당한 것이다. 이 당의 기본 강령은 아랍 국가통합과 자유이며 식민주의를 종식시키고 인도주의를 주창하는 것을 아랍의 사명으로 여기고 있었다. 이러한 목적을 성취하기 위해 당은 민족주의자, 사회주의자, 그리고 개혁주의자로 구성되어 있었다. 계급의 분열을 거부하고는 있었지만 토지 개혁을 단행하였으며 자연 자원, 교통, 대규모 산업, 금융 기관, 농민 및 근로자 노조 등 국유화에 앞장섰으며, 동시에 상속과 재산 사유화에 반대하였다. 당은 정부의 입법기능과 대표 기능을 수행하고 있었으며 언론의 자유와 아랍 국가들의 단결을 주장하고 있었다.
바아스 사회당(Baath Socialist Party)에 따르면, 아랍인들은 현재 몇 개의 지역으로 나뉘어 있지만 하나의 단일 국가를 형성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따라서 민족사령부(National Command)의 지휘 하에서 전 아랍국가들이 단결하여야 하며 이 통치자는 중앙 통제 기구의 역할을 하고 있다. 민족사령부 아래에는 지역사령부가 자리잡고 있었고 그 아래는 지부, 그리고 지소(支所)로 구성되어 있고, 제일 하부 조직은 3인으로 구성된 부서가 있다. 민족사령부는 1966년까지 다마스커스에 자리 잡고 있었지만 그 해 민족사령부에서 분열된 조직이 발생해 베이루트(Beirut)에 자리잡게 되었다. 1968년 7월 이라크, 그리고 바그다드에서 군사 쿠데타가 일어났다.
이라크의 바아스 사회당은 1950년 아랍 바아스당(Arab Baath Party)으로 시작하였으며, 1954년에는 208명의 회원을 가지게 되었다. 1955년 말, 최초의 비밀 지역 의회를 개최하여 다른 민족주의 집단들과 협력할 것을 다짐하였다. 또한 1958년, 왕정을 전복하는 군사 쿠데타에 참가하여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였다. 하지만 압둘 카림 까심(Abdul Karim Qasim)이라는 새로운 지도자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당은 점차적으로 세력을 확대시켜 갔으며 바아스 주의자들과 비바아스 동조자들은 1963년 2월 까심(Qasim)의 세력을 무너뜨리기 위해 850명의 회원과 15만 동조자들을 활발히 움직였다. 바아스주의자들은 일단 권력을 차지한 후 자체적으로 붕괴를 맞이하였고 이로 인해 1963년 11월 비바아스주의자인 압둘 살람 아리프(Abdul Salam Arif)가 권력을 찬탈하였다.
1967년 6월 이라크 국왕인 압둘 라흐만 아리프(Aabdul Rahman Arif)가 아랍-이스라엘 전쟁에서 패배하자, 바아스주의자들은 대중적 지지를 다시금 차지하게 되었다. 1958년 7월 중반바아스주의자들과 비바아스주의자들은 힘을 합해 아르프(Arif)를 전복시키는데 합의하였으며 이후 바아스주의자들은 비바아스주의자들을 제외시키고 권력을 장악했다. 당시 바아스당은 5,000명이 활동하고 있었다.
5인으로 구성된 혁명최고회의(RCC)는 아흐마드 하산 바크르(Ahmad Hassan Bakr) 대통령을 선두로 사회의 기타 세력과 세력을 합했다. 1970년 7월, 중도 헌법은 RCC가 당의 지역 지도자를 선출하는데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다고 선포하였다. 또한 군, 경 그리고 지식인에 절대 권력을 휘둘렀으며 당의 민병대를 구성했던 사담 후세인은 1969년 11월 RCC 의석을 차지하였다. 그는 당의 개혁과 권력 강화를 위해 많은 노력을 했다. 지지세력 확충을 위해 RCC는 민족진보 애국전선(National Progressive and Patriotic Front)을 1973년 7월 지지하였고 세력 기반의 상부에는 바아스당이 있었다.
1980년부터 1988년까지, 이란-이라크 전쟁을 계기로 바아스당은 많은 변화를 겪었다. 즉 바아스 사회주의가 축소되었으며 민간 분야는 공공분야를 희생한 대가로 많은 성장을 했다. 범아랍주의는 이라크의 민족주의 세력보다 약화되었고, 이라크 민족주의는 시민들을 부추겨 전쟁을 시도하였다. 1990~91년, 쿠웨이트 침공 당시 당은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였으며 1991년 제 2차 걸프전에서 이라크가 패배하자 이라크 제국은 당의 열성에 많은 의지를 하였다. 이라크에 대해 유엔이 경제적 제재 조치를 실시하자 생활고를 겪게 되었으며 정부는 당의 충성을 강조했다. 1980, 84, 89년 의원 선거에서 바아스당은 183, 188, 138 의석을 각각 확보하였다.


*바아스 사회당, 레바논 Baath Socialist Party, Lebanon :

레바논의 바아스 사회당은 1948년 결성되었으며 1949년 외부 세력과 어떠한 종류의 관계도 금지하는 법이 통과되었다. 1958년 레바논 내전이 종식되자 바아스당은 베이루트에서 제4차 국민 의회를 만들었다. 1968년에도 역시 범아랍당에서 친아랍 세력이 탈퇴하자 이러한 국민 의회를 만들었다. 이와 같은 금지 조치가 해제된 후 바아스당은 합법적인 기관으로 활동할 수 있게 되었다.
1975년 4월 레바논 내전에서 시리아는 레바논 바아스당 결성을 지지하였으며 자체적인 민병대를 설립하였다. 1987년 7월에는 통일∙해방전선(Unification and Liberation Front)에 가입하였다. 2년 후, 아민이 이끄는 이 정당은 레바논 민족전선(Lebanese National Front)에 가입하였는데 LNF는 14개의 레바논 단체와 4개의 레바논에 본부를 둔 팔레스타인 단체와 함께 활동하였으며 종파체제를 초월하고 이스라엘군의 철수와 함께 미셀 아운(Michel Aoun)의 세력을 종식시켰다. 1990년 12월, 민족통일 정부가 형성되었으며 아민(Amin)이 주요 자리를 차지했다.


*바아스 사회당, 북예멘 Baath Socialist Party, North Yemen :

1955∼56년, 북예멘에서 바아스 사회당이 형성되었으며 1970년 예멘 내전 종식 후, 북예멘은 이라크의 상당한 지지를 받았다. 또한 이로 하여금 이라크의 바아스주의자들은 북예멘에서 당을 창설하려 세력을 확충하고 있었다. 이브라힘 함디(Ibrahim Hamdi) 대통령은 온건주의자들과 좌익 세력이 비밀 세력으로서 활동할 수 있도록 허가를 내렸으며 이로 인해 그는 친사우디 보수주의자들을 상대할 수 있었다. 1976년 바아스당은 좌익인 인민 연합 민주당 그리고 아랍 민족주의 운동을 실천하였던 혁명 민주당과 결탁하여 국민 민주 전선을 형성하였다.
남예멘의 바아스당은 1955~56년, 남예멘에 설립되었다. 1967년 독립 후, 당은 공개적인 활동을 할 수 있었으며 남예멘이 이라크의 원조를 받게 되자 바아스당의 미래는 보장된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후일 여당인 국민 자유 전선이 모든 당들은 연합 정치 기구인 민족 전선 산하에 놓고 예멘 사회당을 1978년 설립하려 하자 바아스 지도자들은 당을 해체하였다.


*바아스 사회당, 시리아 Bath socialist party, Syria :

시리아에서는 도시에 지지 기반을 두고 있는 아랍 바아스당이 아랍 사회당의 농민당원들을 흡수하여 바아스당을 설립하였다. 하지만 1958년 통일아랍공화국(UAR)이 설립되자 자말 압둔 나세르 대통령은 시리아의 바아스당을 억압하였다. 시리아군이 나세르 정권에 대항하여 1961년 반란을 일으키자 시리아는 UAR에서 탈퇴하게 되었다. 하지만 시리아의 탈퇴는 바아스당이 주장하는 범아랍주의에 위배되는 것이었다.
당이 1963년 3월 권력을 장악하자 두개의 당파가 생겼다. 하나는 마르크스주의에 반대하는 것으로 미셀 아플락이 이끄는 우익이었으며 또 하나는 급진적 군사 집단으로 살라흐 자디드 장군이 이끌고 있었다. 이들 사이의 갈등이 계속되자 1966년 초, 급진주의자들은 전권을 장악하고 아플락을 망명 보냈다. 이들의 승리를 이끈 것은 하피즈 알아사드 장군이 군사적인 지원을 했기 때문이었다.
1967년 6월, 시리아가 아랍 이스라엘 전쟁에서 패배하자 두 당파사이의 갈등이 다시 표면화되었다. 자디드가 이끄는 정치 세력은 골란고원 해방과 함께 경제 발전을 주창했다. 군 내에서는 아사드를 중심으로 정책을 전환시켜 시리아를 고립으로부터 벗어나게 하자고 주장했다. 국방부 장관인 아사드는 군내에서의 정치 세력을 줄이려 했지만 자디드 당파로부터 권력을 빼앗는데는 실패했다.
1970년 9월, 아사드는 PLO-요르단 전투에서 공군을 지원하는 문제를 반대했는데 이로 인해 당과 정부사이에 분열이 생겼다. 11월, 다마스커스에서 열린 회의는 이러한 문제에 대한 해결을 찾지 못했으며 아사드는 반란을 일으켜 군과 당 지도자를 잡아들였다. 그는 1972년 3월 국민 진보 전선의 다른 당파사이에 권력을 분립시켰다.
아사드가 1976년 6월 레바논 내전에 우익을 지지하였는데 이 때문에 당내 많은 갈등이 있었다. 그는 이를 알고 입장을 설명하려 하였으며 당내 부패가 심각한 수준이라고 생각하고 1979년 말 특별 위원회를 소집하여 문제를 시정하려 하였다. 당내 지역 지도자가운데 2/3를 교체하였으며 부패를 막기 위해 위원회를 두었다. 1980~82년 야당인 무슬림 형제단의 무력 시위를 벌이자 당은 정권을 지키기 위해 이들과 싸웠으며 또한 아사드는 1990~91년 쿠웨이트 침공 당시, 사우디아라비아와 미국의 입장에 섰다. 이 문제를 놓고 당내에서는 말이 많았지만 1990년 10월 내전이 끝나자 아사드가 레바논에서 시리아의 입장을 정리하자 문제가 해결되었다. 1994년 바아스당 총선에서 민족진보전선 회원들은 절반 이상의 의석을 차지하였다.


*바아스 사회당, 요르단 Baath Soialist Party, Jordan :

요르단의 바아스는 아랍 바아스당에서 갈라져 나온 것으로 1948년 비밀리에 결성되었다. 또한 1959년, 서안 지방이 하쉼가 왕국에 합병되는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민족주의자들과 좌익을 연계시켰으며 술레이만 나불루시가 지도자로 선출되었다. 1956년, 의회 선거에서 이들 연합은 1956년, 의회 내에서 중요한 세력으로 부상하였다. 이들 지도층은 도시의 지식층이었으며 교사와 학생들이 세력 기반의 중추가 되었다. 후일 1957년 모든 정치 활동을 금지하는 법에도 불구하고 바아스는 비밀 활동을 계속하였다. 1958~61년 바아스는 통일아랍 공화국(UAR)의 도움을 받아 왕정 타파 노력을 계속하였다. UAR의 세력이 몰락하자 시리아의 바아스주의자들은 1963년 권력을 장악하고 지지기반을 다지기 시작했다. 1967년 6월, 이스라엘이 서안 지방을 점령하자 바아스는 요르단에서 급격히 세력이 감소하였으며 이 후 회복하지 못했다.


*바알벡 Baalbek :

레바논의 마을. 2만여 명의 인구를 가진 바알벡은 태양신(Baal 혹은 Bel)을 숭배하기 위한 고대 도시였다. 그리스어로 태양신의 도시, Heliopolis라는 뜻이다. 기원전 332년 알렉산더 대왕이 시리아를 정복하던 당시 발생한 도시이며 알렉산더 대왕이 죽자, 바알벡은 톨레미 왕조(Ptolemies), 셀루시드(Seleucids)와 로마(Romans)의 지배를 받게 되었다. 바알벡은 637년 이슬람 칼리프의 통치하에 놓이게 되었으며 1918 년 오스만제국이 점령할 때까지 이러한 상태가 계속되었다. 20세기 말 2개의 로마 사원이 발굴되었는데, 하나는 목성, 금성, 수성에 바치는 것이었으며 다른 하나는 바커스 신(Bacchus)에 바치는 것이었다.


*바자 bazaar :

페르시아어로 시장의 의미. 바자르라는 단어는 이란에서 기원이 된 말로 아라비아, 터키 북아프리카와 남아시아에까지 널리 퍼진 말이다. 이슬람교의 창시자인 예언자 무함마드 역시 상인이었으며 그 때문에 시장과 사원 사이에는 어떤 친근감마저 존재한다. 현대에 와서 바자르는 1979년에 이란에서 있었던 이슬람 혁명을 일으키는데 특히 중요한 역할을 하기도 하였다.


*바자르간, 마흐디 Bazargan, Mahdi (1905∼1995) :

이란의 정치가, 수상. 타브리즈(Tabriz)에 있는 부유한 상인 가문에서 태어난 바자르간은 파리 대학에서 공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그 후 몇 년간을 파리에서 더 지낸 후 1941년 귀국하여 테헤란 대학에서 공학을 가르치기 시작하면서 정당에 가입하였다. 1949년에 이 정당은 다른 두 곳과 합쳐져서 무함마드 무사디끄(Muhammad Mussadiq)를 지도자로 하는 민족전선당을 만들었다.
무사디끄가 수상으로 재임하고 있던 1951~1953년 동안 그는 새로이 국유화되는 석유 산업의 감독관이 되어 국영 이란석유회사를 경영하였다. 하지만 1955년 3월에 그는 반역죄로 체포되어 1960년까지 5년간의 복역한 후, 그는 아야톨라 마흐무드 탈레까니(Ayatollah Mahmud Taleqani)와 함께 1961년에 이란 해방운동(Liberation Movement of Iran: LMI)을 조직하였다. 그러나 또다시 그는 1963년에 정부의 승인을 받은 “백색 혁명(White Revolution)” 투표에 대해 보이콧을 선동하였다는 죄목으로 10년형을 언도 받았는데, 그 후 1977년도에 인권 협회의 공동 설립자가 되어 반정부 활동을 하기 전까지 그는 한동안 정치 일선에서 떠났다.
1979년 2월 1일에 그는 아야톨라 루훌라 호메이니(Ayatollah Ruhollah Khomeini)의 추천에 의해 임시 이슬람 정부의 수상이 되었고, 많은 중산층들에게 환영을 받았다. 하지만 그는 호전적인 일부 학생들의 미국 대사관과 대사들의 점거 및 억류 사태에 대한 책임을 지고 9개월만에 사임을 하게 되었다. 그 후 그는 자신이 회원으로 있던 이슬람 혁명 회의와 혁명군에 의해 숙청되었지만, 다음해에 의회에서 20명의 LMI 회원들의 대표로 뽑혔다. 1983년 봄까지도 그의 당은 이란-이라크 전쟁에서 이란이 1982년 중반까지 우위를 점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전쟁의 중단을 요구한 유일한 진보 정당이었다.
그렇지만 선거 운동 능력의 부족으로 그의 LMI 정당은 의회 선거에 참가를 거부당하게 되고, 1984년에도 그의 대통령 출마는 거부당하게 되었다. 호메이니는 그가 끊임없이 비판적 견해를 퍼뜨리고 있음을 부인하고, 그에게 해외 여행을 포함한 이동의 자유를 허락했다.


*바크다쉬, 칼리드 Bakdash, Khalid (1912~1995) :

시리아정치가. 다마스커스에 있는 쿠르디쉬 가문에서 태어난 바크다쉬는 다마스커스 대학에서 법을 전공했다. 그의 10대의 정치행동을 살펴보면 1936년 시리아와 레바논(참조)의 공산당사무총장이 되었다. 그는 프랑스명령으로 투옥되었고, 석방후 그는 모스크바로 가서 공산국제대학에 입학했다. 1946년 시리아 독립후, 다마스커스로 돌아왔다. 1950년대 초까지 그와 아크람 후라니는 가장 능력 있는 정치가들 중 일원으로 인정받았다. 1954년에 그는 의회에 진출했다.
1957년 이집트와 시리아사이의 통일예비회담동안 그는 연방유대를 제안했다. 이것이 거부되었을 때 시리아에 있는 모든 정당들의 해산을 기대한 그와 다른 공산지도자들은 프라하와 체코슬로바키아로 망명길에 올랐다. 바크다쉬는 통일아랍공화국으로부터 시리아가 탈퇴할 것을 요구했다 그러나 이와 같은 일이 벌어졌을 때인 1961년 9월에 시리아 새 통치자들은 그 외의 다른 어떤 공산주의 지도자들에게도 귀국을 허용하지 않았다. 1963년 3월에 권력을 잡은 바아스주의자들은 1966년 2월에 급진파 바아스주의자들의 승리가 다소 상황을 변화시켰음에도 불구하고 비슷한 입장을 유지했다. 바크다쉬가 그 해 가을, 다마스커스로 돌아왔을 때 정권은 마지못해 그가 정치성 회의를 개최하거나 연설하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그의 존재를 받아들였다.
1968년에 그는 시리아공산당의 사무총장으로 복직되었다. 4년 후, 하피즈 아사드 대통령은 광범위한 민족진보전선의 창설을 위한 바크다쉬의 제안을 수용했다. 1974년 당의 사무총장으로 선출된 그는 유스프 파이잘을 대신할 때까지 아랍세계의 가장 고위 공산주의지도자로서 그의 위치를 되찾았다.


*바크르, 아흐마드 핫싼 Bakr, Ahmad Hassan (1914~1982) :

이라크의 관료, 정치가. 1968년부터 1979년까지 대통령. 티크리트의 티크리티 가문에서 태어난 바크르는 1938년에 군대에 입대했고 4년 후 바그다드 군사관학교를 졸업했다. 그가 대통령이었을 때인 1956년에 비밀리에 바아스당에 가입했다. 그는 1958년 7월에 공화정 쿠데타를 계획했던 자유장교조직(FOO)의 지도자였다. 범아랍주의자인 그는 이라크와 이집트사이에 통합을 원했고 압둘 카림 까심에 대항한 압둘 쌀람 아리프(Abdul Salam Arif)의 편을 들었다. 유일한 지도자로 부상하는 까심과 함께 바크르는 그의 군 지위를 잃었다. 그는 1963년 2월에 까심에 대항한 바아스주의자 쿠데타에서 중요한 역할을 해서 소장으로 승진한 후, 수상이 되었다. 10월에 바아스당의 여섯 번째 민족회의에서 그는 사령관으로 선출되었다. 11월에 압둘 쌀람 아리프 대통령에 의해 그의 바아스 당정부가 해산된 후, 바크르는 몇 달 동안 계속해서 제2인자로 남았다.
1965년에 그의 바아스당의 지역통제를 담당하는 사무총장 선출은 치명적인 당 분열로 끝났다. 이것이 당과 군 지지자를 정권회복에 집중하도록 만들었다. 1968년 7월 중순에 바크르는 압둘 라흐만 아리프 정권을 전복시켜서 그를 대통령으로 만들었던 바아스주의자들과 비 바아스 단체를 이끌었다. 2주일 후, 그는 구 비 바아스당 협력자, 제1대령 압둘 라자끄 나이프를 축출했다. 새 수상이 된 이외에도 바크르는 통치하는 혁명평의회 의장과 군 지휘관이었다. 1969년에 그는 육군원수가 되었다.
가까운 인척인 사담 후세인과 함께 바크르는 장교단에서 그의 권력기반을 확대하는데 중점을 두었다. 치명적인 당 분열에서 바크르는 중간자역할을 하려고 노력했다. 그는 1970년에 반정부적인 쿠르드족들과 합의에 도달했고 3년 후, 그는 광범위한 민족진보애국전선을 시작했다. 그러나 쉬아파의 불 찬성자를 회유하고, 증가하는 이슬람부활의 파고를 당 이데올로기에 적응시킴으로써 쉬아파사이에 증가하는 불만에 대응하기 위한 그의 전략은 효과를 거두지 못했다. 떠오르는 별인 사담 후세인이 그것을 지배했다.
1977년 말에 이스라엘과 일방적인 평화를 이루기 위한 완와르 사다트 이집트대통령의 갑작스런 움직임이 바크르와 시리아대통령 하피즈 아사드를 화해하도록 이끌었다. 1978년 10월에 아사드의 바그다드방문이 그들의 공화국 통합을 다루었다. 사담 후세인이 통합에 관심이 없다고 느낀 바크르는 1979년 6월 중순에 그의 바그다드 방문동안 통합협상을 촉진하기 위한 비밀 메세지를 아사드에게 보냈다. 바크르의 움직임을 알아차린 사담 후세인은 즉시, 그에 대항하는 행동을 취했다. 한달 후, 바아스혁명 11주년 기념전야에 사담 후세인은, ‘강건한 지지기반’위에 있는 그의 모든 정부와 당의 지위로부터 바크르를 축출했다. 바크르는 치욕 속에 가택연금 된 채 그의 마지막 생애를 보냈다.


*바크티아르, 샤흐푸르 Bakhtiar, Shahpur (1914~1991) :

이란정치가, 수상(1979년). 강력한 바크티아리 부족에 속한 가문에서 태어난 그는 1940년 파리대학에서 국제법과 정치학박사학위를 취득했다. 그는 나치독일과 싸우기 위해 프랑스군에 입대했다. 1946년, 이란에 돌아온 그는 노동부에서 2년동안 일했다. 그는 무함마드 무싸디끄가 이끌었던 민족전선을 구성하기 위해 다른 두 조직과 제휴했던 세속적인 민족주의단체인 이란당에 참여했다. 바크티아르는 1951년부터 1952년까지 무싸디끄 정부에서 노동부차관으로 재직했다.
1953년 8월에 무싸디끄의 몰락과 정상적인 정치활동이 어려워지자, 바크티아르는 법집행을 철저히 했다. 이로 인해, 특히 1957년, 사베크(Sabek)라는 비밀경찰이 창설된 후, 그는 정권과 충돌하게 되었다. 1961년, 그는 잠시, 억류되기도 했다. 1977년 가을, 반정부항의가 점차 거세어지자, 바크티아르와 다른 변호사 카림 산자비는 민족전선을 부활시켰다. 무함마드 샤 팔레비가 바크티아르와 화해했다. 1978년 12월 29일에 바크티아르는 샤가 직접 휴가 차 외국에 나가고, 그가 돌아올 때, 그가 입헌 군주로서 행동한다는 조건으로 정부를 구성하는데 동의했다.
그는 파리에 있으면서 정부가 불법적이라고 선언했던 아야톨라 루홀라 호메이니와 타협을 이루려고 노력했다. 대중적 지지를 얻기 위해 바크티아르는 모든 정치범들을 석방하고 사베크를 해체하기로 약속했다. 그러나 그는 이 도박에 실패했고 민족전선이 그를 축출해버렸다. 1979년 2월 11일, 바크티아르는 파리로 도망하기 전 지하로 숨어 들어갔다.
바크티아르는 이란에 있는 이슬람정권에 대항한 1980년 7월에 있었던 실패한 쿠데타시도의 숨은 주모자였다. 그는 그때 9월에 이란을 침공하기 위해 준비하고 있었던 이라크 대통령 사담 후세인과 협력했다. 그는 1982년에 군주제의 국민저항운동을 설립해서 젊은 왕위 후보자, 레자 씨러스 팔레비의 지지했다. 1980년 그에 대한 암살 시도가 실패한 후, 바크티아르는 프랑스정부에 의해 공식적인 보호를 받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1991년 암살시도의 희생양이 되었다.


*바하이교 Bahais
종교 분파.
바하이 종교의 창시자는 후세인 알리(1817~1892)이다. 그는 테헤란 출신의 쉬아파였으며, 소브 에 아잘(Sobh-e Azal)의 이복형제이자, 바브교(Babism)의 창시자인 알리 무함마드 쉬라즈가 선택한 후계자였다. 1850년 쉬라즈의 처형 이 후, 후세인 알리는 추방당한 바그다드 바브교 공동체의 지도자가 되었다. 1863년 그는 자신을 신의 현신인, 바하 울라(Baha Ullah/ Bahaollah, 알라의 영광)로 선언하였는데, 이 같은 바하 울라의 출현은 처형된 쉬라즈에 의해서 예언된 것이었다. 모든 바브교 추종자들은 바하 울라를 섬기게 되었고, 이들을 일컬어 바하이교라고 칭하게 되었다.
바하이교는 신도들에게 일부일처제를 지킬 것과 일 년 중 19일의 금식, 그리고 매일 기도하는 것을 의무로 규정하고 있다. 바하이 공동체는 선출된 조직을 통해 운영되며, 국지적인 모임의 규모로 시작하였던 바하이 공동체의 규모는 하이파(Haifa)에 기반을 둔 유니버셜 하우스 오브 저스티스(Universal House of Justice)를 바탕으로 세계적인 규모로 성장하였다. 궁극적으로 바하이 공동체는 바하이 연합이 관리한다. 춘분일에 새해가 시작되는 바하이력은 19달로 구성되어 있고, 4일의 윤일을 포함해 각 달은 19일로 이루어져 있다.
바하 울라는 종교가 지속적으로 발전한다고 주장했다. 이와 같은 주장은 알라의 계시가 최후이자 가장 완벽한 것이라는 이슬람 전통의 관점에서 어긋나기 때문에, 이란의 성직자들은 바하이교를 이단으로 규정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하이교 신도 수는 점차 증가했다. 1930년대 초, 바하이교에 대항하는 캠페인이 발생하자 레자 샤 팔레비는 이를 해결하기 위해 바하이 학교를 폐쇄했다. 1955년에 반바하이 캠페인이 일어나는 동안, 이란 정부는 직접 바하이 지역 종교 센터를 장악하였으나, 샤는 바하이교를 이란에서 추방하고 적게는 10,000명에서 많게는 1,000,000명까지 추정되는 바하이 세력을 제거하자는 요구에는 반대하였다. 하이파에 위치한 유니버셜 하우스 오브 저스티스는 인권을 근거로 삼아 유엔에 호소했으며, 유엔 이란 대사는 이란 내에는 바하이교도들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1977년에서 1978년 일어난 이슬람 개혁운동의 압력을 이기지 못한 샤는 법무장관, 아미르 압바스 호베이다(Amir Abbas Hoveida)를 해임하고 바하이교 신도인 4명의 장군과 자신의 주치의 까지도 면직 조치하였다.
1979년 이란에 이슬람 공화국이 세워진 이후, 바하이교도들은 박해를 받기 시작하였으며, 그들의 사원은 폐쇄되었다. 바하이교도 대부분은 지방으로 달아났으며, 남겨진 이들은 가정에서 기도하는 수준에 머물렀다. 바하이 센터들은 중동지역이 아닌, 미국과 독일, 우간다, 호주, 파나마에 위치한다.


*반-셈주의 anti-Semitism:

유대인에 대한 편견. 유대인들 때문에 유대인으로 태어난 예수가 죽었다고 생각되었기 때문에 기독교인들은 유대인을 좋지 않게 생각했다. 이로 인해 간혹 유대인에 대해 박해가 가해졌고 유대인 거주지역인 게토(ghettoes)에 밀집해 살게 되었다. 최초로 게토가 형성된 것은 11세기 이태리에서였다. 19세기까지 오스트리아, 불가리아, 독일, 이태리, 러시아 등지에서 이러한 게토가 성행하였고 박해가 심해짐에 따라 유대인들은 상업을 통해 부를 축적하는 것을 유일한 방어책으로 삼을 수밖에 없었다. 19세기 말엽, 유대인 해방 이후 유대인들이 인종적으로 열등한 집단이라는 이론이 나왔으며 대중의 혐오가 심해지자 정치적 선동가들이나 러시아를 위시한 정부에서는 유대인이 사회악을 저지르는 집단이라고 비난하기에 이르렀다. 유대인들이 전 세계를 정복하려 한다는 거짓 문서(Protocols of the Wise Men of Zion)가 20세기 초, 짜르 러시아에서 나오자, 유대인에 대한 미움은 극에 달했고 나치 독일은 (1933~1945) 결국 아리안 족의 우월성을 근거로 유대인들을 유럽에서만 6백만 명 처형했다. 이것이 홀로코스트(the Holocaust)이다.


*발루치 Baluchis :

부족 구조의 유목민 공동체. 발루치스는 현재 이란과 파키스탄, 그리고 아프가니스탄에서 볼 수 있는 부족 유목 공동체이다. 발루치스의 역사는 A.D. 10세기 무렵의 기록이 존재한다. 발루치스는 현재 이란에 정착된 공동체이며, 시스탄(Sistan)과 발루치스탄(Baluchistan) 지역에 집중 거주하고 있으며, 이란 인구의 2.5%를 차지하고 있으며 순니파 무슬림이다. 1979년 이슬람 혁명 이후, 순니파 이슬람법이 쉬아파 이슬람법과 동등하게 인정되어야 한다는 그들의 주장이 의회에서 받아 들여졌다.


*발포어 선언 Balfour Declaration (1917) :

발포어 선언은 1917년 11월, 영국외상인 아더 제임스 발포어(Arthur James Balfour)가 영국시온주의자 지도자인 로드 로스췰드(Lord Rothschild)에게 보낸 편지형식을 띤 영국의 팔레스타인에 대한 중요한 정책성명에 나타난 제목이다.
발포어 선언은 그때 제한된 국경선 내에서 지리적 또는 정치적 경험이 부족했던 팔레스타인에 적용되었다. 오스만제국에서 팔레스타인은 예루살렘 산자끄(행정단위, 군)과 베이루트의 빌라야트(도), 이스탄불로부터 직접 통치 받고 있는 예루살렘과 그 교외에 흩어졌다. 발포어 선언은 영국이 독일, 오스트리아, 헝가리, 불가리아와 오스만 터키로 구성된 세력들과 싸웠던 때인 제1차 세계대전(1914년 6월~1918 년 11월)동안 들 끌었던 시온주의자의 열망과 함께 대영제국의 전쟁수행 과정에서 나왔다. 1915년 1월, 시나이반도를 가로지른 수에즈운하에 대한 오스만 공격이 런던에게 수에즈운하, 영국의 인도로 가는 생명선을 방어하는데 팔레스타인의 전략적인 중요성을 인식시켰고 영국은 이 전쟁을 승리로 이끈 후, 팔레스타인을 지배할 결심을 하게 이끌었다.
1915년 3월, 내각에 보낸 비망록에서 시온주의자인 허버트 사뮤엘은 중동에서 영국정책의 초석으로서 팔레스타인에 유대인 촌을 건설할 것을 제안했다. 그때까지 독일, 오스트리아-헝가리, 미국에 집중되어 거주하던 유대민족은 전쟁에서 거의 중립적 입장을 유지했다. 1917년 4월에 연합군 편에서 싸움에 참여한 미국과 함께, 미국유대민족의 역할은 중요하게 되었다. 영국은 전쟁에서 승리하기 위해 유대계의 적극적인 자금협력과 미국의 지원을 얻기 위해 9월에 시온주의의를 지지할 것을 제안했으나 내각의 찬성을 얻는데 실패했다. 그들은 그때 친시온주의자로 알려진 우드로 윌슨 미국대통령의 자문을 구했다. 윌슨은 단지 시온주의자들을 위한 총체적인 동정성명은 시기가 부적절하다고 응답했다. 1917년 11월 2일, 영국은 로드 로스쉴드에게 보내는 편지형식을 띤 발포어 선언을 승인했다. 발포어 선언은 팔레스타인 땅에 유대인의 향토를 건설하는데 영국이 적극 협력하겠으며 기존의 팔레스타인 거주 비 유대계는 어떠한 시민적 종교적 차별을 받지 않을 것이라는 조건을 달았다. 이로써 아랍이 오스만에 반란을 일으켜 전쟁에서 승리하면, 아랍의 독립을 약속하는 내용이 담긴 1915년, 메카 주지사 후세인과 영국대표 멕마흔 간에 이루어진 ‘후세인-멕마흔 서한’, 그리고 1916년 팔레스타인과 레반트 지역을 영국과 프랑스가 분할 지배하기 위해 영-프랑스 간에 체결된 사익스- 피코 비밀조약(Syks-Picot Agreement), 발포어 선언 등은 영국의 3중 사기외교를 드러내는 것이었다. 미국 등 주요동맹세력들에 의해 승인된 이 발포어 선언은 1920년 산레모 협정에 포함되었고 1922년 7월, 국제연맹이 영국에게 팔레스타인에 대한 영국의 위임통치를 승인했다.
이러한 영국의 제국주의 외교정책은 아랍-팔레스타인 분쟁의 원인을 제공하였다.

* 백색 혁명(이란) White Revolution(Iran)

1963년 1월 초 무함마드 레자 샤 팔레비는 여섯 가지의 사회 개혁 프로그램을 골자로 하는 백색혁명을 실시하였다. 백색 혁명의 여섯 가지 사회 개혁 프로그램의 내용은 토지 개혁, 숲 국유화, 공시지가보다 높은 가격에 공공 분야의 공장 매매, 여성의 참정권, 산업분야의 이윤 분배 그리고 문맹의 근절로 이루어져있다. 개혁안은 1월 25일 시행 된 국민 투표에서 공식 집계 99.9%의 찬성률로 승인되었다.
백색혁명에 대한 반대 입장은 군주제에 적개심을 가진 진영에서 먼저 시작 되어 세속주의 국가 전선과 호전적인 무슬림단체에서 표명되었다. 샤의 개혁의지는 1962년 국토 개혁안을 개정하면서까지, 성직자들이 소유하고 있었던 종교 소유지에 까지 토지 개혁의 칼날을 들이 댈 정도로 강하였다. 이 후 아야톨라 루홀라 호메이니는 백색혁명을 거짓이라 묘사하며, 거리 시위를 주도 하였고, 1963년 6월 종교 성직자들의 불만은 극에 달하였다. 그러나 이들의 전국적인 시위는 수많은 사람들이 보안부대에 의해 죽임을 당하며 끝을 맞이하게 되었고, 호메이니는 강제 추방 되었다.
1973년 1월 샤는 백색혁명 10주년 기념사에서 이란 국영 석유 회사(National Iranian Oil Company)가 1954년 이후 서구 석유 조합이 행사해 온 이란 산 석유에 대한 모든 권한과 공정을 이행 할 것이라는 발표를 하였다.

*범아랍주의 Pan-Arabism :

범아랍주의란 아랍인은 세계 어느 곳에서든 거주 장소와 관계없이 단일 공동체라는 이념이다. 1876~78년 오스만 터키 제국의 술탄 압둘 하미드 2세에 의해 선포된 성문 헌법에 최초로 아랍 영토에 대한 언급이 있었다. 1908년, 이스탄불에서 청년 터키당이 술탄을 퇴위시키는 쿠데타가 성공한 뒤, 범아랍주의가 논의되었으나, 새로운 지도자가 터키 우월주의 노선을 채택하자, 범아랍주의 논의 자체가 지하로 숨어들었다.
1916년, 아라비아의 히자즈의 하쉼가 부족의 총독인 후세인 이븐 알리는 범아랍주의의 기수가 되어 오스만 터키 제국의 붕괴 이후, 아랍 지역을 단일 독립국가로 건설하겠다는 계획을 가지고 있었으나, 1916년 영국과 프랑스의 비밀 사이크스-피코(Sykes-Picot)비밀협정에 따라 국가건설 계획은 벽에 부딪쳤다. 이라크와 트랜스요르단 지역을 통치하던 하쉼가 부족의 내분으로 아랍 민족주의에 대한 논의는 잠잠하였으나, 1948년 압둘라 이븐 후세인 왕이 팔레스타인 일부 지역을 요르단 영토에 편입시키기 위하여 시온주의자와 비밀 거래를 하였다. 범아랍 민족주의자들은 이런 후세인 왕을 아랍 민족주의의 반역자로 보는 시각도 있다.
1948~49년 기간의 팔레스타인 전쟁과 이스라엘 건국 이후, 범아랍주의는 팔레스타인 영토 탈환을 위한 아랍인의 투쟁으로 결집되었다. 1952년, 이집트의 자유 장교단에 의한 쿠데타가 성공하자, 범아랍주의의 표면적인 지도권을 압둔 나세르가 갖게 되었는데, 사실상 1945년 이후, 이집트는 아랍 연맹(Arab League)의 본부를 제공한 것 이외에 별다른 기여도가 없었다. 아랍 연맹은 초기에는 영국이 중동 지역에서 자국의 이익을 위하여 지원하여 구성된 범아랍기구였다. 나세르는 1958년 이집트와 시리아를 통합하여, 1차 적으로 통일 아랍 공화국의 창설을 시도하였으나, 결국 3년 만에 실패로 돌아갔다. 1967년 6월, 아랍 이스라엘 전쟁 전날, 나세르는 시리아, 이집트 요르단의 합동 사령부를 지휘하게 되었다. 아랍 진영의 패배로 끝난 이 전쟁 이후, 이집트, 시리아, 요르단은 이스라엘에게 빼앗긴 전 아랍 영토를 회복할 목적으로 아랍 민족주의를 재개하였다. 1973년 10월, 이집트, 시리아 군사 연합과 중동 산유국은 범아랍주의를 표명하였다. 이것이 작은 분수령이 되어서 1979년 이집트 대통령 안와르 사다트는 이스라엘과 평화 협정을 체결하여 아랍 내부의 합의는 깨지게 되었다. 이로 인하여 범아랍주의에서 이집트의 지도력은 상실되고, 시리아의 하피즈 아사드 대통령이 뒤를 잇게 되었다. 아사드는 이스라엘에게 모든 아랍 점령지에서 철수하도록 요구하였다.
이라크의 사담 후세인 대통령은 범이슬람주의를 표방한 페르시아의 팽창주의에 대하여 전 아랍권의 향토을 수호한다는 명분 하에, 이란과 전쟁을 벌였으며 부분적으로 승리를 거두었다. 결국, 시리아와 알제리, 그리고 리비아의 지지를 받고 있는 이란을 무력화시키지 못한 사담 후세인은 나세르의 뒤를 잇는 계승자가 되는 것에 실패하였다.
1990년, 이라크의 쿠웨이트 침공 이후, 아랍 연맹은 심각하게 분열되었고 범아랍주의는 약화되었다. 특히, 팔레스타인의 유대인과의 타협에 대하여 주변 아랍 국가의 동의가 이루어져서 실질적으로 명분을 잃게 되었다. 범아랍주의 이념은 아랍어를 국어로 하는 22개국 회원국을 가진 아랍 연맹과 걸프협력위원회(GCC)와 아랍 마그립 연합(AMU)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범이슬람주의 Pan-Islamism :

마지막 이슬람 제국인 오스만 터키는 1차 대전의 패배와 함께 현 터키를 제외한 모든 영토를 상실했으며 1924년 터키 공화국의 출범으로 칼리프 제도가 무너지면서 범이슬람주의는 사그라지는 듯 했다. 몇 년이 지난 뒤, 이집트의 무슬림 형제단이 범이슬람주의의 기치를 내걸고 시리아와 트랜스요르단(현재 요르단), 팔레스타인 지역에 자매 기구를 설립하였다. 1949년 무슬림 형제단의 지도자 핫산 알 반나가 암살을 당하였고, 이 시기에 범이슬람주의의 인기는 최고조를 이루었다.
범아랍주의와 아랍 사회주의가 인기가 있자, 이집트 대통령 압둘 나세르는 무슬림 형제단을 억압하였다. 범이슬람주의의 지도권은 사우디 왕가에서 이어받았다. 특히 파이잘 압둘 아지즈 왕은 독실한 무슬림으로 1960년대 중반에는 나세르의 아랍 사회주의에 필적하는 이념을 장려하였다. 그러나, 1969년 이슬람의 세 번째 성지인 예루살렘의 알-아크사 사원의 방화 미수 사건 이후에 파잘살 왕은 이슬람 회의기구(ICO) 창설을 후원하여 젯다에 본부를 두고 전 세계 무슬림 국가를 결집하였다. 각 국 정부의 대표로 구성되는 ICO는 다국적 협의체로서 아랍 연맹에 필적하는 기구이다.


*베들레헴 Bethlehem (아랍어-Beit Lahm, 히브리어-Beth lehem)

웨스트 뱅크에 위치한 도시. 인구수 25,266명(2007년 통계). 구약 시대에 에프라트(Ephrat)로 알려졌던 베들레헴은 성경 룻기의 배경이자, 다윗왕(B.C.E. 1010년~970년 통치)의 본거지였다. 베들레헴은 예수 그리스도(B.C.E. 6년~C.E. 30년)의 출생지이며, 기독교인들의 성지이다. 로마의 황제 콘스탄틴 1세는 예수의 탄생지에 바실리카를 세웠다. C.E. 637년 무슬림세력이 베들레헴을 정복했지만, 도시는 파괴되지 않고 본래 모습대로 유지 되었다. 베들레헴에 세워진 예수탄생교회는 오늘날 아르메니아 정교회와 로마 카톨릭 교회, 그리스 정교회에 의해 공유되어 사용되고 있다.


*베리 나비흐 Berri, Nabih (1938~) :

레바논의 정치가. 시에라 레온(Sierra Leone)의 자유도시(Freetown)에 정착한 레바논인 시아 무슬림 상인가문에서 태어났었던, 베리는 그의 조상들이 살던, 남부 레바논의 티브닌(Tibnin)으로 돌아왔다. 베이루트에 있는 레바논 대학교 법대에서 공부하는 동안, 베리는 비밀단체인 바아스(Baath)당에 참여하였다. 파리의 소르본느(Sorbonne)대학에서 공부한 뒤, 자유 도시에 잠시 머문 후에, 베리는 미국에 갔었다. 그 곳에서 베리는 레바논계 미국인과 결혼을 하였다.
베리는 급진파 ‘쉬아파’ 지도자인 이맘 무사 사드르(Imam Musa Sadr)와 연합하여 민병대 ‘아말(Amal)’의 창설을 도왔다. 아말계 지도부로 시작한 베리는 사드르의 실종 이후 1978년에 ‘아말’의 총수가 되었다. 베리의 영향력 아래에서 ‘아말’은 레바논 시민 투쟁의 가장 영향력 있는 민병대가 되었다. 1981년 10월 베리는 아말 대표단을 테헤란으로 이끌고 갔다. 1982년 4월, 아말 회의에서 베리는 쉬아파 당원인 쉐이크 샴스 알 딘(Shaikh Shams al Din)과 함께 지휘권을 공유하기로 했다.
1982년 6월, 베리는 레바논 남부와 중부의 이스라엘 점령자에 대하여 쉬아파에 봉기할 것을 촉구하였다. 1983년 5월 이스라엘과의 평화협정 체결 후반에 베리는 아민 가마엘(Amin Gemayel) 대통령의 반대자가 되었다.
1984년 2월 레바논 군대에게 베이루트 근교의 쉬아파의 근거지를 파괴하라는 명령에 대해 레바논 군대내의 무슬림 동지들에게서 대통령 명령의 거부를 성공적으로 이끌어냈다. 드루즈(Druze) 군대의 도움으로 아말은 베이루트를 점령하고 게마엘 정부를 약화시켰으며 이스라엘과의 평화협정초안을 파기하였다. 뒤이은 통합정부에서 베리는 남부 레바논을 재건하여 수상직에 올랐다. 베리는 시리아와의 연합을 종결하였다. 베리는 아말의 세력을 능가하는 야세르 아라파트(Yasser Arafat)의 파타(Fatah)의 지배력을 약화시키기 위해 베이루트와 남부 레바논에 주둔한 팔레스타인 본부를 공격하였다.
1985년 10월 베리는 레바논 위기 해결을 위한 국민 협정에 서명한 세 명의 민병 지도자중 한 명이 되었다. 그러나 그 문서는 효력이 없는 것으로 판명되었다. 1988년부터 베리는 시리아의 대통령 하피즈 아사드(Hafiz Assad)가 히즈볼라(Hizbollah)의 성장을 위해 아말(Amal)의 이용을 허용하였다. 베리는 쉬아파에 대한 불공정한 대우 때문에 협약을 보류했다가, 1989년 10월에 사우디아라비아 타이프(Taif)에 동의하였다. 11월, 엘리사 하라비(Elisa Harabi)가 대통령으로 선출됨에 따라 베리는 새 내각의 각료가 되었다. 1990년 6월, 베리는 국회의원이 되었고, 1992년, 2001년, 선거에서 국회의장이 되었다.


*베이루트 Beirut :

레바논의 수도. 레바논의 최남단에 위치한 제1의 항구도시 베이루트는 베리투스(Berytus)로 알려진 페니키아 시대로 거슬러 올라가는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다. 상업 중심지였던 베이루트는 로마 그리고 비잔틴의 지배 아래 번성하였다. A.D. 636년에 베이루트는 아랍 이슬람의 통치하에 있었다. 1110년, 십자군 원정동안 십자군이 베이루트를 차지했고, 그들은 1291년까지 라틴 예루살렘 왕국의 일부지역으로 베이루트를 점령하고 있었다. 오스만제국 기간에 베이루트는 1861년 이후 오스만제국의 자치지역이었던 레바논 산 에미리트의 수도가 되었다. 1920년 프랑스 제국주의 당국은 베이루트를 동, 남, 북쪽으로 지역을 넓혀 형성된 대 레바논의 수도로 만들었다. 1946년, 베이루트는 레바논의 독립 후에 지역이 더 크게 확장되었고, 중동의 경제 중심지로 떠오르게 되었다. 그러나 1975년에서 1990년까지 있었던 레바논 내전 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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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목
<ㄱ> 가쉬미 - 국제연합안전보장이사회 결의안 598
<ㄴ> 나본 - 노루즈
<ㄷ> 다국적군 (레바논내) - 딤미
<ㄹ> 라디노어 - 레바논-이스라엘 평화협정 (1983)
<ㅁ> 마나마 - 무사디끄
<ㅂ> 바그다드 - 베이루트
<ㅅ> 사나 - 샤레트
<ㅇ> 아구다트 이스라엘 - 아랍-이스라엘 전쟁
<ㅈ> 자이드파 - 중동평화회담 (마드리드 1991)
<ㅊ> 천연가스 - 총인민회의(예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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