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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ㅇ> 아구다트 이스라엘 - 아랍-이스라엘 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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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구다트 이스라엘 Agudat Israel (히브리어-이스라엘 연맹) :

이스라엘 정당이며 극단적인 정통유대인의 국제적인 조직인 아구다트 이스라엘은 종교적인 시각에서 유대문제를 제기하기 위하여 독일, 폴란드, 우크라이나의 극단적인 정통유대인에 의해서 1912년에 폴란드 카토위체에서 결성되었다. 모든 회원은 유대생활에서 율법을 우선적으로 받아들여야 했다. 팔레스타인에 있는 신자들은 이슈브(Yishuv)의 준 정부기관을 거부했다. 그들은 인간노력을 통한 이스라엘창설이 한 ‘집단’으로서 이스라엘이 메시아에 의해 구제(속죄)될 것이라는 신념을 갖고 여성참정권에 반대했다. 그들은 유대인들을 인종적 종교적이라고 생각했고, 유대문제는 오직 율법에 의해 해결될 수 있다고 믿었다.
팔레스타인에 있는 회원(일원)들이 키부츠와 신학기구들을 설립하기 위해 유대민족기금으로부터 기금을 받았을 때, 1935년에 뉴트레이 카르타(Neturei Karta)를 형성하는 반대자들과 불화가 있었다. 제2차 세계대전까지 아구다트는 주로 극단적인 정통유대인 50만이라는 세계 회원수를 호소했다. 1947년, 세계 중앙회의가 뉴욕, 런던, 그리고 예루살렘에 국제센터를 설립했다.
이스라엘이 1948년에 창설되었을 때, 아구다트는 국가문제에 참여하기로 결정했다. 1949년 제1차 총선거전야에 통일종교전선을 구성하기 위해 미즈라히블록(권) -미즈라히와 파올레 하미즈라히- 과 함께 차례로 동맹했다. 그것은 16석을 획득했고, 특히 종교문제 부서를 운영하기 위해 정부에 참여했다. 아구다트블록은 개별적으로 1951년 선거에서 5석을 얻었다. 그것은 정부에 참여했으나, 여성징병을 규정한 법통과에 반대하여 물러났다. 아구다트당은 1977년에 끝났던 노동당시대 동안 야당으로 머물렀다. 후에, 그들은 1981년에 4석과 1984년에 2석의 의석을 획득하면서 합병했다. 1988년 선거전야에 그들은 통일 토라유대주의를 구성하기 위해 작은 두 종교단체와 결합했다.


*아깁토스 :

꼽뜨교회와 꼽뜨인 참조.


*아끌, 사이드 Aql Said (1911~) :

레바논 작가. 자흘레(Zahle)출신으로 마론파(Maronite)가정에서 태어난 아끌은 훌륭한 시인으로 인정받았다. 그는 아랍 시에서는 드물게 상징적 표현을 사용하였으며 전통적으로 사용되어 내려오던 고전적 아랍어 대신에 일상적 아랍어를 사용하여 시를 썼다. 지식인으로서 그는 레바논인들은 페니키아에서 전통을 찾아야 하며 이슬람이나 아랍주의와는 아무 관계가 없다고 주장하였다. 또한 라틴 알파벳을 기반으로 레바논에 알맞은 언어를 개발했다.
아끌의 주장은 마론파 지식인들 사이에서 많은 지지를 받았으며 시리아와 힌두교가 지배하고 있는 아랍과는 다른 정체성을 가진 나라가 레바논이라는 인식을 가지게 하였다. 2차 세계 대전 이후 아랍 내에서 민족주의가 팽배하자, 아끌의 이론은 그 기반을 잃었다. 하지만 이후 많은 수의 팔레스타인인들이 레바논에 도착하자 마론파들 사이에서 아끌의 이론이 다시 살아나기 시작했으며 ‘삼목의 수호자’라는 골수 민족주의자들의 지지를 받았다.


*아나이자 부족 연맹 Anaiza (Anaza) tribal federation

아나이자는 아라비아 반도에 분포하고 있는 25개 주요 부족 연맹 중 하나이다. ‘아랍’이라는 명칭은 ‘야랍(Yaarab)'부족에서 기인하였다고 여겨지는데, 아나이자 부족이 이 야랍(Yaarab) 부족의 직계 후손이라는 주장에 따라 아랍 내에서 고귀한 혈족으로 여겨진다. 아나이자 부족의 기원은 15세기로 거슬러 올라가며, 이들은 나즈드의 디라이야 주변 지역에서 거주했다. 사우드가문은 아나이자 연맹 중 루왈라 부족의 마살리크(Masalikh)파에 속하며, 쿠웨이트의 사바(Sabah)파의 통치자는 아나이자 연맹의 아마라트 부족이다.
부족주의(Tribalism) 참고.


*아노 문디 AM (Anno Mundi, 라틴어-세계의 해)

유대력에 기록 되어 있는 구약성경 창세기에 따른 창조의 날로써, B.C.E 3760년을 기준으로 삼는다. 유대인들은 B.C.E 3760년을 기준으로 해를 계산한다.
유대력(Jewish calendar) 참고.


*아덴 Aden :

통일 전 남예멘의 수도, 인구는 50여만 명. 아덴만에 위치한 그 도시는 성서시기로 거슬러 이어지는 상업적인 역사를 가지고 있다. 그것은 636년에 아랍무슬림들에 의해 정복되었고 1538년에 오스만 터키 통치하에 들어갔다. 영국이 1802년 조약에 의해 이곳에 도착해서 1839년에 이곳을 인도에 합병함으로써 행정을 접수했다. 이것은 아덴이 영국관할식민지로 변경되었을 때인 1937년까지 계속되었다. 1869년 수에즈 운하개통에 따라 아덴은 영국과 인도사이의 해로에 있는 항구공급소가 되었다. 1953년에 정유공장이 거기에 세워졌다. 1967년 6월에 수에즈 운하의 폐쇄에 따라, 선박의 연료보급이 급격히 떨어졌다. 5달 후, 아덴은 독립한 남 예멘의 수도가 되었다.
새 좌익정권은 3년 후, 아덴의 자유항 지위를 중지했다. 역시 아덴 북쪽 카우르 마스카르에 있는 이전의 영국공군기지를 국제공항으로 전환했다. 아덴의 정유제련소는 1979년 혁명 후, 이란으로부터 원유를 공급받기 시작했다.
1990년, 북예멘과 남예멘의 통합에 따라, 아덴은 지방 수도로 유지되었다. 그러나 그 도시는 1994년에 남예멘 출신 정치인들의 반정부 운동으로 내전이 발생하여 사나의 정부군이 아덴을 폭격함으로써 이 도시는 큰 피해를 입었다.


*아도니스 Adonis :

아스바르, 알리 아흐마드 사이드 참조.


*아디스 아바바 협정 Adis Ababa Accord :

1972년 2월 27일에 조인된 협정으로 1955년이래 지속된 수단 북부 아랍족과 남부 아프리카족 간 내전이 종식되었다. 이 협정은 인종, 피부, 종교에 관계없이 모든 시민들에게 평등, 남부의 문화정체성, 남부 관습에 맞는 법률제정권 등을 인정하고 이를 근거로 남부에 자치권을 부여했다. 이로써 내전종식, 종교의 자유허용, 아랍어와 영어를 공용어로 지정함으로써 평화가 이룩되었으나 니메이리(Nimeiri)의 정치, 경제실패는 이슬람 원리주의 조직인 수단 무슬림형제단의 이슬람 복귀 압력을 받게 되고 그가 다시 이슬람화를 실시하자, 1983년 5월 남부의 존가랑(John Garang)이 이끄는 수단인민해방군(SPLA)이 정부군에 맞서 싸움으로써 내전이 재발했다.


*아라비아반도 Arabian Peninsular :

지역: 약 291만㎢
인구: 35백여만 명
이 지역의 주생활지는 해안의 평야지대이며 필리핀 등 아시아 각국과 접촉이 빈번하며 아프리카의 동쪽 해안과 맞닿아 있다. 역사는 시바와 마인의 제국이 분리되어 있던 고대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해안 지방에 사는 사람들은 유목 생활을 하고 있으며 인도와 지중해지역에서 무역을 통하여 생활하고 있다.
이 지역의 주된 종교는 720, 30년경 들어온 이슬람교였다. 종교를 바탕으로 뭉쳐 아라비아의 부족들은 인근 지역을 점령해 세력을 넓혔지만 661년 수도가 메디나에서 다마스커스로 옮겨지자, 아라비아는 세력이 축소되었다. 1517년 아라비아는 오스만제국에 종속되었으며 400년 간 종속상태를 벗어나지 못했다. 18세기 중반 중심부인 네지드 지역이 와하비 종파의 영향 하에 놓였다. 추종자 중 한사람인 알사우드는 자신의 제국을 건설해 사우디아라비아라 이름지었다. 이후 제 1차 세계 대전에서 오스만 제국이 붕괴와 더불어 사우디아라비아 왕국이 건설되었다. 사우디 외에 쿠웨이트, 바레인, 카타르, 오만, 아랍 에미레이트 연합국, 예멘이 아라비아반도에 위치한다.


*아라비아반도 인민연합 Union of the People of Arabian Peninsula :

1950년대 후반, 나세르주의를 표방하는 아라비아반도 인민연합(UPAP)이 사우디 왕정을 제거할 목적으로 설립되었다. 사우디아라비아에서는 활동이 금지되었으므로 베이루트에 본부를 두었다. 1966년, 이 단체는 사우디 국방부와 동부 유전지대인 담맘의 보안사무소를 폭파하였다고 주장하였다. 1970년, 가말 압둘 나세르가 사망하자, 이 조직은 쇠퇴하였다. 1979년, 이슬람 민병대가 메카의 대 사원을 점령하자 잠시 활동을 하였으나 곧 지하에 모습을 감추었다.


*아라비아의 로렌스 :

로렌스, 토마스 에드워드를 보라.

* 아라비아 반도의 이슬람 혁명 단체 Organization of the Islamic Revolution in the Arabian Peninsula

1979년 11월 말 폭동 중에 사우디아라비아의 동부 지역에서 쉬아파의 아슈라 행진 동안에 쉬아가 중심인 아라비아 반도 이슬람 혁명 단체(OIRAP : Oraganisation of the Islamic Revolution in the Arabia Peninsula)의 존재가 드러났다. 이란에서 아야툴라 루홀라 호메이니(Ayatollah Ruholla Khomeini)의 쉬아 정권의 출현으로 들뜬 사우디아라비아의 쉬아들은 동부 해안에 모였고 오랜 기간의 아슈라 축제 금지를 깨고 주요 도시 중심에서 호메이니를 찬성하는 행진을 벌였다. 사우디아라비아 당국은 폭동을 제지하기 위해 2만명의 국가 요인 경호대(National Guard)를 배치했다. 그러나 정부군과 쉬아 군 사이에 산발적인 시위와 총력전은 2달동안 계속되었고 57명의 정부군과 99명의 쉬아파의 사망, 약 6천명의 체포로 이어졌다.
OIRAP에 대한 탄압과 OIRAP의 리더 싸이드 사프란(Said Saffran)이 이란으로 추방당했음에도 불구하고 OIRAP는 계속 비밀활동을 해나갔다. OIRAP의 지지자들은 자신들의 견해와 비밀스러운 조직을 유지하기 위해서 성지순례 기간 동안 이란 순례자들과의 접촉에 애썼다. 사프란은 이란에서 신문을 발행하고 사우디아라비아의 왕족에 대항하여 이슬람 실황방송을 계속 방영했다.

*아라파트, 야시르 Arafat, Yasser (1929~2004) :

팔레스타인의 정치가로 본명은 무함마드 압두 라우프 알꾸드와이다. 상인이었던 아버지에게서 태어나 가자지구의 칸 유누스에서 살았다. 이후 아버지가 예루살렘에서 사업을 하기도 하였다. 아라파트는 카이로에서 태어났다. 아라파트나 부모 모두 1948~49년 팔레스타인 전쟁 당시 가자지구에 있었다. 아라파트는 1955년 카이로 대학에서 토목공학을 전공하였으며 팔레스타인 학생회 회장직을 맡기도 했다. 수에즈 전쟁 당시에는 이집트군에서 엔지니어로서 일하고 있었으며 쿠웨이트로 와서 직장을 잡게 된다.
가자 출신의 동료인 살라흐 칼라프와 칼릴 와지르과 함께 아라파트는 1958년 비밀 조직을 결성하고 이름을 파타(Fatah)라고 하였다. 5년 후, 알제리의 수도에 사무실을 열고 동지들을 훈련시켰으며 대중들을 동원하여 팔레스타인 해방을 시킨다는 파타의 목적을 위해 싸울 수 있었다. 1964년 다마그커스에서 아라타트가 이끄는 파타는 시리아에서 이스라엘에 대항하여 게릴라 활동을 벌였으며 1965년 1월 1일, 첫 번째 작전을 수행하였다. 1967년 6월, 아랍-이스라엘 전쟁 이후 아라파트는 나세르 이집트 대통령을 만나 지원을 약속 받았지만 자금을 지원 받지는 못했다.
1968년 3월 파타는 요르단의 국경 도시 카라메에서 이스라엘과 전투를 벌였으며 이로 인해 아라파트와 파타의 명성이 높아지게 되었다. 4개월 후, 파타는 팔레스타인 민족회의(PNC)에 대한 반대를 철회했다. PNC의 산하 기구 PLO는 1964년 5월에 조직되었다. 파타 대표들은 1968년 7월 카이로에서 열리는 PNC의 제 5차 회담에 참석하였다. 파타는 15,000명의 게릴라 단원을 거느리고 있었으며 PLO의 최대 기구로서 활동하였다. 1969년 초, PNC는 6차 회의에서 아라파트를 PLO의장으로 선출하였다. 아라파트는 파타 내에 있는 좌익과 우익 세력사이에 벌어지는 갈등을 중재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으며 그의 이러한 중재 기술을 이용하여 팔레스타인 단체들, 즉 레닌주의자, 범아랍주의자 그리고 민병대 사이의 갈등을 해결하는데 탁월한 기술을 발휘하였다. 그가 이러한 능력을 발휘하는 데는 2가지 중요한 원칙이 있었다. 즉, PLO활동에 있어 아랍 국가들 사이의 단합이 필요하며, 또 팔레스타인의 해방을 위해서는 모든 계층의 사회 정치가들의 의견들이 반영되어야 한다. 1970년~71년 벌어진 팔레스타인-요르단 간의 전쟁으로 인해 PLO는 암만에서 베이루트로 본부를 옮겨야 했다. 이곳에서 PLO는 아라파트의 지도력과 개인 및 정부의 재정적 지원으로 인해 국가가운데 국가를 형성할 수 있었다.
1974년 10월, 아랍 정상회담에서는 PLO를 팔레스타인을 대표하는 유일하고 합법적인 단일기구로서 인정하였다. 다음 달 아라파트는 유엔 총회에서 팔레스타인을 대표하여 연설을 하였다.
PNC는 서안지방과 가자지구를 거점으로 하여 팔레스타인 해방을 위하여 노력했다. 친소련 단체가 PNC활동에 가담하였으며 PNC의 노선에 적극 가담하였다. 1968년 7월, 아라파트가 소련을 방문하였는데 이로 인해 소련을 아라파트와 PLO의 활동에 많은 관심을 보이는 계기가 되었으며 팔레스타인의 해방노력을 적극 지지하였다. 1975년 4월 발발한 레바논 내전에서 아라파트와 다른 팔레스타인 지도자들은 좌익인 레바논 민족운동을 지지하였다. 아라파트는 또한 이집트가 미국의 주도로 이스라엘과 독단적으로 평화 협상을 실시라는 것을 결사 반대하였으며 이로 인해 좌익으로 돌아서게 된다.
1980년 5월, 파타의 4회 의회개막에서 유대국가를 상대로 무장 투쟁을 하기로 결의하였으며 결과적으로 1982년 6월, 이스라엘이 레바논에 진격하여 베이루트를 점령하자 이스라엘은 아라파트의 PLO 본부를 투니스로 옮기게 하였고 이로 인해 팔레스타인 전사들은 아랍 국가 각지로 흩어지게 되었다.
1985년 2월, 요르단의 후세인 국왕과 모임을 가진 아라파트는 요르단과 함께 이스라엘과의 평화 노력에 함께 하기로 했으며 요르단과 연합체를 결성하게 되었다. 하지만 아라파트는 PLO회원들의 지지를 얻는데 실패하였다. 1987년 4월 아라파트는 후세인 국왕과 무바라크 이집트 대통령과 함께 힘을 합하게 되었고 이로 인해 하피즈 아사드 시리아 대통령과의 관계가 악화되었다.
1988년 11월, PNC는 알제리에서 모임을 가지고 아라파트가 이끄는 팔레스타인 국가를 공식적으로 인정하였다. 아라파트는 이스라엘에 대한 테러 행위를 반대하였으며 가자지구, 서안 지구, 동 예루살렘으로 구성된 팔레스타인 국가가 이스라엘과 공동으로 평화 노력을 기울일 것을 PNC와 함께 승인하였다. 다음 달, 제네바에서 열린 UN 총회에서 아라파트는 자신의 이러한 입장을 재 천명하였다. 이로 인해, PLO와 미국은 관계를 정상화하였다. 하지만 아라파트가 팔레스타인이 이스라엘의 군사 거점을 공격한데 대하여 소극적인 자세를 보이자 미국은 1990년 7월 협상을 단절하였다.
이 일과 소련의 유대인들이 이스라엘로 이주를 계속하자 아라파트는 이라크의 급진주의자들과 노선을 함께 하였다. 그는 1990년 8월, 이라크가 쿠웨이트를 점령하자 아라파트는 이를 지지하였는데 이로 인해, 그는 걸프만의 부유한 국가들로부터 따돌림을 당했으며 결과적으로 PLO에서 지지세력 기반의 약화를 가져왔다. 또한 그는 이집트, 시리아로부터도 외면을 당했는데 이집트와 시리아는 반이라크 노선을 걷고 있었다. 1991년 2월, 이라크가 패망하자, 아라파트는 자신의 인기를 되찾고 싶었지만 힘든 작업이었다. 자신의 오랜 동료인 칼릴 와지르(1988년 4월 암살 당함)와 살라흐 칼라프(1991년 1월 암살 당함)로부터도 외면을 당하자 아라파트는 크게 낙담하였다.
소련과 미국의 주도 하에 열린 중동 협상에서 아라파트는 요르단 대표단에 요르단과 팔레스타인의 친이스라엘 세력을 포함시켜달라는 이스라엘의 요구를 받아들였다. 이 협상이 성과를 거두지 못하자, 아라파트는 비밀 조직을 결성하여 이스라엘과 노르웨이에서 비밀 협상을 가졌다. 이를 계기로 아라파트와 이스라엘 총리인 라빈이 자리한 가운데 1993년 9월 13일 오슬로 협정(Oslo accord)이 맺어졌다. 이로 인해, 이스라엘은 점령 지구내의 가자와 서안지방 조금을 팔레스타인 측에 내주었다. 1994년 7월, 아라파트는 가자로 가서 가자지구와 여리고 지방에서 팔레스타인 자치 정부(PA)의 대통령으로 역할을 수행하였으며 1994년에는 라빈 총리와 함께 노벨 평화상을 수상하였다. 1995년 9월 아라파트는 이스라엘과 서안지방 자치 협정을 맺었다.
계속되는 평화회담 중에 팔레스타인 원리주의 단체인 하마스와 이슬람 지하드의 대 이스라엘 테러로 협상은 계속 결렬되면서 2000년 9월 샤론의 알아끄사 사원 방문으로 야기된 제 2차 팔레스타인 민중봉기는 이스라엘의 무자비한 진압과 이에 대한 자살폭탄 테러로 팔레스타인은 무정부 상태에 이르렀다.
이스라엘 강경파 총리 샤론과 미국의 강경파 부쉬의 만남은 팔레스타인 문제를 더욱 어렵게 만들어 갔다. 미-이스라엘은 아라파트를 밀어내고 새로운 온건주의 지도자와 협상을 벌이려하고 있다.


*아랍 Arab :

아랍인들은 구약에 나오는 아브라함과 여종 하갈 사이에 난 서자 이스마엘의 후손이라 믿고 있다. 구약에서 역대기에서는 아랍인들이 7,700마리의 양과 7,700마리의 염소를 유대왕 여호사밧에게 바쳤다는 이야기가 나오는데 이것은 아랍인들의 유목 전통을 보여주는 것이다. 기원전 8세기 아시리아의 샬만네세르 3세의 무덤에 새겨진 것을 보면 왕이 무찔렀던 반란군들을 “Gindibu the Arabi”라고 적고 있다. 이후 앗시리아와 바빌론에서 Arabi 혹은 Arab이라는 단어들이 자주 등장하는데 이것은 아라비아반도 북부와 중부에 살고 있던 유목민들을 가리키는 단어였다. 그리스와 로마 문명이 번창하던 당시에는 아랍이라는 단어는 아라비아반도 전체에 살고있는 사람들을 가리키는 말이 되었다.
아랍이라는 단어는 셈족어의 파생어이기도하며, ‘지나감’을 의미하는 ‘Abhar’에서 나온 파생어로 생각되기도 한다. 유목민인 아랍인들은 자연을 숭배했다. 이들은 바위, 샘물, 나무 등을 우상으로 숭배했으며 7세기 중엽 이슬람교가 들어올 때까지 미신을 숭배했다. 하지만 오아시스에 살고 있던 아랍인들은 유대교나 배화교의 영향 하에 있었다. 현대에 와서 아랍이라는 것이 의미하는 것은 아랍어를 하는 사람들을 의미한다.


*아랍계 유대인 Arab Jews

아랍 국가 출신의 유대인.
오리엔탈 유대인과 세파르딤(Sephardim) 참고.


*아랍 민족주의 Arab Nationalism :

아랍의 민족주의는 외세 대항 이데올로기로 등장하여 처음에는 오스만 터키, 그리고는 영국과 프랑스 제국주의로부터의 독립이었다. 19세기 이집트는 오스만 제국의 통치를 반대했는데 이것이 민족주의 발생의 기원이 되었다. 오스만 술탄은 1805년 무함마드 알리(Muhammad Ali)를 이집트의 총독으로 임명하였는데 이것은 오스만이 이집트를 위해 마련한 직책이었다. 당시 카이로는 오스만 제국에 불만이 있는 비 이집트계 아랍 지식인들이 모여 활동을 하던 곳이었다. 카이로라는 장소가 이들에게 상대적인 자유를 부여할 수 있었기 대문에 아랍의 민족주의뿐 아니라 범이슬람주의가 발전할 수 있었다.
1869년 수에즈 운하의 개시와 더불어 오스만은 세력을 다하고 영국이 새로운 식민주의 세력으로 자리잡았다. 따라서 아랍의 민족주의는 영국에 대항한 것이었으며 1882년 아흐마드 오라비 대령(Col. Ahman Arabi Pasha)가 영국의 개입을 군사적인 방법으로 막으려 시도했을 때가 민족주의의 발흥기였다.
이집트 이외의 지역에서는, 특히 레반트(Levant)는 1860년대 미국과 프랑스의 선교사들에 의해 설립된 교육 기관인데 아랍의 정치적 부활을 위한 토양을 제공하였다. 뿐만 아니라 이들의 활동으로 인해 비밀 결사 조직인 알아흐드(al Ahd, The Covenant)와 알파타트(al Fatat, The Young Woman)이 결성되었다. 오스만제국이 이들 단체를 억압하자, 이들은 1882년 말 이집트로 거점을 옮겨 활동을 하였다. 하지만 제 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기까지는 주목할 만한 사건을 일어나지 않았다. 그 동안 오스만제국에 대한 반감이 커졌으며 영국은 이를 이용하여 1916년 메카 주지사 후세인을 필두로 아랍의 반란(Arab Revolt)가 일어나게 되었다. 전쟁 후, 아랍인들은 영국과 프랑스에 패배감을 느끼게 되었으며 이들 두 나라는 사익스-피코 비밀조약(Sykes-Picot Agreement)을 통하여 아랍세계에 서방의 영향력을 행사하게 되었다.
이집트에서 발생한 아랍 민족주의는 와프드당(Wafd Party)을 중심으로 한 것이었다. 이 이외에도, 트랜스요르단의 하쉼가 왕조를 중심으로도 발생하였는데 이들은 당시 이라크와 트랜스요르단을 통치하고 있었다. 하지만 영국과 파이잘 2세 국왕이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다는 것이 드러났고 이에 대해 아랍의 민족주의자들은 많은 반대를 했다. 트랜스요르단의 압둘라 왕 역시, 민족주의자들을 실망시키는 행동을 계속하였다.
1945년, 아랍 연맹이 창립되던 무렵 아랍 민족주의는 지역성을 띠기 시작했다. 카이로에 본부를 두고 있었기 때문에 아랍 민족주의를 바탕으로 이집트 민족주의가 싹틀 수 있었다. 특히, 1952년 민족주의자들과 나세르가 이끄는 공화파들이 부패 귀족을 처단한 후, 이러한 민족주의는 번성할 수 있었다.
50년대가 지나갈 무렵인 1956년, 이집트는 마침내 자국의 영토에서 74년 간 머물러 왔던 영국 식민세력을 종식시킬 수 있었으며 나세르는 아랍 민족주의의 상징으로 부상하였다. 하지만 나세르는 이론가이기보다는 실용주의 지도자였다. 그는 바아스당의 도전에 맞서게 되었으며 바아스는 이론적 기반을 갖춘 정당이었다. 1990년, 아랍의 민족주의는 바아스당의 지도자인 이라크의 사담이 쿠웨이트를 침략하자 심한 타격을 입었다. 이러한 사건은 아랍 연맹의 회원국이 같은 회원국을 향해 저지른 최초의 적대 행위였다.


*아랍 민족주의자 운동 Arab Nationalist Movement, ANM :

범아랍 정당. 아랍 민족주의 운동(The Arab Nationalist Movement: ANM)은 1952년 창설되었으며 베이루트에 있는 아메리칸 대학교의 학생과 교직원들이 주축이 되었다. 조지 하바쉬(Geroge Habash), 나이프 하와트메(Nayif Hawatmeh), 아흐마드 카십(Ahmad Khatib)을 중심으로 창설되었으며 이들의 주된 슬로건은 “아랍의 통일, 팔레스타인 해방, 시온주의 국가에 대한 복수”였다. 그들은 아랍 세계를 혁신하여 근대화를 단행하고 있는 유대인들과 대항하여야 한다고 생각하고 1953년 이집트 무장 쿠데타를 일으켰다. 1958년 ANM은 통일라랍공화국의 탄생을 지지하였으나 3년 후, UAR이 몰락하자 실망을 감추지 못했다. 또한, 이집트, 시리아, 이라크가 단합하지 못하게 되자 ANM은 나세르의 지지자뿐만 아니라 바아스의 지지자들에게 많은 실망을 안겼다. 팔레스타인 해방이 최고 우선 과제였기 때문에 1960년대 중반 ANM은 팔레스타인 지역에 자체적으로 무장 게릴라 단체를 만들고 이스라엘을 상대로 싸우기 시작했다.
이집트 이외에서 특히 나세리즘이나 바아시즘이 약한 곳에서 많은 효과를 거두었으며 아라비아반도가 대표적인 예이다. 1959년 영국이 아덴 식민지, 동부 걸프연안국 보호령화를 시도하려는 움직임을 보이자 이를 저지하기 위해 ANM의 남예멘 지부에서 무력 행동을 취할 것을 촉구하였다. 4년 후, ANM은 남예멘에서 활발하게 활동하는 민족주의 단체들을 결속시키는데 성공하였으며 북예멘의 수도인 사나에서 의회를 구성하고 남예멘에서 민족 전선이 부상하게 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남예멘의 해방을 위한 민족 전선은 무력 행동을 취하여 독립을 갈구하였고 1967년 드디어 성공하였다.
1962년 초 ANM의 도파리 지지자들은 도파리(Dhofari) 좌익 해방 전선 지지자들과 결탁하여 도파르의 독립을 성취했다. 1963년, 남예멘에서 일어난 반란으로 ANM의 도파리 지부는 좌익 DFL과 손을 잡고 10년 동안 이 곳에서 게릴라 작전을 폈다.
사우디의 아랍 민족주의자 운동(Arab Nationalist Movement, Saudi Arabia): 1964년 다란지역에서 비밀 조직으로 출발한 ANM은 1966년 초, 점진적으로 세력을 넓혀가게 되었다. 3년 간, ANM은 군인, 노동자, 공무원, 교사들을 중심으로 기반을 다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ANM이 1969년 6월, 주도한 폭동은 실패하였다. 이에 가담한 200여 명이 체포되었으며 수십 명이 처형당했고 당은 해체되었다.

북예멘의 아랍 민족주의자 운동(Arab Nationalist Movement, North Yemen): 1960년대 초 북예멘에서는 ANM이 나세르를 지지하였다. 하지만 이후 나세르와 사우디 왕이 1967년 6월, 아랍-이스라엘 전쟁 이후 화해하자 나세르의 지지자들은 왕족들과 타협을 하였고 ANM은 이를 반대하였다. 1968년 1월, 왕당파들이 사나를 포위하자 ANM은 사나의 노동자들과 함께 이 곳을 지켰다. 2월 왕당파들이 포위를 포기하였고 위기는 끝이 났지만 공화당 내의 온건파들이 ANM을 포함한 좌익 세력을 공격하였다. 군부 역시 ANM세력을 축출하였으며 당내의 좌익 세력은 지하조직이 될 수밖에 없었다.


*아랍민주전선 Arab Democratic Front (이스라엘) :

이스라엘 정당. 1988년 나사렛에서 창당된 아랍민주전선(ADF)은 이스라엘의 아랍인들의 결속을 주장하였다. 이들은 팔레스타인인들의 자치 인정팔레스타인 해방 기구 인정, 아랍 점령지에서 이스라엘인의 철수 등을 요구했다. ADF는 1988와 1992년 선거에서 승리를 거두었다.


*아랍 바아스 사회당 Arab Bath Socialist Party (시리아) :

미셀 아플락(Michel Aflaq)과 살라흐 딘 바이타르(Salah al-Din Bitar)는 1940년 다마스커스에서 아랍 바아스 운동(Movement of Arab Baath)이라는 단체 설립하였다. 그들은 책자를 발간해 혁명주의, 사회주의, 아랍 민족주의들을 설명하였고 아랍 단합에 일조하였다. 식민 세력이었던 프랑스가 1946년 4월 시리아를 떠나자, 그들은 도시민에 기반을 둔 아랍 바아스당(Arab Baath Party)을 설립하였다. 1954년 3월에는 자키 아르수지(Zaki Arsuzi)가 이끄는 아랍 사회당(Arab Socialist Party)과 합당하여 다마스커스에 아랍 바아스 사회당(Arab Baath Socialist Party)을 창당하기에 이른다. 아플라끄는 이후 4인으로 구성된 위원회의 수석위원으로 선출된다.
기본 당 강령은 아랍 국가들의 통합과 자유, 믿음, 식민 통치 철폐, 인도주의 주창 등이었다. 이러한 목적을 이루기 위해 당에서는 민족주의, 사회주의, 혁명 등이 공존하였다. 계급간의 갈등을 원천적으로 거부하였기 때문에 토지 개혁을 단행하고 공유재산의 국유화와 금융제도 개혁, 상인과 농민 조합 결성, 사유재산 계승 거부 등 여러 가지 개혁을 단행하였다. 정부의 대표권과 입법권을 대신했으며 언론의 자유와 아랍 민족주의 내에서의 결속을 주장했다.
바아스 사회당은 1958년, 시리아-이집트 통합 후에, 나세르의 억압을 받았다. 그 결과, 바아스 급진주의자의 쿠데타는 UAR의 붕괴를 초래했다. 1963년 3월 정권을 잡은 바아스당은 미셀 아플라끄가 이끄는 온건파와 자디드가 이끄는 강경파로 갈라졌다. 1966년 강경파가 정권을 완전히 잡은 후, 하피즈 아사드 장군의 도움으로 강경파는 바이따르를 축출했다.
1967년 6일 전쟁 이 후, 골란회복과 경제발전을 위한 인민투쟁을 강조하는 자디드파와 국내외 온건정책을 통한 시리아의 국익을 추구하는 아사드파 간에 대립이 있었다. 국방부 장관의 직책을 이용하여 아사드는 자디드를 축출했다.
1970년 9월 요르단-PLO 간 전투에서 시리아는 PLO지원을 거부했고 1972년 아사드는 민족진보전선(NPF)과 협력하여 권력을 공유했다.
1976년 6월 이스라엘의 레바논 침공과 레바논 내전에서 아사드는 레바논에서의 PLO의 득세를 저지하여 레바논을 보호하기 위해 마론파 기독교 민병대를 지원했다.
1980~82년 시리아 무슬림 형제단의 반정부 무장투쟁으로 시리아는 정치적 혼란에 빠졌다. 아사드는 원리주의 저항을 무자비하게 진압하여 1만 명 이상이 목숨을 잃었다.
1990년 걸프전에서 바아스당은 반이라크 전선에 서서 미국을 위시한 연합군을 지지했다. 이로써 시리아는 20억 달러를 보상금으로 받았다. 2000년 봄 아사드는 사망했고 바아스당은 헌법을 급히 개정하여 아사드의 차남 바샤르를 대통령에 앉히고 충성을 맹세했다.


*아랍 사회당 Arab Socialist Party (시리아) :

아랍 사회당(ASP)의 설립자는 아크람 하우라니(Akram Hourani)로 그는 하마(Hama)에 사는 변호사로 1950년 1월 ASP를 설립하였다. 2차 세계 대전 이후 프랑스에 반대하는 투쟁을 벌이면서 그는 독립국이었던 시리아에서 지지를 받았다. 그의 충고를 따라 시리아 정부는 홈즈(Homs)에 있는 군 기지에서 군인을 보충할 때 지원자들의 배경을 보지 않기로 했다. 빈곤층의 자녀들이 사회에서 성공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 군에 지원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그의 정책을 빈곤층과 농민들의 많은 지지를 받았다. 그는 또한 봉건제도를 타파하고 토지 개혁을 통하여 토지를 재분배해야 한다고 주장했기 때문에 젊은 군 관료들 사이에서 많은 인기를 누렸다. 그는 ASP와 바아스당의 지도자인 쉬샤클리의 독재 정부에 반대하고 1954년 아랍 바아스 사회당(Arab Baath Socialist Party)을 설립했다.


*아랍 사회당 Arab Socialist Party of Egypt (이집트) :

사다트 대통령이 이집트에 다당제를 도입하였기 때문에 여당인 아랍 사회주의 연맹(ASU)과 의회는 1976년 5월, 이 문제에 대해 토론을 거쳐 우익, 좌익, 중도파 등 3가지 형태의 창당을 승인했다. 중도파를 대표하는 당은 아랍 사회당(Arab Socialist Party of Egypt, ASPE)이었으며 ASPE를 이끄는 사람은 총리인 맘두흐 살림(Mamdouh Salim)이었다. 10월, 11월, 선거에서 ASPE는 342석 가운데 무려 280석을 차지하였다. 사다트는 이후 이들 세력을 정식 당으로 인정했다. 그 후 그는 ASU와 관련이 있는 대규모 기구들을 해체하고 지역 조직들을 ASPE 조직으로 전환시켰다. ASPE는 977년 정당제도 법에 의거하여 공식화되었다.
하지만 사다트가 이스라엘과 평화 노력을 시도하자 곧 반대에 부딪혔고 그는 ASPE를 자신의 세력으로 교체했으며 1978년 5월 열린 이집트 국민 투표에서 98.3%의 지지를 얻었다. 3개월 후, 사다트는 자신의 뜻에 반대하는 자를 축출하겠다고 발표하고 그는 국민당(National Democratic Party, NDP)을 설립하였다. 뒤이어 ASPE는 해체되었고 ASPE의 회원국들은 앞다투어 NDP에 가입했다.


*아랍 사회주의 Arab socialism :

이집트 사회주의에서 시작하였으며 1958년 이집트와 시리아가 통합하여 UAR을 결성하면서부터 아랍 사회주의라는 용어가 빈번하게 사용되었다. 나세르 이집트 대통령은 1955년 4월, 인도네시아의 반둥에서 열린 비동맹국 회의에서 만난 유고슬라비아의 티토(Josip Tito)와 인도의 네루(Jawaharlal Nehru)와의 우정을 통하여 사회주의를 도입하기 시작하였다. 1956년, 이집트 헌법은 봉건 제도의 철폐, 착취 타파, 부의 재분배를 언급하였다.
1961년 9월 UAR이 분열되기 시작하면서 나세르는 이집트 도시 부유층에 대한 개혁에 박차를 가했다. 법령을 제정하여 소득세를 개정하고 국민 보험, 금융 개혁 등을 감행했다. 1961~62년 겨울 나세르는 30,000단어의 국민 헌장(National Chart)을 제정하였다. 1962년 5월, 카이로에서 이 헌장에 대한 토론이 벌어졌으며 노조, 전문직, 자원자들로 구성된 인민민족회의(National Congress of the Popular Forces)가 이를 채택하였다. 이 헌장에서는 과학적 사회주의 및 착취 타파를 통해 평등을 이룩하자는 신념이 잘 나타나 있으며 자본주의자들을 포함하여 국가적 대 단결을 촉구하고 있다. 또한 정치적, 사회적 민주주의는 서로 분리 할 수 없는 것이며 정치에서 선택의 자유와 시민들이 자유로운 삶을 영위해야 하며 국가의 부를 평등하게 나누어야 한다는 내용이다. 아랍사회주의 연맹이 헌장을 실천할 것이며 ASU를 구성하고 있는 세력은 농민, 노동자, 지식인, 군인, 자본주의자들이다.
군주시대에 존재하고 있었던 착취를 종식시켰다는 것을 선포하면서 나세르는 사회 경제적으로 서로 다른 계층 가운데 단합이 있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아랍의 사회주의와 맑시즘이 다른 것은 맑시즘은 사회 계급간의 끊임없는 투쟁을 주장하고 있지만 아랍의 사회주의는 통일을 표방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이집트에서 활동하고 있는 마르크스주의자들은 이러한 아랍 사회주의를 지지하고 있었다.


*아랍 사회주의 연맹-이집트 Arab Socialist Union-Egypt :

1962년 5월, 노조, 전문직, 자원자들이 참석한 가운데 인민 민족회의(National Congress of the Popular Forces)는 국민 헌장을 채택했다. 여기서 아랍의 사회주의를 설명하면서 건설하게 될 정치 기구에 대해서도 설명했다. ASU를 구성하고 있는 세력은 농민, 근로자, 지식인, 군인, 자본주의자들이다. ASU는 1962년 11월에 설립되었다. ASU는 피라미드 구조를 이루고 있으며 제일 밑에는 마을, 직장, 지역 단위로 되어 있고 상층부에는 공화국의 대통령이 이끄는 위원회가 자리하고 있고 중간층은 지역 위원회이다. ASU의 입법 기관은 국회(National Assembly)이며 50%이상의 의석이 근로자 및 농민에게 주어졌다.
실제로 국민들이 정치에 참여하는 것은 이루어지지 않았지만 ASU는 넓은 지지기반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활발한 정치 활동을 하였고 사회주의 의식 개혁을 실시하였다. ASU에서는 선거를 지역 단위로 실시하였으며 각 주에 소속되어 시민, 군사 관료들을 도와 나세르 대통령과 내각에서 결정하는 사항들을 실시하였다. 많은 이집트인들은 점점 강력해지는 공무원세력의 지지를 얻는 가장 좋은 방법은 ASU에서 자리를 차지하는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4년 만에 회원수가 6백만에 이르렀다. 결과적으로 부유한 농민 집단이나 관료층, 도시 전문직 종사자들은 독자적인 권력을 이루게 된다.
1965년 7월 ASU의 중앙 위원회를 설립하고 나세르는 알리 사브리 좌익계 수상을 사무총장으로 임명하여 당 기구를 당원 중심기관으로 개편하였다. ASU의 지역위원회는 공무원, 사업가, 교사, 법조인, 토지 소유자, 공장 근로자들이 차지하게 되었고 사회주의 수업을 받았다. 사브리는 사회주의 청년동맹(SYO)을 설립했으며 이를 ASU의 보조기관으로 삼았고 20,000명의 회원을 지닌 기구로 성장했다. 하지만 이집트가 1967년 6월 아랍-이스라엘 전쟁에서 패배하자 나세르는 ASU나 SYO를 설립하기 이전 자신이 누렸던 영광을 다시금 이루기로 결심했다. 10월 SYO를 해체하였으며 1968년 6월 ASU의 구조를 사브리 이전의 것으로 환원시켰다.
1970년 9월, 나세르가 사망하자 ASU의 역할에 대한 논의가 시작되었다. 사다트대통령은 ASU를 행정부에 종속시켰다. 1973년 10월, 아랍-이스라엘 전쟁에서 패하자 의회는 ASU를 지원자로 구성된 기구로 만들었다. ASU를 계속 둘 것이냐 하는 논쟁이 계속되었으며 각 사회 계층을 대변하고 있는 집단에 따라 다섯개의 기관으로 분리시킬 것이냐 하는 문제도 토론의 대상이 되었다. 하지만 위원회는 ASU를 3개의 기관으로 분리시켰다. 1976년 10월과 11월 의회 투표에서 ASU는 정치적 역할을 잃었으며 1978년 8월 사다트는 무스타파 카밀 ASU 사무총장을 NDP를 이끌도록 임명함으로써 ASU는 공식적으로 해체되었다.


*아랍 서부지역 Arab West :

서아랍에 포함되는 아랍 북아프리카 국가들은 다음과 같다. 알제리, 리비아, 모리타니아, 모로코, 튀니지이며, 서아랍은 리비아 사막을 가운데 두고 동아랍과 분리되어 있다.


*아랍어 Arabic Language :

아랍어는 셈족언어군에 속하며 비슷한 언어로는 히브리어와 아람어가 있고 글자는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써내려 간다. 아랍어는 4세기 초부터 사용되기 시작했으며 2가지 언어 구조를 가지고 있다. 아랍어는 28개의 자음과 3개의 모음으로 구성된다. 품사는 3품사로 명사(명사, 대명사, 지시사, 부사 등), 동사, 불변사(전치사, 접속사, 부정사, 의문사 등)가 있다. 단어는 3개의 자음을 어근으로 하고 모음은 문법적인 역할을 수행한다. 접두사와 접미사는 관사, 대명사, 전치사의 역할을 한다. 예를 들어 JIHAD와 MUJAHID(JIHAD를 실시한 자)는 같은 어원을 두고 있으며 어원은 JHD이다. 아랍어는 꾸란의 언어이며 회교도의 종교적 언어이다. 하지만 아랍인들의 언어이기도 하며 그들의 종교적 근원이 어디이든지 사용되고 있다. 꾸란에서 사용되는 언어는 고전 아랍어이며 페르샤만에서 대서양에 이르기까지 모든 나라에서 공통으로 사용되는 언어이다. 하지만 구어의 경우에는 지역마다 약간씩 다른 사투리를 사용하기도 한다. 사투리는 크게 5개로 나누어 볼 수가 있는데 이라크 방언, 아라비아 방언, 시리아 방언, 이집트 방언, 북아프리카 방언 등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일상 생활에서 모두 지역방언이 사용되고 있다.


*아랍억지군 Arab Deterrent Force, ADF :

1976년 10월에서 1982년 7월까지 레바논에 주둔했던 아랍 연합의 평화 유지 세력. 1976년 10월 아랍 연맹은 정상 회담을 열고 6개월 동안, 아랍억지군이라는 평화 유지군을 레바논에 보내 1975년 4월, 발발한 레바논 내전의 휴전 상태를 감독하려 했다. 30,000명의 병력으로 구성된 ADF는 시리아(25,000), 사우디아라비아(2,000), 수단(1,000), 남예멘(1,000), 리비아(600), 아랍연합에미레이트(500)명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레바논 대통령의 지도 하에서 활동을 하였으며 6개월마다 활동을 갱신하였다.
ADF는 마론파 민병대와의 국지전에 참가했으며 1979년 중반 수단, 사우디, 남예멘, UAE군이 철수했다. 1980 4월, ADF는 마론파 민병대와 자흘레 지역에서 충돌했고 이로 인해 이스라엘군의 개입이 있었으나, ADF가 승리를 거두었다.
1982년 6월 말, 이스라엘이 레바논에 개입하던 당시 아랍 연맹의 외무 장관들은 ADF의 임기를 연장하는데 의견의 일치를 보지 못했기 때문에 효력을 상실하게 된다. 하지만 레바논 정부는 시리아에게 군대를 철수 할 것을 공식적으로 요청하지 않았고 이로 인해 후일 시리아군의 레바논 주둔이 공식화되었다. 1982년 7월 ADF는 해체되었다.

* 아랍에미리트 군Military in United Arab Emirates

전군 현역 65,000 군 지출비 GDP에 3.1% (2004)

*아랍에미리트의 석유와 가스산업 Oil and gas industry, UAE


석유 매장량 97.8 billion bbl (1 January 2011 est.) 7위
가스 매장량 6.453 trillion cu m (1 January 2011 est.) 7위
석유 생산량 2.813 million bbl/day (2010 est.) 8위
가스 생산량 48.84 billion cu m (2009 est.) 19위


훗날, 이라크 석유 회사(IPC, Iraq Petroleum Company)의 자회사인 아부다비 석유 회사(ADPC, Abu Dabi Petroleum Company)가 된 트루셜 코스트 석유 개발(Trucial Cost Development Oil Company)은 1939년 아부다비에서의 석유 탐사권을 획득했다. 사업권을 획득한 또 다른 회사는 1954년 영국 석유(British Petroleum)와 프랑스 석유 회사(Compagnie Francaise des Petroles)의 합작으로 설립 된 아부다비 해양개발(ADMA, Abu Dhabi Marines Area)이었다. 1962년 많지 않은 양의 석유 생산이 시작되었다. 1978년, ADPC와 ADMA는 ADCO(Abu Dhabi Company for Onshore Oil)와 대외 업무를 위한 ADMA-OPCO로 재편되었다. 이 회사들은 아부다비 석유 생산량의 93%를 차지했고 석유 생산량은 1990년 8월 이라크의 쿠웨이트 침공 전날, 하루 180만 배럴에 이르렀다.
두바이에서 석유는 1966년 두바이 석유 회사(DPC, Dubai Petroleum Company)에 의해 발견되었는데, DPC의 발견이 가능했던 이유는 1937년 이래로 석유 사업권을 가지고 있던 IPC로부터 1961년, 석유 채굴권을 넘겨받았기 때문이다. 상업적 생산은 1969년에 시작되었고 1990년 8월 이라크의 쿠웨이트 침공 때 즈음 하루 42만 배럴로 증가했다.
샤르자(Sharjah)에서는 1974년 석유가 발견되었고 1990년대 중반 하루 생산이 6만 배럴에 도달했다. 라스 알카이마(Ras al Khaima)에서는 1984년 석유가 발견되었으나 1980년대 말 생산이 하루 12000배럴을 넘지 못했다.
1970년대 중반과 말의 석유가의 가파른 상승은 인구 백만 이하의 아랍에미레이트를 세계에서 5번째로 부유한 국가로 만들었다. 1990년 7월 UAE는 1974년 이후로 회원국이던 OPEC에 의해 고정된 할당량의 2배 이상인 하루 230만 배럴을 생산하고 있었다. 석유 생산량이 할당량보다 많았기 때문에, OPEC이 제시한 배럴 당 18달러에서 12달러로 석유가를 낮추었다.
세계 시장에 이라크와 쿠웨이트의 석유 공급이 일시적으로 줄면서 아랍에미레이트는 생산량을 증가 시켰고, 1991년 하루 260만 배럴에 도달했으며, 이 후, OPEC의 하루 생산량 한계인 224만 배럴을 약간 넘긴 약 하루 240만 배럴로 안정화되었다. 그리고 그러한 석유 생산은 아랍에미레이트에 연간 140억 달러의 수익을 가져다 주었다. 1990년대 초의 생산 대로라면 아랍에미레이트의 매장량은 2107년까지 유지될 것이다.
세계에서 4번째로 많은 가스가 매장된 아랍에미레이트는 1991년 하루 6400만 세제곱미터 만큼을 소비하고 있으며 이는 2244년이 돼서야 고갈될 양이다.

*아랍연맹 Arab League :

1942년 독일이 이집트를 포함한 북아프리카를 점령하겠다고 위협을 가하자 영국은 아랍의 여론을 이용하여 아랍 세계의 단합을 주장하였으며 대서양과 페르시아 걸프만을 잇는 연맹을 결성할 것을 제안했다. 독일의 이러한 위협에 맞서기 위해 영국은 배후에서 아랍 예비회의가 열리는 것을 도와서 1944년 9, 10월 아랍 회의가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에서 열렸다. 여기에는 이집트, 이라크, 레바논, 북예멘, 사우디아라비아, 시리아, 트랜스요르단이 참가했으며 팔레스타인은 옵서버 자격으로 참여하였다. 독립국가들로 이루어진 아랍 연맹 창설이 1945년 3월 22일 카이로에서 조인되었다.
아랍 연맹은 카이로에 본부를 두었으며 초대 사무 총장은 이집트 외교관인 앗잠(Abdul Rahman Azzam)이 맡았다. 더 많은 아랍 국가들이 이 연맹에 독립국 자격으로 참가함에 따라 회원국은 확대되었다. 회원국들은 다음과 같다. 리비아(1953), 수단(1956), 모로코(1958), 튀니지(1958), 쿠웨이트(1961), 알제리(1962), 남예멘(1967), 바레인(1971) 오만(1071), 카타르(1971), 아랍에미레이트 연합국(1971), 모리타니아(1973), 소말리아(1974), PLO(1974), 지브티(1977), 코모로(2000)등이 있다. 1990년 5월 남, 북 예멘이 통일됨에 따라 회원국은 22개국이다.
1950년 아랍 연맹의 회원국들은 공동방어∙경제협력조약(JDECT)을 체결하고 이스라엘에 대항하여 회원국들끼리 서로 보호하자고 결의하였다. 4년 후, 나세르 이집트 대통령은 이라크가 서방세력 주도로 이루어지는 방위협력체에 가입하려는 움직임을 보이자 이를 반대하면서 이라크의 가입으로 인해 JDECT가 서방세력과 연결되는 계기가 마련된다며 비난했다. JDECT에 따라, 1973년 아랍-이스라엘 전쟁시, 9개 아랍 회원국들은 이집트와 시리아에 병력과 전투기를 보냈으며 이스라엘의 전쟁에 참전하였다. 하지만 1982년 5월 사담 후세인 이라크 대통령이 아랍 연맹의 회원국들로부터 군사적 지원을 시도하였으나 거부당했다. 이유는 이라크가 이스라엘과 전쟁을 하는 것이 아니며 1980년 9월 이란을 침공하였고 회원국 중 시리아와 리비아는 이란과 동맹관계에 있었기 때문이었다.
1948년 이후, 아랍 연맹은 다마스커스에 위치한 지부에서 이스라엘에 대한 경제보이코트를 결정하였다. 1958년 유엔이 아랍 연맹을 지역 대표체로서 인정하자, 아랍 연맹은 유엔의 아랍지역에 대한 교육, 과학, 문화의 중심 기구로서 역할을 수행하게 되었다. 따라서 아랍의 우편 노조를 설립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는데 우편 노조는 무선 통신, 전신 전화 등 통신 노조를 대표하는 것이다. 또한 17개의 아랍 무역 노조의 대표격이며 이 무역 노조에는 철강 노조, 의사 노조, 수의사 노조 등이 포함된다. 현재는 11개 특별 위원회와 17개 상임위원회로 구성되어 있다.
이집트가 1979년 3월, 이스라엘과 평화 조약을 체결하자 아랍 연맹 정상 회의는 이집트의 회원자격을 박탈하고 본부를 튀니지로 이전하였다. 이집트는 1989년 5월, 다시 회원국으로 복귀하였으며 1990년 10월 본부를 다시 카이로로 이전하였다. 7개월 후, 마기드(Esmat Abdul Maguid) 이집트 외무 장관이 만장일치로 아랍 연맹의 사무 총장으로 선출되었다.


*아랍연맹 정상회의 Arab League Summits :

아랍 연맹의 회원국들은 각 국의 외무 장관을 아랍 연맹의 각료 회담에 보냈다. 1964년 회원국들의 최고 수뇌가 회담에 참석하였다.
1차 회담: 1964년 1월 카이로. 이스라엘이 요르단 지방의 수자원을 불법 사용한다는 문제가 거론됨.
2차 회담: 1964년 9월 알렉산드리아. 팔레스타인은 시온주의 제국주의에서 해방시키기 위해 팔레스타인 해방 기구의 설립을 지지.
3차 회담: 1965년 9월 카사블랑카. 아랍을 상대로 한 적대적 선전 행위 비난.
4차 회담: 1967년 8월 29일~9월 1일 카르툼. 1967년 아랍-이스라엘 전쟁 후 열림. 팔레스타인들의 자국 영토에 대한 소유권을 인정. 이스라엘과는 어떠한 협상도, 조약도 맺지 않으며 이스라엘을 국가로 인정하지 않겠다고 결의.
5차 회담: 1969년 12월 라바트. 아랍 국가들로 하여금 이스라엘에 대항해 일어 설 것을 촉구.
6차 회담: 1973년 11월 알제리. 1973년 10월 아랍-이스라엘 전쟁이후 이스라엘과의 협상 조건을 엄격히 함.
7차 회담: 1974년 10월 30~11월 2일 라바트. 정상 회담을 통해 PLO를 팔레스타인을 대변하는 유일하고 합법적인 기구로 인정.
8차 회담: 1976년 10월 카이로. 레바논 지역에서 발생한 내전에서 평화 유지 임무를 담당하기 위해 아랍억지군 창설.
9차 회담: 1978년 11월 바그다드. 1978년 이집트와 이스라엘 사이의 캠프 데이비드 협정을 비난하고 이집트에 대하여 아랍 연맹 회원 자격 박탈, 외교 관계 단절 등 제재조치를 발효했으며 이스라엘과 협정을 맺는 시점부터 효력 발생.
10차 회담: 1979년 11월 튀니지. 1978년 3월 이스라엘이 레바논 남부 지방을 점령한 후 계속해서 그 지역을 장악하자 이를 비난.
1차 회담: 1979년 11월 암만. 2000년까지 범아랍의 발전을 위해 아랍 경제 협력을 채택.
12차 회담: 1981년 11월 페즈. 파흐드 사우디 왕자가 이스라엘과의 평화 증진을 위해 이스라엘을 임시적으로 인정하자고 주장하자 이에 대해 첨예한 대립이 이루어졌으며 몇 시간만에 협상이 결렬됨. 따라서 1982년 Fez에서 열린 협상이 12차 회담이 되었다. 이 회담에서 현재 사우디 국왕인 Fahd왕자가 제안한 제안과 비슷한 것이 채택되었다. 12차 협상에서는 1967년 이후 아랍의 영토를 점령하고 있는 이스라엘이 철수할 것과 이 지역에서 유대인들이 물러날 것, PLO하에서 팔레스타인의 자결권 보장, 서안 지방에 예루살렘 동쪽을 수도로 하는 팔레스타인 자치주 설립, 유엔의 서안 지방과 가자 지방의 감독, 국제연합안전보장이사회 권한으로 그 지역 내 모든 국가들에게 평화 보장 등을 주장하였다.
13차 회담: 1985년 8월 카사블랑카. 알제리아, 레바논, 리비아, 남예멘, 시리아 불참. 팔레스타인의 권리에 대해 이스라엘과 협상 문제에 대해 PLO와 시리아측의 이견이 좁혀지지 않음.
14차 회담: 1987년 11월 암만. 1987년 7월 국제연합안전보장이사회 제 598결의안을 채택하여 이란-이라크 전쟁의 휴전을 선포하고 이란이 결의안 수락에 미온적인 자세를 보인다며 비난. 이집트와의 외교 관계 재개에 대해 회원국 각국의 협상을 제안.
15차 회담: 1988년 6월 카사블랑카. 이스라엘 점령 지구에서 6개월 째 시위를 하고 있는 팔레스타인을 지지하기 위해 PLO에 자금 지원.
16차 회담: 1989년 5월 카사블랑카. 이집트를 다시 아랍 연맹 회원국으로 인정. 또한 알제리, 모로코, 사우디아라비아의 국가 수뇌가 참석하는 삼자 위원회를 설립하여 레바논 내전에 휴전을 선포하고 레바논에 의회 정부 설립.
17차 회담: 1990년 5월 바그다드. 소련 내 유대인들이 이스라엘로의 이주가 증가함을 비난.
18차 회담: 1990년 8월 10일 카이로. 참석한 20개 회원국 중 12개 회원국이 참석하여 이라크의 쿠웨이트 침공과 합병을 비난하였으며 사우디아라비아와 다른 걸프 지역 국가들이 군대를 파병하여 자국 방위 요청을 수락.


*아랍-이스라엘 전쟁 Arab-Israeli (1948~49) :

1948 5월 14일에서 1948년 1월까지. 팔레스타인 전쟁이라고도 하며 이스라엘인들은 독립 전쟁이라고 부른다.
배경- 1947년 11월 팔레스타인의 아랍인들은 유엔의 분리 계획을 거부하였으며 그 지역에서 6%의 영토를 차지하고 있던 유대인들에게 54%를 주겠다는 총회 결의안 제 181조를 거부하였다. 당시 아랍인들의 인구는 1,200,000에 달했으나 유대인들은 650,000명에 지나지 않았다. 1984년 초 영국군은 유엔이 정한 출발일인 10월 1일을 5월 15일로 앞당겼다. 5월 14일 이슈브 민족회의(Yirshuv National Council)의 13명의 회원으로 구성된 국민 행정부(People's Administration)는 이스라엘의 설립을 선포했다. 아랍 연맹의 결정에 따라 이집트, 이라크, 요르단, 레바논, 시리아는 아랍의 팔레스타인 군인들과 함께 이스라엘에 대항해 싸우겠다고 결의를 다졌다. 아랍군을 이끄는 지휘자는 압둘라 이븐 후세인(Abdullah ibn Hussein) 왕이었다.
군- 아랍군은 7,000명의 이집트군과 4,000명의 이라크군, 5,000명의 요르단군, 2,000명의 레바논군, 4,000명의 팔레스타인 비정규군, 4,000명이 시리아군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이 중 요르단의 아랍군만이 전문적인 군사 교육을 받았을 뿐 나머지는 오합지졸이었다. 레바논과 시리아군은 이전 지역 민병대였다. 이집트와 이라크군들은 영국이 공급하는 저질 무기로 무장하고 있었으며 6월 말 전쟁이 1단계의 마지막으로 다가갈 무렵 아랍군의 병사는 35,000에 달했다.
이스라엘군은 30,000명의 완전 정규군으로 이루어졌으며 이들 중 2/3는 2차 세계 대전 참전 용사들이었다. 이들은 32,000 지원병과 15,000 무장 유대 경찰 32,000 민방위를 지원을 받고 있었다. 1948년 6월 말, 전쟁이 1단계를 마무리지을 무렵 이스라엘군은 60,000에 달했다.
사건- 1948년 5월 14일, 시작된 무력충돌은 4단계를 거치며 계속되었다. 4.14.~6.11., 7.9.~19., 10.15.~11.6., 1948.11.21.~1949.1.7. 실제 전투기간은 약 4개월이다.
5.14.~6.11. 북쪽에서는 시리아와 레바논군이 팔레스타인 비정규군의 도움을 받아 갈릴리 북쪽 지방의 대부분을 차지하였다. 중부지방에서는 요르단의 아랍 군단이 예루살렘의 남쪽과 동쪽 대부분을 차지했으며 구시가지(Old City)와 예루살렘의 텔아비브(Tel Aviv)부분의 대부분을 차지했다. 남쪽에서는 이집트군이 팔레스타인 비정규군의 도움을 받아 가자와 아쉬도드 지방을 차지했다. 다른 이집트 병력은 베르샤바와 헤브론지방을 차지했고 아랍지역을 베들레헴을 기점으로 연결하게 되었다. 유엔의 휴전 명령을 6월 11일 발효되었다.
7월 9일에서 18일, 이스라엘군은 하이파(Haifa)에서 북부지방으로 뻗어갔으며 중부 지방에서는 릿다, 라말라와 인근 공항을 점령하였다. 제 2차 유엔 휴전 명령은 7월 18일 발표되었으며 남부지방을 제외하고는 10월 15일 까지 효력을 가지게 되었다. 휴전이 끝날 무렵 이스라엘군은 90,000병력에 달하게 되었다.
10월 15일에서 11월 6일, 북부지방에서는 이스라엘군이 훌라(Hula)계곡을 장악했으며 남부 레바논 지방을 점령했다. 중부지방에서 이스라엘군은 텔아비브-예루살렘지방으로 영역을 넓혔으며 남쪽으로는 베르샤바(Beersheba)지역을 점령했으며 헤브론(Hebron)과 플루자 지방을 이집트군으로부터 빼앗었다. 이집트군은 Ashdod와 Majdal지방을 점령하여 Asluj-Gaza지역에서 점령을 공고히 했다. UN 휴전은 11월 6일 남부 전선에서 시작되었으며 북부와 중부지방에서는 11월 30일 휴전이 시작되었다.
1948년 11월 21일 1949년 7월 7일 남부에서 이집트군은 가자와 아슬루지 지방 주변 세력을 확보하였으나 이 후 후퇴하였다. 이스라엘군과 이집트군 사이의 마지막 휴전은 1949년 1월 7일 성사되었으며 2000년 12월 1일 아랍 팔레스타인 대표들은 예리코(Jericho)에서 압둘라 이븐 후세인을 팔레스타인의 왕으로 추대하였으며 이는 이스라엘로부터 전쟁의 승리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인명 손실: 아랍 팔레스타인 측- 16,000명이 전사하였으며 1948년 1월에서 5월 중순사이 많은 인명 손실이 있었다. 부상자는 14,000명이다. 다른 아랍 측: 2,500명이 전사하였으며 유대인들은 6,000명이 전사하였다.
휴전 협정: 그리스의 로데스(Rhodes)섬에서 전쟁 당사자들이 모여 협상을 벌였으며 이스라엘은 1949년 2월 24일 이집트와, 1949년 3월 23일 레바논과, 1949년 4월 3일 요르단, 1949년 7월 20일 시리아와 휴전 협정을 맺었다. 하지만 이스라엘과 국경을 접하고 있지 않은 이라크와는 어떠한 협정을 맺지 않았다.
이 휴전 협정으로 인해 팔레스타인 지방의 아랍인들에게 유엔이 부여한 영토(10,435평방마일/27 026㎢)가 분할되게 되었다. 이집트는 가자지역의 통치권을 보유하게 되었다. 이스라엘은 전쟁으로 유엔이 정한 5,600평방마일/14,500㎢ 이외에 2,220평방마일/5,750㎢를 점령하였다. 따라서 유대인들은 전쟁 전 팔레스타인 지방에서 인구 비율로는 1/3에 지나지 않았지만 유엔이 정한 54%보다 더 많은 75%의 영토를 차지하게 되었다. 5,949㎢의 영토를 압둘라 왕이 합병하였다. 예루살렘은 유엔의 국제기구가 들어서기로 약속된 지역이었으며 이스라엘과 요르단이 나누어 차지했다. 요르단은 예루살렘동쪽 6.5㎢를 차지했다. 레바논과 시리아는 팔레스타인의 국경이 바로 이스라엘과의 국경이 되었다.


*아랍-이스라엘 전쟁 Arab-Israeli war 2 (1956) :

수에즈 전쟁(Suez War-1956) 참고.


*아랍-이스라엘 전쟁 Arab-Israeli war 3 (1967) :

1967년 6월 5일에서 10까지 발발했으며 1967년 6월 전쟁 또는 6일 전쟁으로 불린다.
배경:
정권을 잡은지 9개월이 된 급진주의 정부인 바아스 정권은 이스라엘이 정부를 전복시키겠다는 위협을 하자 1966년 11월 이집트와 방위조약을 체결한다. 1967년 4월 초, 이스라엘은 시리아와 이스라엘의 비무장지대에 있는 아랍 지역에 농사를 지으려다 분쟁을 초래한다. 한달 후, 시리아는 나세르 이집트 대통령에게 이스라엘 군대가 국경 근처에 집결해 있다는 정보를 준다. 5월 16일 시리아를 돕겠다는 약속을 한 나세르 대통령은 이집트군을 시나이 동쪽으로 이동했다. 이틀 후, 그는 유엔긴급군의 철수를 요구했고 1956년 수에즈 전쟁이후 휴전을 감시하던 유엔긴급군은 즉각 철수했다.
이집트군은 5월 22일 샤롬 쉐이크(Sharm al Shaikh)의 티란해협(Tiran Straits)에 주둔하고, 나세르 대통령은 해협을 포위해 이스라엘의 에일랏(Eilat)항을 봉쇄했다. 이로 인해 그 지역에서 긴장이 다시금 고조되었다. 나세르 대통령에 적대적인 감정을 가지고 있었지만 요르단의 후세인 국왕은 여론을 반영하여 상호 방위 조약에 따라 하고 자신의 군대를 이집트에 포함시켰다. 이에 대해 이스라엘은 강력한 동맹국인 미국에게 다음과 같은 조건을 제시하고 하나라도 지켜지지 않을 시에는 전쟁도 불사하겠다고 했다. 즉, 유엔긴급군이 철수하지 않아야하며 티란해협이 점령당하지 않아야 하며 요르단과 이집트가 상호 방위조역을 철폐하여야하며 이라크군을 요르단에 파병하지 않아야 한다는 조건이었다. 5월 말 이러한 조건 중 한가지를 제외하고 모두 지켜졌다.
전쟁 당사자
전투기: 이스라엘 260대, 이집트 434대, 이라크 110대, 요르단 28대, 시리아 90대
탱크: 이스라엘 1100대, 이집트 1200대, 이라크 200대, 요르단 287대, 시리아 750대
사건:
6월 5일 아침 이스라엘은 선제공격을 실시하였다. 이스라엘은 17개 이집트 공군 기지를 공격하였으며 이집트 소속 전투기를 3/5 파괴하여 전투기 365대 폭격기 69대를 파괴하였다. 또한 이집트는 시나이에서 550대의 탱크를 잃었다. 나중에 이스라엘은 요르단과 시리아 공군을 대파해 양국은 적어도 2/3정도의 병력을 잃었다. 이스라엘은 6월 6일 국제연합안전보장이사회의 휴전 명령을 무시했다.
이집트 전선에서 이스라엘은 6월 6일 가자 해협을 정복하였으며 그날 이집트군은 80,000병력과 1,000대의 탱크를 시나이반도에서 철수시켰다. 6월 8일 시나이반도의 대부분을 차지한 이스라엘군은 다음날 수에즈 운하에 도착하였다. 요르단 전선에서 이스라엘은 동 예루살렘, 베들레헴, 헤브론, 제닌, 나불루스를 6월 8일 점령하였다. 이후 이스라엘은 유엔의 휴전안을 받아들였다. 시리아 전선에서는 4일 동안 폭격을 당하였다. 하지만 다섯째 날인 6월 9일 이스라엘은 유엔 중재 휴전안을 무시하고 골란고원 점령을 감행하여 여섯째 날인 6월 10일 목적을 달성하였고 유엔의 휴전안을 받아들였다. 해군 전에서 이스라엘은 샤롬 쉐이크를 6월 7일 점령하였으며 티란 해협에 대한 점령을 마무리지었다.
인명 손실:
이집트는 이번 전쟁으로 인해 11,500명을 잃었으며 시나이사막에서 물 부족으로 많은 인원이 사망하였다. 부상자는 15,000명이었다. 요르단은 2,000명을 잃었으며 부상자는 5,000명 발생했다. 시리아에서는 700명이 전사하였으며 3,500명이 부상당했다. 이스라엘군 측 손실은 사망이 778명, 부상이 2,558명이었다.
무기 손실:
이집트는 264대의 전투기와 700대의 탱크를 잃었고 요르단은 22대의 전투기와 125대의 탱크를 잃었다. 시리아는 58대의 전투기와 105대의 탱크를 잃었고 이스라엘은 40대의 전투기와 100대의 탱크를 잃었다.


*아랍-이스라엘 전쟁 Arab-Israeli war 4 (1973) :

1973년 10월 6일에서 25일까지. 1973년 10월 전쟁이라고 하기도 하며 라마단 전쟁(Ramadan war, 또는 Yom Kippur war)이라고도 한다.
1) 배경:
이전에 있었던 이스라엘이 선제 공격을 했던 무장 갈등과는 달리 이집트와 시리아는 이스라엘군에 대해 선제 공격을 취했으며 이집트와 시리아의 영토를 재탈환하겠다는 목표로 아랍지역을 정복하려 했다. 6년 동안 평화 협상 등 많은

 
 

Total 14
제   목
<ㄱ> 가쉬미 - 국제연합안전보장이사회 결의안 598
<ㄴ> 나본 - 노루즈
<ㄷ> 다국적군 (레바논내) - 딤미
<ㄹ> 라디노어 - 레바논-이스라엘 평화협정 (1983)
<ㅁ> 마나마 - 무사디끄
<ㅂ> 바그다드 - 베이루트
<ㅅ> 사나 - 샤레트
<ㅇ> 아구다트 이스라엘 - 아랍-이스라엘 전쟁
<ㅈ> 자이드파 - 중동평화회담 (마드리드 1991)
<ㅊ> 천연가스 - 총인민회의(예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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