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회원가입   사이트맵
 
교당/기관찾기
 
 
<ㅅ> 사나 - 샤레트
<ㅅ>

*사나 Sanaa :

인구 60여만 명의 예멘의 수도. 이슬람 전 시대에 굼단(Ghumdan)이라고 불리었던 사나는 기원전 10세기에 북쪽으로부터 이주해온 시바족(Sabaean)의 중심 거점이었으나, 시바족은 A.D. 2세기에 아랍인들에게 항복했다. A.D. 632년 예언자 무함마드의 사촌 알리(Ali)와 사위는 시바족을 무슬림으로 개종시켰다. 예멘의 고지의 중심에서 지역 역사는 이맘이라 불리는 그들의 지배자인 자이디파 부족에 의해 지배되었고, 수도를 천도하는 관습이 있었다.
약 4세기 가까이 수도의 지위를 잃은 후, 사나는 이맘 압둘 와합 이븐 타히르 알 랏시(1478~88)의 통치하에 있었다. 사나는 오스만 터키의 영토로써 1517년부터 1872년까지 지역 이맘에게 지배를 받았다. 오스만 터키에 대한 계속적인 반란은 1911년 이맘 야흐야에 의하여 절정에 달하였으나 결국 진압되었다. 1913년의 조약에 따라 이맘 야흐야는 수도를 사나로 하였으며 오스만 터키가 몰락하자 영향력을 남부 샤페이 지역과 해안 지역으로 확대하고 사나를 국가의 수도로 발전시켰다. 그리고 그의 아들인 아마드(Amad, 1948∼62)는 수도를 남부 타이즈(Taiz)로 옮겼다. 1962년 혁명 후에 사나는 상업적, 통신상의 중요한 중심지가 되었다. 1962~70년 내전 동안 심각하게 파괴되었으나, 벽으로 둘러싸인 구 시가지, 금•은 금속세공의 유대인 지역과 대 사원이 주요 관광지이다.


*사다위, 나왈 el-Sadawi, Nawal (1931~) :

이집트의 여성 운동가이며 작가. 카프르 타흐라 지방의 중류 가정에서 태어난 사다위는 의사가 되었으며, 후에 이집트 시민 단체에 가입하였고, 보건국 교육이사로 추대되었다. 그러나 사다위는 1971년 빈곤과 정치적 부패 사이의 연결 관계를 설명하는 『여성과 성(Women and Sex)』이란 책을 출판하여 관직에서 면직되었으며, 이 책은 안와르 사다트 당시 대통령에 의해 출판이 금지되었다. 사다위는 레바논과 이디오피아에서 유엔 산하기구의 의사로 일하면서 해외에서 저작활동을 계속하며 여성의 권리와 좌익적 시각을 표현했다.
사다위는 수백 명의 반체제 지식인의 한 사람으로 분류되어 1981년 9월 체포되었다가 3개월 간의 옥고를 치른 뒤, 호스니 무바라크 대통령에 의해 석방되었다. 석방된 후에도 사다위는 아랍권내의 여성권리 운동과 더불어 이에 대한 집필을 계속했다. 또한 아랍여성 단결협의회(Arab Women's Solidarity Association)를 설립하여 억압과 빈곤으로 억눌린 여성의 권리를 개선하려는 노력을 하였다. 사다위는 『이맘의 추락』이라는 소설을 출판해서 이슬람 원리주의자들로부터 위협을 받자, 2년 동안 정부의 무장 보호를 받았고, 미국이 주도한 이라크와의 전쟁을 반대하였기 때문에 사다위가 설립한 아랍여성 단결협의회는 당국의 명령으로 폐쇄되었다.
사다위의 저서는 해금되었으나 그녀의 방송 출연은 금지되었다. 1991년 『나의 세계 여행』이라는 자서전을 출간하였고, 1994년에는 정신 병원의 두 여자를 주인공으로 『악마의 결백』이란 책을 저술하였다. 사다위의 저서는 좌익 작가로 13년 간 옥고를 치른 남편 쉐리프 헤타타에 의해 영어로 번역되었다.


*사다트 무함마드 안와르 Sadat Muhammad, Anwar (1918~1981) :

이집트 군인이며 정치가. 1970~1981년 대통령 재임, 나일강 유역 미타불 콤 마을에서 공직자의 아들로 태어나 카이로에서 성장하였다. 1938년 카이로 사관학교를 졸업하고 통신부대에서 근무하였다. 1942년 대위 시절, 독일을 위한 간첩 혐의로 유죄 선고를 받고 수감되었다. 그러나 1944년 탈출하여 잠적하였다. 사다트는 아흐마드 오스만 장관의 암살 용의자로 1946~48년까지 2년 간 복역하였다. 1949년 말에 대위의 계급으로 군대에 복귀하였다. 사다트는 시나이 반도에 있는 라파에 배치되었고, 우연히 가말 압둘 나세르를 만나게 되었다. 사다트는 자유 장교단 조직이 주도한 1952년 7월 22일 반란에 참여했고, 18명으로 구성된 RCC에 일원이 되었다.
사다트는 무슬림 형제단과 자유장교단의 연락책으로서 형제단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였다. 사다트는 1959년부터 10년 동안 국회 대변인을 맡았고, 1964~66년까지 부통령을 역임하였다. 1965년 이집트가 무슬림의 여론을 결집하기 위해 카이로에 이슬람 의회를 창설하였을 때, 사다트는 사무총장직을 수행하였으며, 1969년 9월 이슬람 회의기구(Islamic Conference Organization; ICO)의 이집트 대표로서 활동하였다.
1970년 9월, 나세르가 사망하자 사다트는 임시대통령이 되어서, 10월에 단독 입후보해서 대통령으로 선출되었다. 사다트는 1971년 5월 소련과 15년 간의 우호조약을 체결하였으나, 1972년 7월에 소련의 군사 고문단을 철수하도록 요청하여서 1만5천 명의 군사 고문단과 미사일과 요격기를 철수하였다. 1973년 3월, 모스크바와 친교 회복에 따라 소련의 무기 원조가 재개되었다.
1973년 10월, 아랍과 이스라엘 간의 4차 중동전쟁 동안, 이집트 군대는 예상치 않게 시나이 영토를 회복할 만큼 상황이 호전되었다. 이에 따라, 사다트의 국내 입지가 강화되었다. 두 차례에 걸친 이스라엘과 임시 교전 중지 협정 이후 평화 절차는 교착 상태에 빠졌다.
1977년 1월 생필품에 대한 보조금 축소에 따라, 이집트 물가가 폭등하여 폭동이 일어났다. 사다트는 급히 가격 인상 조치를 취소하고, 미국과 소련에 원조를 요청하였으며, 특히 모스크바에 100~120억 달러에 달하는 부채 상환을 재조정을 요청하였으나 거부당하자 사다트는 소련과의 우호 조약을 폐기하였다.
사다트는 이스라엘의 크네셋에서 연설을 하였고, 이로 인하여 서방 세계에서 사다트의 인식이 크게 좋아졌으며, 그의 자서전(1978)은 인기를 끌게 되었다. 사다트는 1978년 9월 18일 워싱턴 백악관에서 지미 카터(Jimmy Carter)대통령이 참석한 가운데, 이스라엘 수상 메나헴 베긴과 캠프 데이비드(Camp David)협정에 조인하였다. 당시 국내에서 쿠데타의 우려 때문에 국방장관인 압둘 가니 가마시 장군을 해임하고, 기술관료와 학자들로 구성된 “평화 정부”를 이끌기 위하여 국민민주당(NDP)의 지도자 무스타파 칼릴을 국무 총리로 임명하였다.
1979년 3월, 사다트와 베긴은 이집트-이스라엘 쌍무조약에 서명함으로써 아랍연맹과 아랍 회의 기구(ICO)로부터 이집트에 대한 즉각적인 자격중지와 오만을 제외한 아랍 연맹 회원국들에 의한 관계단절을 가져왔다. 이집트의 고립을 극복하기 위해 사다트는 국내에서의 권력증대를 꾀했다. 사다트는 임기 2년이 남아있는 의회를 해산하고 1979년 6월 첫 번째 다당제 부정선거를 통해 그의 NDP당이 83%의 의석을 확보하게 했다. 또한 남아있는 마지막 200명의 소비에트 민간 전문가들을 추방하였고, 경제적 생존을 위해 더욱 미국에 의존하게 되었다.
1980년 5월, 칼릴을 사임시킨 후에 사다트는 자신이 수상으로 취임하였다. 즉시 조작된 국민투표를 실시함으로써 그는 대통령직을 6년 단임제로 제한한 헌법 조항을 폐기했다. 사다트의 이스라엘과의 평화조약과 부정부패의 증가, 그리고 신 부유층의 허례 허식으로 그가 임기 초기에 가깝게 했던 이집트 내 이슬람 세력과 멀어지게 되었다. 나세르 정권이 도입한 가격제도의 붕괴는 인플레이션을 가속화시켰고 노동 계층과 저소득 중산층에게 많은 경제적 어려움을 가져왔다.
사다트는 파업과 시위를 금지시켰고 점점 더 편협하고 독재적으로 되어갔으며 권력을 남용하게 되었다. 1981년 9월, 반정부주의자에 대한 대대적인 소탕으로 약 2천 명이 체포된 다음날, 그는 1973년 10월 아랍-이스라엘 전쟁 기념일 군대 열병식에서 이슬람 원리주의자에 의해 암살당했다. 나세르의 죽음에서 나타난 대중들의 애도와 대조적으로 사다트의 죽음은 대부분의 이집트인들에 의해 무시되었다.


*사르키스, 엘리야스 Sarkis, Elias (1924~1985) :

레바논의 정치인. 1976∼1982년에 대통령이었다. 베이루트 중류의 마론파 기독교 (Maronite)가정에서 태어났으며 성요셉(Saint Joseph) 대학에서 법학사 학위를 받았다. 1953년부터 정부 감사원의 법률국에서 일했다. 국방장관의 재정변칙에 대한 조사 과정에서 파후드 쉐합(Faud Chehab) 대통령의 주목을 끌었고 대통령은 그를 안보부로 전보시켰다. 사르키스는 대통령처의 권력의 중심에 있게 되었으며 1962년에는 대통령실 실장이 되었다. 샤를레 헬로우(Charles Helou) 대통령의 보좌한 후에 그는 1966년 중앙은행장이 되었다. 4년 후, 대통령 1차 투표에서 사르키스는 술레이만(Suleiman Franjieh)에 패배하였다. 사르키스는 1975년 4월 레바논 내전 이후 온건 마론파의 상징이 되었다.
사르키스는 1976년 6월 전쟁에서 마론파에 중재를 하였던 시리아 대통령 하피즈 아사드의 지원을 받았다. 3개월 후 대통령 선거에서 단독 입후보로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아사드와 연합하여 정국을 주도하였던 사르키스는 고위 공무원을 친시리아 인사로 지명하였다. 팔랑훼 당원들은 시리아의 개입을 저지하려했지만 실패했다. 사르키스는 총리인 살립 호스와의 분규 끝에 시리아의 영향력을 줄이는 것으로 국가적인 합의를 이끌어 내려했으나, 호스(Hoss)는 시리아의 평화유지군과의 방위협정 조약서문을 실행할 것을 주장하였다. 두 사람간의 의견차이를 줄이려는 노력은 실패로 돌아갔으며, 호스는 1980년 6월에 사퇴했다. 같은 해 말에 샤리피끄 와잔(Sharifiq Wazzan)이 이끄는 내각은 팔랑훼당(Phalangists)과 시리아의 자블레(Zable) 간에 대립을 깨버렸다. 1주일 내에 레바논을 침공한 이스라엘은 1982년 6월에 사르키스를 밧다(Badda)에 있는 대통령 궁에서 그를 직위 해제시켰다. 그의 공식 임기 기간이 만료된 9월엔 이스라엘은 대부분의 베이루트를 통제하고 있었다. 이후 사르키스는 은둔 생활을 하였다.


*사마르라 Samarra :

인구 20여만의 이라크마을. 20세기 유적 발굴에 따라 티그리스강에 위치한 사마르라(Samarra)의 역사는 기원전 5천년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현재의 지역은 A.D. 3세기 동안 건립되었고 칼리프 알 무으타심이(A.D. 833∼41) A.D. 836년에 압바스 제국의 수도로서 바그다드를 포기하자 사마르라의 발전은 절정에 이르게 되었고 정원과 궁전을 갖추었다. 그는 옛 이름인 우르비베드(Urvived) 대신 사라 만라(Sarra Manraa)로 개명하였다.
칼리프 알 무타미드(al Mutamid, A.D. 870∼92)는 A.D. 892년에 바그다그를 수도로 되찾고 사마르라는 강변을 따라 확장되었다. 열 한 번째 이맘, 핫산 알 아스카리의 어린 아들 무함마드 알 까심은 사마르라에서 마지막 이맘이었으며 A.D. 873년 홀연히 자취를 감추었다.  그 다음 4세기 동안, 마을은 급속히 쇠퇴했다. 사마르라는 9세기 동안 알 말위야(al Malwiya) 미나레, 지구라트, 계단형태의 피라미드가 있는 고대 메소포타미아의 사원탑, 대금요일(Great Friday) 사원을 포함하여 오늘날 형태로 회복하였다. 이는 신성한 구리 돔 사원을 포함하여 쉬아파 무슬림의 성지가 되었다.


*사마리아 Samaria :

유대인들이 샴논(Shomron)이라 불렀던 사마리아는 요단강과 지중해 사이에 고대 가나안(팔레스타인)의 중심지역을 차지하고 있었고 유대(Judah) 북쪽에서 남쪽까지, 그리고 갈릴리(Galilee) 호수의 서쪽에 위치하고 있다. 정치적, 지리학적 중심지는 현재의 나블루스(Nablus) 가까이에 있는 쉐쳄(Shechem)이었다.
기원전 1030년으로부터 2세기 이상 사마리아인은 이스라엘을 정복하고 가나안을 식민지로 만들었다. 연합 이스라엘 왕국이 다윗(David)왕의 치하에 있는 동안에, 북의 사마리아는 마나세(Manasseh)족에게 (다른 영토는 요르단의 식민지였음), 그리고 남쪽의 사마리아는 이브라힘(Ibrahim)족에게 주었다.
솔로몬 왕의 사망에 이어서 이브라힘과 마나세족들은 남쪽의 혈족으로부터 분리되었으나 이스라엘 왕국의 이름은 유지되었다. 수도는 기원전 880년에 티르자(Tirzah) (지금의 탈 알화리아, Tall al -Fariah)에서 사마리아로 옮겼다. 이러한 이주에 따라 쉐첨과 합하여져서, 사마리아 지역은 각 변의 길이가 10km 등변의 정삼각형을 형성하였다. 왕국은 기원전 722년에 앗시리아인에게 점령되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시기(A.D. 30)에 사마리아는 로마인들에 의해 통치되었다.


*사마리아市 Samaria city :

세바스트(Sebast) 혹은 사바스티야(Sabastiya)의 근대도시. 20세기 초에 고고학적 발굴을 통해 사마리아 시의 역사가 기원전 4천년까지 거슬러 올라간다는 것이 판명되었다. 구약성서의 시기인 기원전 880년에 왕궁이 있는 성채가 있는 이스라엘왕국의 수도였다.
앗시리아인에게 잡힌 사마리아 사람은 대부분 노예가 되었다. 사마리아는 쿠테안(Cuthean)의 식민지가 되었고, 페르시아(Persia)의 성공으로 행정의 중심지가 되었다. 기원전 332년, 알렉산더 대왕에 의해 지역이 점령된 후 그리스의 식민지가 되었다. 사마리아 시는 기원전 120년 로마장군인 존 히카누스(Jhon Hyrcanus)에 의해 파괴되었고 폼페이시(B.C. 106~48)에 편입되었다. 그리고, 헤로드 대왕에 의해 로마제국황제 아우구스투스의 명령으로 세바스테(Sebaste)로 개명되었으며 아우구스투스의 사원, 집회장, 공회당으로 기증되었다. 로마제국의 전성기 후에 비잔틴시기(A.D. 476~1453)까지 쇠퇴의 길을 걸었고, 사바스티야(Sabastiya)라 불리는 오스만 터키(1517~1918) 제국 시기 동안 도시는 축소되었다.


*사브라 sabra :

(아랍어-선인장) 사브라(sabra)는 이스라엘 태생 유대인을 나타내는 말로서 겉은 가시투성이 이지만 속은 부드럽고 달콤한 선인장을 비유한다.


*사브리 알리 Sabri, Ali (1920~91) :

이집트 군 장교 및 정치가, 국무총리(1962~65)역임, 카이로에서 태어나 카이로 육군사관학교를 1939년에 졸업하였고 임관되었다. 자유 장교단의 회원으로서 1952년 전 그리고 쿠데타동안 이집트 수뇌부와 미대사관 연락임무를 받았다. 후에 그는 대통령 가말 압둘 나세르와 가까워졌으며, 이집트와 시리아가 1958년 아랍연합(UAR)을 형성하기 위해 합의했을 때, 그는 대통령 비서실장으로 임명되었다.
비록 아랍연합(UAR)이 3년 후에 깨졌지만 그는 이집트 행정부의 확고한 지위를 유지했다. 1962년 9월에 국무 총리로 영전하여 3년 동안 직위를 유지했으며 후에 부통령이 되었다.
1965년 7월 나세르(Nasser)는 그를 아랍 사회주의연맹(ASU)의 총비서로 임명했다. 또한 조직을 핵심요원의 기관으로 변환시킬 수 있는 위임통치권을 가졌다. 그는 지역과 구 ASU위원회를 행정관료로 대체하고 민간서비스, 사업경영, 공장, 교직인, 법조인들 그리고 지방 부족으로부터 뽑은 공무원으로 두었다. 알리는 ASU의 보조기구로 사회청년기구(SYO)를 설치하고 1966년에는 SYO를 통하여 대대적인 반봉건주의 운동을 펼쳤다. ASU와 SYO의 회원들은 이스라엘과 6일 전쟁에서 패한 책임으로 사임하려는 나세르를 설득하는 봉기를 카이로에서 성공적으로 하였다. 결국 나세르는 사임을 번복하였고, 사브리를 포함하여 부통령을 교체하였다.
1969년 10월, 사브리는 ASU 내의 지지자들의 지위를 낮추고, 12월에 안와르 사다트를 부통령으로 지명하였다. 1970년 10월 나세르가 사망하자 사다트 대통령은 사브리를 부통령으로 지명하였다. 이후 사다트와 사브리와의 권력 투쟁이 지속되었다. 사다트는 ASU를 국가 행정 기구 하에 두려 했고 사브리는 독립기구로 유지하려 하였다. 결국 사다트 측이 우세하여 1971년 5월, 사브리는 나세르 재직 시 권력 남용과 반역죄로 체포되었다. 사브리는 유죄 확정으로 사형이 선고 되었으나 종신형으로 감형되었다. 1981년 5월 결국 석방되었다.


*사아다, 안툰 Sa'ada, Antun (1902~1949) :

레바논의 정치가. 의사인 그리스정교도 가정에서 태어나, 브라질로 이주한 사아다는 브라질에서 성장하여 아버지와 같이 잡지사 운영하였다. 1929년 다마스커스에 여행하여 알 아이얌(al-Ayyam)잡지의 기자가 되었다. 다시 베이루트에 가서 아메리칸 대학에서 일했다. 1932년 비밀 모임을 창설하여 1935년경에는 레바논과 시리아에 수천 명의 회원을 갖게 되었다.
사아다는 시리아 레바논 지역에서 프랑스 통치를 종료하도록 촉구하였다. 1935년 12월 사아다는 모임을 시리아 국민당으로 공개하고 전당 대회를 열었고 프랑스 정부에 의해 투옥되었다. 1936년 프랑스에서 좌익 인민 전선이 집권하자 석방되었다.
사아다는 1938년 이탈리아와 독일을 방문하였고, 1939년 9월 제2차 세계 대전에는 남아메리카에 여행 중이었다. 프랑스 정부는 사아다의 당의 지도자가 악시스 권력과 공모하였다는 이유로 금지하였으나, 그러나 혐의는 입증되지 못했다. 1941년, 프랑스는 당의 지도자들이 당의 명칭을 국민정당(National Party)이라고 개칭하자 그를 석방하였다.
1947년 사아다가 레바논이 독립하자 귀국하였다. 정치활동을 재개한 사아다는 당명을 시리아 사회 민족주의당(SSNP)라고 개칭하였다. SSNP와 레바논 정부가 분쟁을 하자, 사아다는 지하로 잠입하였다. 결국 사아다는 레바논 정부의 독립성을 인정하였다.
1948~49년 팔레스타인 전쟁에서 아랍진영이 패배하자 범아랍주의와 대 시리아 민족주의에 대한 그의 논의는 기존 정치가로부터 각광을 받았다. 1949년 3월, 시리아에서 호스니 자임(Husni Zaim)이 정권을 잡자, 사아다는 자임의 지원을 기대하였으나 실현되지 못했다. 1949년 6월, 사아다에 의한 쿠데타로 인정되는 그의 당과 팔랑훼당의 군사 분규가 베이루트에서 발생하였다. 사아다는 시리아로 탈출하여 열렬한 환영을 받았으나, 레바논과 시리아의 반SSNP군의 압력 하에 자임은 사아다의 본국 송환을 동의하였다. 약식 비밀 군사재판을 받은 뒤에 사아다는 처형되었다.

* 사얍, 바드르 샤키르 Sayyab, Badr Shakir (1926 – 64) :

이라크 시인. 바스라 근처 쉬아 가문에서 태어난 사얍은 아랍과 영미문학으로 특성화되어있는 바그다드의 교육 대학에서 학위를 취득하였다. 시인으로써의 사얍은 엘리엇(T.S. Eliot)과 특히, 그의 시 The Wasteland(1922)의 영향을 받았다. 샤얍은 시 모음집인 The Wilted Flowers(1947)으로 문단에 데뷔하였다. 엘리엇돠 마찬가지로 사얍은 자신의 작품 세계에서 시간의 개념을 없애고, 선의 진행으로 표현 하였다. 그는 과거, 현재, 미래를 자유롭게 넘나들며 작품 활동을 하였으며, 다른 시대와 경험을 합치기도하고 교환하기도 하며 자신의 세계를 표현하였다. 사얍은 자신의 작품에 영원의 이미지와 역사적인 전형들, 미신, 속담, 전통 문화등을 사용하였으며 인상적인 필력을 소유 하였고 원래의 이미지를 형상화하는데 특별한 능력이 있었으며 정확한 단어를 구사 하였다.
무엇보다도 사얍의 작품 세계에 가장 큰 자극을 준 사건을 1948년 제 1차 중동 전쟁 때, 아랍이 패배한 사건이었다. 그는 시인으로써 뛰어난 재능을 가지고 있던 그의 제자인 나직 알 말리카(Nazik al Malika)와 함께 아랍 시 세계의 모더니즘을 개척하고 이끌어 나갔다. 이들의 시 세계는 1950년대에서 1960년대의 시풍을 아우르게 되었다.
1950년대에 출판된 사얍의 시집들은 특히 리드미컬한 구조의 시들이 늘어났다는 점에서 눈길을 끈다. 각각의 시집은 다른 분위기를 나타내고 있는데, In the Arab Maghreb이라는 시집은 열정적인 영웅 서사시의 어조를, Song in the month of Auhust에서 나타나는 모순은 놀라울 정도 이며, 아랍 문학에서 드물정도의 수준을 가지고 있다. Faykur and the City에서는 비극적인 어조의 작품을 보이고 있다.
이라크 사회당의 일원으로써, 사얍이 사회에 가지고 있던 시각은, 사회에는 구세주가 필요하나 영웅에 의한 구원이 아닌, 자신들의 운명을 자신들의 손으로 개척할 수 있는 힘을 가진 대중이 바로 그 구세주가 되어 투쟁하고 승리할 것이라는 것이었다. 팔레스타인에서의 패배는 새롭고 강한 구원을 요구하게 되었고 대중들은 통일 아랍을 갈망하게 되었다고 보았다. 이같은 사얍의 관점은 매력적이었으며, 그의 시 The Song of Rain에서 적절하게 표현되고 있다. 그는 이 작품에서 바빌로니아의 풍성한 신들 중의 하나인 탐무즈에 비유하여 삶의 구원은 비가 지나가고 봄이 도착하는 것을 통해 도래 할 것이라고 이야기 한다.
사얍은 1958년 7월 이라크에서 일어난 친 영국 노선의 왕정을 끝낸 혁명을 축하하였다. 또한 1962년 프랑스의 제국주의에 맞서 해방을 이끌어 낸, 알제리 전선의 승리를 바위에서 해방되는 시시포스에 비유하며 축하했다. 아둘 카림 까심의 정권 하에서 사얍은 사회당 활동을 그만둔다. 이라크에서의 삶을 정리한 사얍은 베이루트로 이주 하여 시 잡지인 쉬아르(Shiar)에서 알리 아흐마드 사이드 아스바르(Ali Ahmad Said Asbar)와 공동 편집자로 일을 시작한다. 사얍은 불치병을 앓으면서 병에 관한 시를 써 내려갔으며 종종 구약에 나오는 용기와 신앙과 함께 고통에 시달린 예언자 욥에 자신을 투영하여 자화상의 모습으로 묘사하곤 하였다.

*사우드 가 House of Saud :

사우디아라비아 지배왕조. 사우드가는 디라이야-리야드 지역에서 18세기 초기에 아나이자 부족연합의 루왈라 부족의 무살리크 혈통의 하나이다. 그의 후손인 무함마드는 1726~65년까지 디라이야 지역을 통치하였고 1745년 와하비즘을 받아들였다. 와하비즘의 교리로 무장한 그는 왕국의 영토를 확장하였고 이러한 영토확장은 계승자들에 의해 계속 수행되었다. 그의 계승자들은 압둘 아지즈 이븐 무함마드(1766~1803년 통치), 사우드 이븐 압둘 아지즈(1803~14년 통치)가 있으며 압둘 아지즈는 영토를 시리아와 이라크 국경지역까지 이르게 하였다. 그러나 압둘라 이븐 사우드(1814~18 년 통치)하에서 사우드가의 운은 쇠약해졌고 압둘라는 고통스런 패배와 더불어 오스만 술탄에 의해 결국 처형당하고 말았다.
다음 3/4세기에 사우드가는 다시 일어났으나 라이벌인 오스만에 의해 지원받는 샴마르 부족의 라쉬드가가 1891년 압둘 라흐만 이븐 파이잘 알 사우드를 디라이야의 그의 요새에서 제압했을 때 다시 진압되고 말았다. 사우드가의 압둘 아지즈 이븐 압둘 라흐만 알 사우드 (1879~1958)를 포함하여 몇몇 살아남은 사람들은 쿠웨이트에서 피난처를 구했다. 그는 1902년 리야드를 재탈환하였고 그의 왕국을 넓혀나가 1932년 사우디아라비아 왕국으로 국호를 정했다. 사우드가와 함께 알 사우드 알(Aal Saud Aal, 압둘 아지즈와 그의 5형제로 구성됨)은 사우디아라비아의 지배왕조가 되었다. 1990년대 중반 이 여섯 형제의 부인들과 첩에 의해 나온 남자 자손들은 약 6천 명에 달하고 있다.

*사우디아라비아 왕국, Kingdom of Saudi Arabia :

공식국가명: 사우디아라비아 왕국
수도: 리야드(Riyadh)
면적: 2,149,690㎢
인구수: 2,653만 명(2012년 추산)
국내총생산(GDP): 5,810억 달러(2012년 추산)
국가통화: 사우디 리얄(Saudi Riyal, SR)
정부형태: 군주제
공식언어: 아랍어
행정구역: 13개의 주로 나뉘어 있고, 각 지역은 군주로부터 임명된 총독이 관리함.
사우디아라비아 건국 6년 후, 파하드 이븐 압둘 아지즈 알 사우드 왕은 정부 기본법을 명시한 포고령을 발표하였으며, 60명의 헌법 위원회 위원과 4년 임기의 위원장을 지명하였다.
인종구성: 아랍인 78%, 아시아인 19%, 기타 3%.
역사: 1934년 아라비아반도의 부족사회 대부분은 압둘 아지즈 알 사우드 국왕의 통치 아래 하나의 세습적인 군주국으로 통합되었다. 왕국의 기원은 정신적 지도자인 쉐이크 무함마드 이븐 압둘 와합과 정치•군사적 지도자인 무함마드 이븐 사우드 간의 동맹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압둘 와합의 이슬람주의는 단일 부족의 좁은 경계를 넘어 사우디국가를 확장해 온 통합된 힘이었다. 1740년경에 와합은 꾸란과 순나의 이슬람의 기본원리로 복귀할 것을 주장하였다. 정치적•종교적으로 오스만 술탄의 합법성을 거부하였던 압둘 와합은 나지드에서 통치하면서 와하비 교의의 일시적인 옹호자였던 무함마드 이븐 사우드와 동맹을 맺었다.
사우드의 군사력확장에 의해 이루어진 부족 연합은 와하비주의의 청교도적인 이념으로 무장하고 반도에서 오직 하나의 권위를 탄생시켰다. 당시 이 지역은 와하비 신봉자들에 의해 통치되는 20개 지역으로 분할되었다. 19세기 초반 사우드에는 헤자즈, 즉 메카와 메디나의 점령에 이어서 이집트의 총독인 무함마드 알리에 대한 공격으로 이어졌다. 이때 오스만 술탄은 무함마드 알리로 하여금 헤자즈를 정복하도록 요청하였다. 그러나 1814년 이집트인들은 헤자즈에 입성하였으며, 1818 년 통치자 사우드는 콘스탄티노플에서 처형되었다.
1843년 나지드는 또다시 사우드 통치아래 재통일되었다. 나지드가 1843년에 사우드에 귀속되었지만, 나지드와 그 수도인 리야드에서 경쟁자인 라쉬드家의 영향력은 19세기 말까지 이어졌다. 이 시기동안 헤자즈는 오스만제국의 통치아래 있었고 반도의 나머지는 영국 통치아래 있었다. 또다시 사우드 가(家)는 쉐이크 무바라크의 보호 하에 쿠웨이트로 추방되었다.
20세기 초에 사우디 부족은 압둘 아지즈의 영도와 쿠웨이트 통치자의 지원으로 동부와 나지드를 통치하였다. 1차 세계대전 후 오스만제국이 약화되고 이에 따라 헤자즈를 포함하는 서부 지역에서 영국의 세력이 약화됨에 따라 사우디는 동부와 서부지역을 장악하였다. 압둘 아지즈는 원리주의 세력인 이크완(Ikhwan)의 기치 아래 정치•종교•군사적 힘을 효과적으로 이용하였다. 수만의 전사(戰士)의 힘인 이크완은 와하비주의의 기치아래 이슬람을 위해 싸우는 여러 부족이 모여 이루어졌다. 1920년엔 압둘 아지즈는 그때까지의 투쟁조직인 와하비의 무장단체인 이크완으로부터 결별하였다. 쿠웨이트와 이라크를 조정하고 있는 영국으로부터 후원을 받고있던 압둘 아지즈는 이크완의 반란군을 진압하였다.
1927년 압둘 아지즈는 명실 공히 헤자즈와 나지드의 왕이 되었고 1930년까지 현재의 사우디아라비아 국경선이 설정되었다. 1932년 9월, 아라비아반도의 1/3을 차지하고 있던 영토를 하나로 통합하였고, 마침내 1934년 압둘 아지즈는 자신을 통치 가문의 이름을 따르고 그 번영을 상징하는 국가, 즉 사우디아라비아의 국왕으로 선포하였다. 압둘 아지즈는 1933년 미국의 스탠다드 오일사에게 석유 시추를 허락하였으나, 2차 대전이 시작되면서 현대적인 석유추출은 중단이 되었다. 압둘 아지즈는 전쟁기간 계속적으로 중립을 유지하였으며 성공적인 통치로 인하여 사우디의 군주로 군림했다. 2차 대전 후 석유의 수요가 급격히 늘어나면서 세수가 증가하자 그 부가 사우디의 각 지방 구석구석으로 퍼졌으며 경제고속성장이 계속되었다. 이들 각 지역은 군주의 친인척들이 관리를 하였는데 전통적인 생활에 강한 애착을 갖는 와하비파의 생활형태가 과소평가 되는 현상이 생기기도 했다.
압둘 아지즈의 사망 1달 전인 1953년 10월이 되서야 각 부서의 장관들을 임명하게 되었으며 각 위원회를 구성하면서 사우드를 위원장으로 명하였다. 사우드가 왕이 되면서 그는 1950년대에 발생한 이란의 석유국유화 파동으로 발생한 사우디의 세수를 관리하기엔 역부족이었다. 이로 인하여 그의 동생과 힘 겨루기가 발생하였는데 그 상황은 그에게 불리하게 돌아가 그는 왕위를 동생 파이잘(Faisal)에게 물려줄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왕위를 받으면서 정치개혁을 약속한 동생은 왕이 되면서 모든 것을 무시하였으며 그의 반대파를 무자비하게 탄압하였다.
이집트의 나세르의 후원을 받고 있던 북예멘의 공화주의자에 대응하여 사우디는 북예멘의 왕권주의자를 지원하였다. 그러나 이스라엘과의 전쟁을 통하여 이집트와의 관계개선을 하였으며 이슬람 공동체 설립을 위한 노력을 한 결과 1969년 무슬림 회의기구를 설립하였다.
1973년 10월 중동전쟁에서 파이잘은 석유가를 4배로 인상하는 한편, 이스라엘 우방국가에 대한 석유금수조치를 단행함으로써 아랍자원민족주의를 주도했다. 1975년 3월 25일, 파이잘은 암살 당했다.
칼리드(Khalid)국왕은 정치범을 석방하였다. 그는 권력부서인 외무, 내무, 국방, 국가수비대의 장은 왕족으로 임명했다. 레바논 내전에서 그는 PLO를 지원했으며 캠프 데이비드 협정에 반대했다. 그는 민족주의자 성향을 나타냈으며 1979년 11월, 메카 반정부 폭동사건을 단호하게 진압했다.
1981년 파흐드 국왕은 중동평화에 관심을 가지고 파흐드 평화안을 제시하였다. 그는 이스라엘이 1967년 점령지 이전지역으로 철수할 것을 주장했다. 1990년 8월, 이라크의 쿠웨이트 침공당시 그는 미국과 아랍국가들에게 사우디와 쿠웨이트를 지원해 줄 것을 요청했다. 걸프전으로 사우디는 전비부담이 너무 큰데다 석유가격이 하락함으로써 심한 재정적자에 시달려 왔다.
국내정치와 왕족의 부패 그리고 억압정책은 이슬람 원리주의 성장을 부추겼다. 1992년부터 사우디는 미미한 개혁정책을 실시하고 있다. 1993년 처음으로, 자문회의(Majlis al-Shura)가 수립되었다. 그러나 파흐드 국왕의 건강악화로 왕세자 압달라가 거의 모든 정사를 관장하고 있다.

* 사우디 아라비아 군 Military in Saudi Arabia

전군 현역 233,500 군 지출비 GDP의 8.7% (2004)

*사우디아라비아 공산당 The Communist Party of Saudi Arabia (CPSA) :

사우디아라비아 공산당(CPSA)은 1975년 국민해방전선(NLF)을 모태로 성립되었다. NLF는 1953년 구성된 노동자 위원회를 근간으로 1958년 공산주의자들이 결성하였다. 노동자 위원회는 1956년 유전 파업이 발생하였을 때까지 비밀리에 활동하였다. CPSA는 1969년 6월 아랍민족주의 운동의 사우디 분파의 지도하에 반란을 도모하였다. 1978년 베이루트 공산당 회의에 참석하여 반시온주의 운동을 결의하는 등 지속적인 활동을 하였지만 실질적인 성과는 없다.

*사우디아라비아의 아랍 민족주의자 운동 Arab Nationalist Movement, Saudi Arabia

1964년 자흐란에서 비밀 조직으로 시작한, 사우디 아라비아의 아랍 민족주의자 운동은 1966년 초 세력이 확장되었다. 이후 3년 동안, 아랍 민족주의자 운동을 기반으로 하는 정당은 군장교와 석유 노동자, 공무원, 교사 사이에서 세력 기반을 마련하였다. 1969년 6월 그들의 쿠데타 계획은 실행 한 시간을 앞두고 발각되었다. 이 사건으로 200명의 공모자들이 체포되었고, 많은 이들이 처형되었으며, 정당은 폐당 조치되었다.

*사우디아라비아의 인권 수호 위원회 Committee for Defence of Legitimate Rights, Saudi Arabia :

1993년 4월 예멘에서 최초로, 여섯 명의 사우디아라비아의 인권주의자(교수, 변호사, 공무원 등)이 사우디아라비아 인권 수호 위원회(Committee for Defence of Legitimate Rights : CDLR)을 창설하였다. 부정을 근절하고, 시민들의 합법적인 권리를 지키는데 목적을 둔 CDLR은 사우디아라비아의 시민들에게, 관리들의 시민들의 권리 이행에 대한 부정을 보고하도록 요구하였다. 더불어, 참정권에 기반을 둔 선거를 포함한 정치 개혁도 요구하였다. 정부는 CDLR의 지도자, 무함마드 알 마사리(Muhammad al Masaari)교수를 체포하고, 나머지 창립 회원들을 그들의 직장에서 해고시켰다.
CDLR은 근거지를 런던으로 옮기고, 사우디아라비아에서 정보를 얻고 그곳의 지지자들과 의견을 교환을 하기 위해 전송을 주로 사용하면서, 그곳에서 레드비얄 마사리(Redbyal Masaari)는 활동들 계속했다. 두 명의 성직자의 감금에 반대하는 시위를 주도하였는데 이어, 1994년 9월에 CDLR은 대대적인 체포가 있었다는 사실을 폭로했다. 전례 없이, 사우디아라비아 정부에 의해 확인이 되었으며, 300명에 달하는 반정부 인사들이 1995년 초까지 감옥에 갇혀 있었다. 마사리를 추방시키려는 끊임없는 사우디아라비아 정부의 노력은 실패하였다.

* 사우디아라비아-이라크 중립지역 Saudi Arabia-Iraq Neutral Zone

면적: 2720 sq 마일/7044 sq km. 1922년 우까이르(Uqair) 조약에 의해 나즈드(Najd)와 이라크 사이의 지역을 중립 지역으로 두 국가간 경계를 만들었다. 이 중립 지역은 사우디아라비아와 쿠웨이트 국경 서쪽 끝에 인접해있다. 사우디아라비아와 이라크 모두 중립 지역을 유목 부족이 이용하는 것은 허용하고 있으며, 군사적 혹은 도시화하기 위한 건축은 금지하고 있다. 1938년 사우디아라비아와 이라크는 해당 지역의 관리에 협의하였으며, 1975년 양 국은 중립 지역을 같은 크기로 배분하였다. 양 국가 간의 새 국경은 직선으로 중립 지역을 통과하고 있으며, 각 국가는 자신의 영토에 소속된 지역의 통치권을 갖는다..

* 사우디아라비아-쿠웨이트 중립지역 Saudi Arabia-Kuwait Neutral Zone
면적: 2230sq miles/5770 sq km. Uqair
1922년 협약에 따라 경계 중립 지역이 형성되었는데 쿠웨이트 남부 지역에 형성되어 있으며, 나즈드 지방과 맞닿아 있다. 중립 지역에서 유목 부족을 위한 식수와 초목을 제공하는 것은 허가하고 있으나, 군사적 목적이나, 도시화 목적으로 건축을 하는 것은 금하고 있다. 1961년 쿠웨이트의 독립 이 후, 쿠웨이트는 사우디아라비아와의 협약을 연장하고자 하였으며, 1966년 양 국은 중립 지역의 같은 면적으로 분할 하였다. 이 후 각 국가에 속한 영토를 자신의 영토로써 편입 시켰다. 중립 지역에서 채굴되는 석유에 대한 배분은 아직 해결되지 않은 상태이지만, 이를 제외한 자원에 대해서는 사우디아라비아와 쿠웨이트가 동일한 소유권을 행사한다.

* 사이드 이븐 따이무르 이븐 페이살 Said ibn Taimur ibn Faisal(1911 – 72)

오만의 술탄(1932-70). 사이드는 타이무르 이븐 파이잘(Taimur ibn Faisal)의 아들로 1932년 국가 경제를 파산되게 한 술탄 타이무르가 영국에 의해 폐위 당한 후 국왕자리에 올랐다. 술탄 타이무르의 심한 낭비에 대한 반작용으로, 사이드의 인색함은 극에 달하였다. 사이드는 독재 권력을 휘두르며, 근대화에 반대하여, 특허 의약품, 짧고 붙는 바지, 라디오, 책, 심지어 안경까지 사용하지 않았다.
1937년 사이드는 석유 채굴권을 Petroleum Concessions에 양도하였다. 제 1차 세계 대전이 끝났을 때, 오만 국내에서 석유 탐사가 진행 되었고, 이맘 갈립 이븐 알리(Imam Chalib ibn Ali)가 탐사를 지휘 하였으나, 여러 문제가 뒷따랐다. 1951년 부라이미 오아시스 주변에서 벌인 석유 탐사는 사우디 아라비아의 심기를 건드렸고 사우디 아라비아는 오아시스의 일부의 소유권을 주장하며 오아시스를 점령하였다. 1954년 이맘 갈립은 오만 이맘 왕국의 독립을 주장하며 사이드에게 도전장을 내밀었으며, 오만 이맘 왕국을 오만 술탄국을 제외한 독립국으로 아랍 연맹의 회원국으로 만들기 위한 시도를 하였다. 1955년 사이들의 군대는 영국의 도움을 받아 이맘 갈립의 왕국을 멸망시켰다. 또한 아부다비와의 공모를 통하여 부라이미 오아시스를 점령하고 있던 사우디아라비아를 몰아내고 권한을 되찾아 왔다.
1957년 이맘의 남동생이었던 탈립 이븐 알리(Talib ibn Ali)는 사우디 아라비아와 이집트의 도움을 받아 오만 내부에서 반란을 일으켰다. 사이드는 1925년 체결한 영국-오만 협약에 따라 영국의 군대 지원을 요청하였다. 탈립의 군대는 점점 세력이 줄어들어 게릴라전 양상을 띄게 되었고, 이집트와 다른 국가들은 영국군이 오만 이맘 왕국에 대해 가한 군사적 공격을 문제 삼아 UN에 제기하고자 하였다. UN 위원회의 조사는 실패로 돌아갔고, 몇몇 아랍 국가들은 UN총회를 설득하는데 성공하여 영국의 오만 식민 지배를 끝내는 결의안을 채택하게 되었다. 사이드는 1058년 살랄라의 자신의 궁전을 버리고 1000km밖의 무스카트 남서쪽으로 피신하는 동안, 오만 정부의 모든 결정은 영국인 공무원들에 의해서 행해졌다. 영국은 오만을 발전시키기 위한 기금을 제공하였다.
1962년 PDO(Petroleum Development Oman)는 Petroleum Concessions의 뒤를 이러 설립되었고, 상업화 할 수 있는 유전을 찾아냈다. 오만의 석유 수입은 1967년 2100만 달러에서 3년후 1억1700만 달러로 높아졌다. 그러나 사이드는 이 수입에 일체 손을 대지 않았다. 사이드는 도파르 주민들의 반란에 시달리게 되었고, 1967년 11월 남 예멘에서 영국이 철수하기로 한 전날 좌파 세력이 권력을 차지하자, 도파르 혁명은 더욱 거세졌다. 좌파 세력의 움직임과 사이드 권력의 불안정함은 영국을 더욱 불안하게 만들었다. 영국은 1970년 쿠데타를 종용하여, 사이드를 폐위 시키고 그의 아들 까부스를 국왕직에 올렸다.

*사익스-피코 협정 Sykes-Picot Agreement (1916) :

1916년 영국, 프랑스 그리고 러시아 사이에서 제 1차 세계대전에서 그들이 승리한 이후에 오스만제국의 영토를 분할하자는 런던과 파리 사이의 비밀 협정이 1916년 5월에 영국의 수석 외교관 마크 사익스(Mark Sykes)와 베이루트의 전 프랑스 영사 프랑소와 피코(Francois Geroges Picot)에 의해서 체결되었다. 이 협정의 조항은 카이로의 영국의 고등 판무관 헨리 맥마흔(Henry McMahon)과 히자즈의 아랍 지도자인 후세인 이븐 알리 사이에서 중앙 패권 집단(오스트리아-헝가리, 불가리아, 독일, 오스만제국)에 대항하는 동맹군(벨기에, 영국, 프랑스, 그리스, 이탈리아, 일본, 몬테네그로, 러시아와 세르비아)의 승리 이후에 오스만제국의 아랍지역에 대한 독립을 약속한 서한과 모순된다. 1916년 10월에 영국, 프랑스, 러시아 사이에 편지가 오가면서 이 협정이 완전히 결정되었다. 이 협정은 이것을 러시아의 볼세비키(Bolshevik) 정부가 관보인, 이즈베스챠(zvestia, News)에 인쇄하여 1917년 12월에 공포되었다.
스카이스 피코 협정은 영국, 프랑스 그리고 러시아의 이익과 관계되어 있었다. 전쟁에 승리하고 나서 러시아는 콘스탄티노플(지금의 이스탄불), 보스포러스(Bosphorus) 해협 옆쪽의 길쭉한 땅, 그리고 러시아와 접경한 터키의 4개 지방의 광대한 영토를 얻었다.
영국과 프랑스가 다음과 같은 조약을 만들었다: 메소포타미아의 바그다드와 바스라지역에 영국의 지배권을 인정하고 시리아와 아르메니아(터키에 있는)에서의 프랑스의 지배권을 인정하고, 그리고 1922년에 영국에 의해 통치되었던 팔레스타인보다 훨씬 작은 지역의 국제 팔레스타인으로 나누는 조약을 만들었다. 나머지는 영국과 프랑스의 영향력 아래 분리되어 귀속된 독립한 아랍 국가나 연합국에 귀속되기로 되었다.
* 사즈마니 체리카이 페다이 칼끼 이란 Sazman-e Cherikha-ye Fedai Khalq-e Iran
페르시아어로써 민중의 자기희생적 게릴라 단체를 의미함. 페다이 칼끄(Fedai Khalq) 참고.

* 사즈마니 무자헤딘 칼끄 Sazman-e Mujahedin-e Khalq
페르시아어로써 민중의 성전 단체를 의미함. 무자헤딘 칼끄(Mujahedin-e Khalq) 참고.

*사회민족전선 Social National Front :

레바논의 정당. 저항단체로 구성된 SNF는 1952년에 등장되었다. 그것은 까미유 샤문(Camille Chamoun)과 관계된 다른 사람들에 의해 이끌어졌다. 1952년 9월에 계속된 부패의 책임으로 비샤라(Bishara)대통령의 사직으로 SNF의 추천으로 샤문(Chamoun)은 의회에 의해 대통령으로 선출되었다. 친서구 외교의 정책을 수행함으로써 아랍 민족주의와의 불화에서 샤문은 그 스스로 줌블라트(Jumblat)가 이끄는 무슬림 SNF로부터 멀리했다. 1957년, 총 선에서 샤문과 SNF 사이의 차이가 훨씬 많이 벌어졌다. 1958년 1차 레바논 내전에서 샤문 지지자와 SNP 간에 전투가 벌어졌고 샤문의 미군개입 요청은 레바논의 3분의 1을 장악하고 있던 SNP를 분노케했다. 그는 재선을 노리기 위한 헌법개정시도를 포기해야했고 후임자로 쉐합장군이 대통령이 되었다.

* 사회주의노동당(이집트) Socialist Labour Party (Egypt)

(1894-1951): 이집트 정당
안와르 사다트(Anwar Sadat) 대통령은 국민 민주당을 만들기 위해 아랍 사회주의당 소속의 거의 모든 의원들을 빼내어, ‘정직한’ 야당을 만들기 위해 힘썼으며, 이브라함 슈크리(Ibraham Shukri)의 지휘 하에서 극우파 정당인 사회주의 노동당(SLP)을 창당하였다. SLP는 캠프 데이비드 협정과 1979년 3월 체결된 이집트-이스라엘 평화 조약을 지지했다. 1979년 6월 총선에서는 392개의 상원 의석 중 26석을 차지하였으며, 1984년 5월 선거에서 한 개의 의석만 확보하였을 때, 대통령 호스니 무바라크(Hosni Mubarak)는 SLP 당원 중 4명을 국회의원으로 임명하면서 그들의 기운을 북돋았다. 1987년 선거에서는 무슬림 형제단이 이끄는 동맹에 가입하고 13개 의석을 획득했다. 국민 진보 통일당을 제외한 모든 여당과 함께 SLP는 비상사태를 해지할 것과 선거는 비 정부 단체가 감독할 것을 요구하면서 1990년 12월 선거에 참여하지 않았다.

* 싸이까 Saiqa(Arabic : Thunderbolt);

아랍어로 번개라는 뜻으로 팔레스타인 특공대를 칭함. 싸이까는1967년 6월 제 3차 중동전쟁 이후 시리아 바아스당의 후원을 받는 Vanguards of the Popular War of Liberation의 군조직이었다. 싸이까는 이스라엘에 대항하는 특공대 작전을 수행하는 부대로 요르단에서 시작되어 PLO에 편입 되었다. 싸디까는 러시아로부터 비밀리에 무기를 제공 받은 첫 번째 팔레스타인 군사 조직 이었으며, 후에 조직원들은 소련에서 훈련받게 되었다. 싸디까는 파타당의 군사 조직 내에서 두 번째로 큰 규모였으며, 1970년 9월 팔레스타인 특공대와 요르단 군대 사이에 있었던 전투에서 싸운 팔레스타인 특공대가 바로 이 싸이까였다. 이들은 시리아 대통령 살라흐 자디드(Salah Jadid)를 설득하여 팔레스타인에 대한 군사 원조를 받아내었다. 싸이까는 무기를 제공 받았으나, 요르단이 탱크와 전투기를 이용하여 역공에 나섰을 때, 시리아의 국방부 장관이었던, 하피즈 아싸드는 공군력을 투입하는 것을 거부하였다.
11월 아사드가 정권을 장악한 이 후, 아사드는 싸이까의 좌파적인 요소들을 이유로 들어 숙청하기 시작 하였다. 싸이까의 후계자였던 주하이르 모신(Zuhair Mohsen)은 사무총장으로 임명 되었고, 그는 싸이까를 시리아 군대 조직 아래에 두어 제어하였다. 1970년대 전반에 걸쳐 모신은 PLO의 국방부를 이끌었다. 1974년 6월 PNC(Palestine National Council)에서 싸이까는 팔레스타인에 대한 모든 위임 통치에서 독립하기 위한 첫 번째 행보로써, 웨스트 뱅크와 가자에 ‘국민 주권’을 형성해야 한다는 주장을 지지하였다. 1979년 모신에 대한 암살은 싸이까 조직에 심각한 타격을 입혔다.
1982년 베이루트에서 추방당한 후 싸이까는 다마스커스를 근거지로 삼았다. 싸이까는 친 시리아 노선이자, PLO의 야세르 아라파트에 대항하는 팔레스타인 민족 구원 전선(Palestine National Salvation Front, PNSF)와 함께하기 시작했다. 이들은 아라파트가 PLO를 설립하기 위해 행했던 모든 일과 함께 요르단의 후세인 국왕에 반대 하였으며, 1980년대 중반부터 시리아의 팔레스타인 난민들의 강한 지지를 받았다. 1987년 4월 PNC가 아라파트가 후세인 국왕과 협의한 사항을 받아들이기를 거부하자, 싸이까 역시 PLO에 대한 보이콧을 중단 하였다.
1990년에서 1991년 쿠웨이트의 위기가 진행되는 동안 이라크의 사담 후세인 대통령을 지지한 아랍파트의 노선에 반대하고 나섰으며, 1993년 9월에는 이스라엘-PLO 조약을 거부하였다.

*살라피야 운동과 살라핀 Salafiya movement and Salafin :

순니파 이슬람 개혁 운동, 신앙심 깊은 조상이라는 아랍어에서 파생하였다. 살라피야 운동은 이슬람 사상가이며 초기 이슬람의 성전에 대하여 연구하였던 자말 알-딘 아프가니(1838~97)의 영향을 받았다. 그의 후계자중의 한 명인 무함마드 압두(1849~1905)는 살라프(선조)가 샤리아를 형성한 점에 대하여 강조하였다. 압두의 후계자인 무함마드 라시드 리다(1865~1935)는 예언자 무함마드와 살라프 알 살리힌의 언행을 연구했으며 그것을 현재의 상황에 적용에 대하여 연구했다. 무함마드는 4대 순니 법학파보다 살라프 알 살리힌을 따르는 것을 선호하였다.
1920년대 이후로 살라피야는 대중의 지지를 얻어야만 개혁운동이 현실화 될 수 있다는 것이 명백해 지자, 살라피야 운동의 추종자들은 살라프 이슬람의 정치적인 세력화를 추구하였다. 이들은 공동사회에서 선출된 칼리프가 예언자 무함마드를 계승한 이후부터는 이슬람에서 권력의 세습은 부정한다. 이들은 걸프 협력 위원회(Gulf Cooperation Council, GCC)의 회원국에 비밀단체로 존재하며, 종교적으로 체제에 반대의 입장에 있다. 이들은 1970년대 중반이후 쿠웨이트에서 주로 활동했으며 이 지역의 민주 공화 정권 수립을 추구하였다. 1979년 11월에 쿠웨이트 출신은 메카 대 사원 습격 사건에 가담하여 사우디 왕정에 반대하는 무장 반란에 참가했다. 비 정치조직으로서 살라핀은 1992년 쿠웨이트 총선거에서 4석을 차지했다.


*살랄 압둘라 Sallal, Abdullah (1917~1994) :

예멘 군인이며 정치가, 대통령(1962~1967), 수상(1962~1963, 1965, 1966~1967). 살랄 압둘라는 북부지역 자이디(Zaidi)에서 대장장이 가정에서 태어났다. 살랄은 바그다드 사관학교에 입학하여 1938년에 졸업했다. 고향으로 돌아 왔을 때 반정부 활동에 대한 혐의로 잠시 구속되었다. 출감후, 그는 다시 군생활을 하도록 허가되었다. 1948년 초, 이맘 야흐야(Imam Yahya)에 대항하는 그의 개인 고문인 압둘라가 이끄는 군대에 참가했다. 그러나 와지르(Wazir)는 왕태자 아흐마드 이븐 아흐야(Ahmad ibn Yahya)에 의해 타도되었다. 살랄은 사형에 처해질 것으로 예상되었으나, 7년 징역으로 감형됐다. 출감후, 호데이다 지방의 총독으로 임명되었다.
살랄은 1956년 무함마드 알 바드르(Muhammad al Badr)의 부하가 되어 경호부대 사령관이 되었고 3년 후 사관학교의 사령관이 되었다. 1962년 9월 18일 알 바드르(al Badr)가 왕위에 오른 뒤, 살랄을 국왕 경호부대의 사령관, 준장으로 임명하였다. 군장교들 중에 비밀 나세르주의자의 지원으로 9월 26일 이맘 바드르(Imam al Badr)에 대한 혁명은 성공을 거두었으나 바드르는 무사히 도망쳤다. 공화국의 대통령이 된 살랄은 스스로 육군 원수로 진급하고 1970년까지 계속해서 예멘 내전에서 공화당을 이끌었고, 1962~63년 동안 수상을 겸직하였다.
공화주의자는 해안평야와 남쪽의 산악지대에 사는 샤페이(Shafei)부족으로부터 지원과 이집트의 도움을 받았다. 반면, 북쪽에 있는 자이디(Zaidi)부족 중의 일부 군주주의자들은 사우디아라비아의 도움을 받았다. 2년 반 동안의 격렬한 전쟁 후에 1년 간은 비교적 잠잠했다. 공화주의자는 군주주의자를 회유하기 위해 이집트대통령 가말 압둘 나세르(Gamal Abdul Nasser)로 하여금 카이로에서 연금상태로 있던 살랄을 풀어주고 북예멘을 운영하는 대통령 위원회의 위원이 되게 하였다.
나세르의 평화 조정 노력의 실패하여, 살랄은 1966년 9월에 사나로 돌아가도록 허락 받았다. 살랄은 대통령직을 부활하고 총리직을 맡아 숙청을 단행하였다. 살랄은 전쟁에서 왕당파에게 빼앗긴 지역을 되찾기 위해 노력하였으나 1967년 6월 아랍-이스라엘 국지전 때문에 실패하였다. 이집트는 북예멘에서 군대를 철수하기로 결정했고 이것은 이집트의 보호아래 있던 살랄의 위치를 약화하였다. 1967년 11월, 살랄이 모스크바를 방문하는 동안 축출되었다. 1981년 10월까지, 그는 바그다드에서 망명생활을 하였다. 알리 압둘라 살리흐(Ali Abdullah Salih)가 대통령직에 있는 동안, 그는 공직으로부터 권한을 박탈한다는 조건 하에 귀국이 허락되었다.

*살람 사엡 Salam, Saeb (1905~2000) :

레바논 정치가, 장관, 1952, 1953, 1960~1961, 1970~1973. 살람 사옙은 베이루트의 유명한 순니파 가문에서 태어났어났다. 살람은 베이루트의 아메리칸 대학(American University)을 졸업했으며 런던대학(London School)에서 경제학과 정치학으로 대학원을 마쳤다. 그 후 여러 가지 가족농업과 산업을 관리했다. 1943년 의회에 선출되고 1957년 대통령 까미유 샤문(Camille Chamoun)에 의해 천거되어 1972년 선거 때까지 공직에 있었다. 1946년 내무장관이 되었고, 1952년과 1953년에 잠시 수상 직에 올랐다. 1956년에 부수상으로 있었으나 수에즈전쟁 당시 이집트에 대항한 영국, 프랑스, 이스라엘의 공격을 비난하려는 그의 제의를 샤문 대통령이 거절하자, 이에 대한 항의로 사임했다. 1958년 카말 줌블라트(Kamal Jumblat)가 주도한 반샤문 대통령 운동에 협력했다. 1960~61년 동안 수상으로 재직한 후, 1960년에 동안 의장이었던 트리폴리파 라시드 카라미(Rashid Karami)가 주도한 의회의 경쟁자인 베이루트파 순니 모임의 회장이었다. 1970년 술레이만 프란지(Suleiman Franjjeh)가 대통령이 된 후, 다음 정권을 구성하기 위해 살람을 초빙했다. 살람은 전대통령인 후아드 쉐합을 추종하는 군부와 공무원을 숙청하였다.
1972년 카말 줌블라트의 민족진보전선과 그의 세력이 등장함에 따라 살람과 같은 전통적인 지도자는 설자리가 없게 되었다. 1973년 4월 수상직을 사임했다. 2년 후, 레바논 내전 직후에 무슬림과 기독교도에게 정당을 주기 위해 군사정권회의가 재건설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여섯 명 중 한사람이 되었다. 1982년 6월에서 8월까지 베이루트를 이스라엘이 포위 공격하는 동안 살람은 서 베이루트로부터 팔레스타인과 시리아정권의 철수를 지시했다. 9월 바시르 게마엘 대통령의 암살이후, 살림은 대통령으로서 아민 게마엘의 선거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후에 레바논 국가와 급진 좌파 연합에 의해 게미엘이 쓰러졌을 때 살람은 순니파 민병대를 구성하는데 실패함에 따라 결국 대통령직에 무슬림을 결집하는데 실패했다. 1980년대 내전이 지속됨에 따라 살람의 영향력은 급속히 감소되었다.


*살리흐, 알리 압둘라 Salih Ali Abdullah (1942~) :

예멘 군 장교이자 정치가, 북예멘의 대통령(1978~90)이었으며 예멘의 대통령(1990~2012)이었다. 하시드(Hashid)부족 연합의 샤한(Sanhan)족인 살리흐는 북부지방에서 태어났다. 초등 교육을 받고 군대에 입대했으며 급속하게 진급을 하였다. 1977년 10월, 이브라힘 하미드 대통령의 암살사건 이후로 타이즈(Taiz) 지방의 사령관으로서 1978년 4월 상대 장교의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군사위원회의 위원장인 아흐마드 가시미를 지원했다. 가시미는 살리흐를 육군 부사령관으로 승진시켰다. 1978년 6월 가시미(Ghashmi)의 암살사건 이후, 살리흐는 참모총장이자 대통령 위원회의 위원이 되었다. 한 달 후 96명의 의원들 중 76명이 그를 대통령직에 임명했다. 그는 내부지원을 얻기 위해 가시미의 암살사건에 대해 그는 남예멘을 비방했다. 10월에 그는 일부 군인에 의한 반란에서 살아 남았다. 그러나 다음 2월 그의 군은 남예멘과 국경을 따라서 거점을 갖고 있는 민족 민주전선(National Democratic Front, NDF)을 추방하는 데 실패했다. 아랍 연맹의 중재에 따라 이듬해 남북 예멘은 통합하였다. 1980년대 중반 살리흐는 국가 민주전선과 협정을 체결하여, 개혁과 비동맹 외교 정책을 추진하기 위하여 통합정치 체제를 형성이다.
1980년 10월 살리흐는 수상 압둘 아지즈 압둘 가니(Abdul Aziz Abdul Ghani)를 압둘 카림 트리야니(Abdul Karim Tryani)로 교체하였다. 그러나 그의 정권강화를 위해 군장교의 추방하고 가족이나 친족들을 주요자리에 천거했으며, 연방정권임에도 불구하고. 권력의 분담을 하지 않았다. 1981년 10월 살리흐는 1천명으로 구성된 국회(General People's Congress)를 일부 임명제와 일부 간접선거를 통하여 장악하였다.
1979년 징집제의 도입과 함께 군사력 강화를 위하여 살리흐는 가격이 저렴한 소련 무기를 선택했다. 이것은 매년 3억 달러의 예산지원금과 기타 경제적 지원을 하는 사우디아라비아를 자극하였다. 1980년 8월 살리흐의 리야드(Riyadh)의 방문으로 사우디는 부분적으로 원조를 다시 했다. 다음 해 봄 살리흐는 그의 가까운 고문 중의 한사람인 압둘라 아스나즈(Abdullah Asnaj)를 사우디아라비아와 미국의 간첩 혐의로 구속했다. 10월에 살리흐는 모스크바를 방문했다. 미국 석유회사의 예멘 지사가 석유를 채굴하였던 1984년에 그는 모스크바에 가서 소련과 친선 협약을 체결했다.
살라흐는 북부지방의 보수적인 부족연합과 남부지방의 국가 민주전선과 균형을 유지했으며 여러 차례의 암살시도로부터 살아남았다. 1983년 대통령직에 재선임된 이후, 살라흐는 압둘 가니(Abdul Ghani)에게 새 정부의 수상으로 임명하였다. 살라흐는 북예멘의 재정 지원국인 사우디아라비아와 우호관계를 유지하며, 남예멘의 좌파를 정기적으로 두 예멘사이의 화합 협정을 갱신하며 관계를 개선하였다. 1988년 대통령직에 재선임 후에 1989년 초 아랍협력위원회(Arab Cooperation Council, ACC)를 결성하고 북예멘과 이집트, 이라크 그리고 요르단과의 동맹에 대하여 적극적인 태도를 보였다. 1990년 5월, 남예멘의 급작스런 경제침체로 인해 남북예멘은 통합되었다.
1990~91년 쿠웨이트의 위기동안 살리흐는 이라크에 반대하는 사우디-미국 동맹의 편승하기를 거절하였다. 국제연합안전보장이사회의 유일한 아랍국인 예멘은 미국의 정책에 반대했고 쿠웨이트 위기와 2차 걸프전에 대한 반대표를 던졌다. 이로 인한 사우디의 보복은 예멘경제에 타격을 주었다. 1993년 4월 총선 결과는 옛 남북부의 정치적 분열만 확인시켰다. 살리흐와 부통령 알리 살림(Ali Salim)과의 협력은 공고해졌다. 1994년 5, 6월, 사우디아라비아가가 남부를 지원하였던 예멘 내전에서 살리흐가 승리했다. 그의 북예멘에서의 지지율은 상당히 올라갔다.


*삼국 조약 Tripartite Agreement (1942) :

앵글로-소비에트-이란, 1942
1941년에 영국과 소련에 의하여 이란이 점령된 후에, 이란과 영국, 그리고 소비에트 연방에 의해 삼국 조약이 1942년 2월에 체결되었다. 삼국조약은 이란군대의 역할을 국내안보 유지에 국한시켰다. 또한, 미국을 이란을 통해 소비에트연방으로 물품을 공급하는 임무수행에 있어서 영국의 속국으로 규정하고 있다. 이 조약은 점령군이 7개월 내에 이란에서 철수할 것을 구체화하였다.


*삼목당 Guardians of the Cedars (삼나무의 감시인들) :

레바논의 정치 그룹. 레바논 국가의 상징인 삼나무에서 이름을 딴 ‘삼목당(삼나무의 감시자들)’은 1975년 4월, 레바논 내전이 발발한 후에 곧 출현하였다. 에테인 사끄르(Eteinne Saqr)가 지휘하는 당원들은 극단적인 민족주의자 마론파들이다. 그들은 레바논의 정체성은 먼 페니키아의 과거에 뿌리를 두고 있고 범아랍주의나 이슬람과는 거의 관계가 없다고 믿는 사이드 아끌(Said Aql)의 글에 의해 영감을 받았다. 1976년 1월에 그들은 통일된 군 지휘권을 만들기 위해 다른 마론파 전사들과 결합하였다. 이스라엘과의 연결에 개방적이어서 그들 중 많은 숫자가 1978년 3월 이스라엘의 남부 레바논 침공이후 형성된 이스라엘 후원하의 남부 레바논군에 합류하였다. 1980년 후반 마론파 공동사회가 분열되었을 때 그들은 8개의 정치, 군사적인 파벌 중 하나가 되었다. 1990년 10월, 내전이 종식되었을 때 그들의 영향력은 감소하였다. 1992년 국회의원 선거에서 마론파들에 의한 선거 보이콧트에 대해 그들의 지지는 그들을 더욱 무시되게 만들었다.


*삼자선언 Tripartite Declaration (Anglo-US-French, 1950) :

1950년 5월 25일, 영국, 미국, 프랑스 3개국 주도하의 중동 공동 선언문의 목적은 3가지로 요약된다. 첫째, 영국과 프랑스가 아랍 국가들과 체결한 조약에 따라, 이 지역의 무기는 영국과 프랑스로부터 구입되어 왔으나, 이 선언문을 계기로 미국도 기존 무기공급 국가와 대등하게 중동지역에서 무기 판매를 할 수 있도록 전폭적인 지지 의사를 표명하였다. 둘째로, 중동지역의 중요 현안에 대한 서방 3개국의 기본적 입장을 밝힌 것이며, 마지막으로 지역 방위 협약 체결을 위한 기본적인 토대를 구축하는데 그 목적이 있다고 할 수 있다.
이 선언문의 내용에는 선언문 조인국들이 1949년 이스라엘과 이스라엘 주변국들의 잠정적인 협의를 통해 설정한 휴전 경계선을 계속 유지시키겠다는 결의안을 포함하고 있으며, 또한 이스라엘과 아랍 국가들이 자국에 대한 자주 방어를 할 수 있도록, 이들 국가들에 무기 판매를 허용하는 것과 중동지역의 일원으로서 중동지역 방위에 상기 국가들이 그 역할을 충분히 할 수 있도록 허용한다는 내용이 포함 되어있다. 따라서, 이번 선언문은 서방 3대 강대국 주도하의 지역 방위 조약을 이끌어 낼 수 있는 중대한 이정표로 여겨지고 있다.
과거 3자선언문의 공동 조인국과 터키는 수에즈 운하기지 주변에 중동방위 사령부를 창설하자고 이집트에 제안하였으나, 이집트가 거부 의사를 밝혔었다. 그러나 서방 선진국들은 지속적인 노력 끝에, 1955년 2월 바그다드협약에서 그 안건을 다시 논의할 수 있게 하였다.


*상 레모 협정 San Remo Agreement :

상 레모 협정은 벨기에, 영국, 프랑스, 그리스, 이태리와 일본에 의해 구성된 국제 연맹 상임이사국(1920~45)이 1920년 4월 이태리 상 레모에서 중동에 대하여 협의한 내용이며, 주요결정은 다음과 같다. 영국과 프랑스는 중동에 대한 위임통치를 결정하며 이에 대한 논의와 투표를 위해 연맹에 그들의 제의를 제출한다. 프랑스는 시리아와 레바논을, 영국은 팔레스타인과 메소포타미아(후의 이라크)에 대한 통치를 위임받았다. 영국은 발포어 선언(Balfour Declaration)을 통하여 팔레스타인에 대한 영향력을 강화하였다.


*샤레트, 모세 Sharett, Moshe (1984~1965) :

이스라엘의 정치가, 수상(1954~1955). 모세 쉐르톡은 러시아의 유대인 가정에서 태어났으며, 1906년 팔레스타인으로 가족이주를

 
 

Total 14
제   목
<ㄱ> 가쉬미 - 국제연합안전보장이사회 결의안 598
<ㄴ> 나본 - 노루즈
<ㄷ> 다국적군 (레바논내) - 딤미
<ㄹ> 라디노어 - 레바논-이스라엘 평화협정 (1983)
<ㅁ> 마나마 - 무사디끄
<ㅂ> 바그다드 - 베이루트
<ㅅ> 사나 - 샤레트
<ㅇ> 아구다트 이스라엘 - 아랍-이스라엘 전쟁
<ㅈ> 자이드파 - 중동평화회담 (마드리드 1991)
<ㅊ> 천연가스 - 총인민회의(예멘)
 1  2  
명지대중동문제연구소, 서울시 서대문구 남가좌동 50-3, 우120-728,
직통TEL: 02-300-1884, 교환TEL: 02-300-1700, FAX: 02-307-6189, 대표이메일: imea@hanmail.net
Copyright ⓒ 명지대중동문제연구소, All Rights Reserved.
개인정보보호방침 | 이메일무단수집거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