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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ㅈ> 자이드파 - 중동평화회담 (마드리드 19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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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이드파 Zaidis

쉬아 무슬림 종파. 자이디스파는 열두 이맘중 알리, 후세인, 하산, 이맘 알리의 손자 이자 예언자 무함마드의 양자인 자인 알 아비딘을 이맘으로 인정한다. 무함마드 이븐 알 하나피야의 아들이자, 이맘 후세인 이븐 알리의 이복 형제인 자이드와는 다른 노선을 취하게 된다. 자이드파는 알리의 후손이고, 샤리아에 따라 통치할 수 있다는 능력을 입증한다면 그 누구라도 이맘이 될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자이드파는 종파 내에서 선출되는 이맘의 무결점성에 대하여 주장하지 않았기 때문에 순니파의 교리와 충돌을 빚지 않았다. C.E. 9세기 자이드파가 다스리는 왕국은 북부이란과 예멘에 건설되었다. C.E. 898년 이맘 야흐야 이븐 후세인 알 라시(Yahya ibn Hussein al Rassi)에 의해 예멘의 자이드 주에 설립 된 자이드 왕국은 일시적으로 권력을 잃기도 하였지만 1962년까지 그 세력을 유지하였다.

* 자임, 호스니(1890-1949) Zaim, Hosni

시리아의 군사 지도자이자, 대통령. 1949년 알레포의 쿠르드 가정에서 출생하였으며, 오스만 터키의 군대에서 장교가 되기 위한 훈련을 받았다. 1차 세계대전 이후 자임은 프랑스 위임 통치하에서 조직된 특수 부대에 입대하였다. 2차 세계대전이 발발한 동안에는 프랑스 비쉬(Vichy)에 기반을 둔 친독 프랑스 정부에 머물렀다. 1941년 비쉬의 친독 프랑스 정부가 영국과 자유 프랑스에 패함에 따라 자임은 투옥되었으나, 석방 후 시리아 군대에 복귀하였고 빠른 속도로 진급하였다. 1948년에서 1949년에 발발한 팔레스타인 전쟁에서 자임은 준장을 거쳐 참모총장으로 진급하였다.
다마스커스의 미국 대사관과 협력하게 된 자임은 이스라엘에 닿아 있는 인근 아랍 국가들이 이스라엘 건국을 인정하게 하기 위한 행보의 일환으로 1949년 3월 30일 시리아 국가 최초의 군사 쿠데타를 일으켰다. 자임은 선거로 선출된 대통령, 슈크리 알 꾸와틀리(Shukri al Quwatli)를 퇴위시키고 의회를 해산시키는 한편, 군사 통치 정권을 수립하였다. 6월 말에 치러진 대통령 선거에서 자임은 정권을 장악한 대통령으로 선출 되었다.
7월 20일 자임은 팔레스타인 내에 시리아가 보유하고 있던 집단거주지를 포기하는 이스라엘과의 휴전협정에 서명하였다. 자임은 친미 외교 정책의 일환으로 중동 군사 협정에 대한 워싱턴의 제안을 지지 하였다. 또한 미국을 통하여 이스라엘 지도자들과의 접촉을 시도하면서 자신이 평화에 관심이 있다는 사실을 어필하고자 하였다. 자임의 친미 행보와 쿠르드와 체르케스 출신 군인에 대한 차별은 불만세력이 발생하는 계기가 되었다. 8월 14일 사미 히나위(Sami Hinnawi) 대령이 이끄는 군 장교 세력은 자임에 대한 쿠데타를 일으켜 성공을 거두었고, 군사법원의 약식 재판에 따라 자임을 처형하였다.

*자디드, 살리흐 Jadid, Salah (1926∼1993) :

시리아의 군인 지도자이며 정치가. 그는 자블라 항구 가까이 있는 두와이르 밥다 마을의 알라위파 명문가에서 태어났다. 자디드는 홈스 육군사관학교에서 장교교육을 받았다. 그는 육군 중위로서 그의 군대 경력을 시작하였다. 정치적으로 활동적인 그는 처음에 시리아 사회 국민당의 당원이었고, 그 후, 아랍 사회주의당, 바아스 사회당 당원이 되었다. 1958년 초 이집트와 시리아가 통일 아랍 공화국(UAR)으로 합병한 후, 자디드는 이집트로 옮겼다. 그는 시리아의 바아스당을 해체시키기 위한 가말 압둘 나세르 대통령의 결정에 화가 났기 때문에, 1959년에 비밀리에 군사위원회를 조직하기 위하여 하피즈 아사드와 다른 두 바아스당 장교들과 연합하였다.
이것은 1961년 9월, 통일 아랍공화국에서 시리아를 탈퇴시키는데 성공을 거두었으며 또한 1963년 3월 8일, 다마스커스에서 바아스당은 쿠데타에 성공하였다. 군사혁명위원회 지도자로서 자디드는 군부의 비 바아스 당원 장교들을 제거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일년 후에 그는 정당 내분으로 인하여 그의 고위직을 잃어버리고 바아스당 지부의 사무총장으로 좌천되었다. 그러나, 그는 반격을 시도하여 권력을 쟁취하였다. 그는 정부와 당 지역구에 단순히 자신이 사무총장으로 있을 동안 지지한 그의 지지자들을 심었다. 그는 누르 알 딘 아탓시를 당의 사무총장으로, 아사드를 국방장관으로 승진시켰다. 그는 계속하여 스파르타식으로 급진적인 정책을 지지하였다. 9월에 군사 혁명이 실패하자마자, 그와 아사드는 적대적인 장교단을 제거하였다. 1967년 6월에 아랍-이스라엘 전쟁에서 시리아가 골란고원을 빼앗기고 전쟁패배로 인하여 그의 정권은 위기에 처했다. 그일로 인해 그와 온건실용주의 정책을 지지하였던 아사드 사이에 불화의 싹이 생겨났다. 자디드와 함께 정당의 장악력을 유지하면서, 아사드는 군에 대한 그의 지배력을 증대시켰다. 1969년 2월, 아사드는 자디드의 권력을 박탈하려고 시도했으나 유혈 참사를 피하기 위하여 그와 타협하였다. 그러나, 문제는 1970년 9월에 곪아터질 지경이 되었다. 그때, 아사는 자디드의 약속에 반하여 요르단 군대와 싸우는 팔레스타인 특공대들에게 군 원조를 제공하지 못하였다. 자디드가 1970년 10월 30일 다마스커스에서 바아스당의 비상국가위원회를 소집하였을 때, 회의장소는 친아사드 군인들에 의하여 둘러싸여 있었다. 일단 위원회는 11월 12일에 살벌하게 끝났으며, 자디드를 포함한 아사드의 반대파들은 체포되었다. 그는 1983년까지 메제크 요새 감옥에 수용되었었다. 석방 이후 그는 감시를 받았고 공공 생활로부터 격리되었다.


*자보틴스키, 블라디미르 지브 (1880∼1940) :

수정론자, 시온주의자의 지도자, 자보스틴스키는 러시아 오데사의 중류 가정에서 태어났으며 베르네, 스위스, 로마에서 법률을 공부하였다. 그는 조국으로 귀환하자마자, 한 오데사 신문의 저널리스트로서 일하였다. 1903년 유대인 학살 동안에, 그는 현지 유대인 자체방위를 조직하도록 도왔다. 학살에 충격을 받았기에 자보스틴스키는 시온주의 운동에 가입하고 1904년에 제6차 시온주의자 회의에 참석하였다. 2년 후에, 러시아 시온주의자 회의의 대표자로서 그는 그것의 프로그램을 짜는 일을 도왔다. 제 1 세계 전쟁이 발발하자 자보스틴스키은 카이로에서 모스크바 신문의 기자로서 일을 하였다. 그는 알렉산드리아에서 조셉 트럼펠더를 만나 함께 오스만 인들에 의해 팔레스타인으로 추방당한 젊은이들의 시온 노새 군단을 조직했다. 그들은 팔레스타인을 정복하기 위하여 영국과 나란히 싸우기 위하여 유대인 대대 설치에 관한 생각을 조성하였다. 1917년 런던은 일반적으로 알려진 유대인 군단인 유대인 연대의 조직을 정당하다고 인정하고 그리고 이를 에드먼드 엘렌비 장군의 부대에 귀속시켰다. 군단에 중위로서 자보스틴스키는 중동에서 전투를 경험했으며 훈장을 받았다. 전쟁 후에 그는 예루살렘에 정착하였다. 1920년, 아랍-유대인 폭동 중에 그의 역할 때문에 그는 15년 수감을 선고받았으나 일반사면의 일부로서 다음 해에 자유화되었다. 그는 런던으로 옮겼으며, 그리고 세계 시온주의자 집행 위원회(WZO)에 선출되었다. 그는 1923년에 그의 직책을 사임하였다. 그는 1925년에 수정론자 시온주의자 세계 연합을 조직하였는데 이는 세계 시온주의자 위원회(WZO)를 괴롭혔다. 그는 또한 Betar를 설립했다. 1931년 시온주의자 의회에서 52명의 수정론자 시온주의 대표단은 3번째로 큰 집단이었다. 노동당의 시온주의자들과 그들과의 화해노력은 실패하였다. 유대 민족주의자 움직임의 지도력을 파악하는 시도는 노동에 의해서 방해되었다. 팔레스타인에서 시온주의자 운동의 주도권을 잡기 위한 수정론자의 시도는 데이빗 벤 구리온이 이끄는 노동당 시온주의자들에 의하여 좌절당했다. 1935년 WZO로부터 정식으로 탈퇴한 후에, 수정론자들은 자보틴스키가 주도하는 새 시온주의자 기구(NZO)를 설립하였다. 그는 팔레스타인을 발전시키기 위하여 사적인 수도에게 탁월함을 주자고 주장하며 마르크스주의자의 계급투쟁 개념에 반대하였다. 그는 팔레스타인에 살러 가서 그곳에서 NZO 신문의 편집장이 되었다. 그가 1936년에 해외로 갔을 때, 영국은 그가 팔레스타인으로 되돌아가는 것을 거부하였다. 그 때까지 5년 일찍, 하가나로부터 쪼개졌던 이르군 쯔바이 레우미는 나중에 최고 사령관이 된 자보틴스키의 명령을 받기에 이르렀다. 그는 팔레스타인에서 추방당했다고 할지라도 동유럽, 파리, 런던, 뉴욕에서 그의 시간을 보냈다. 1939년 세계 2차 대전이 발발했을 때에, 자보틴스키는 NZO는 전쟁 노고를 지지한다고 선언하였다. 그는 유대인 군대를 조직하길 결심했기 때문에, 그는 1940년 중반에 이 목적을 위해 미국을 방문하였다. 그는 거기서 죽었고 뉴욕에 묻혔다. 그의 유해는 파내졌고 1964년에 이스라엘에 다시 묻혔다. 몇몇 언어에 능통했던 자보틴스키는 수필가, 시인, 소설가, 극작가 그리고 번역가였다.


*자유당 Liberal Party (이스라엘) :

이스라엘의 정당. 공식명칭: 자유주의(히브리어-자유주의자들). 선거에서 인기의 하락을 두려워한 시오니스트들은 진보당과 함께 1961년 총선 바로 전에 자유당으로 합당하였다. 복지 국가 개념에 찬성하면서 자유당은 사기업의 장려를 요구하였다. 자유당은 국회에서 17석을 차지하였다. 1965년 선거에서 자유당은 헤루트와 연합하여 메나헴 베긴 지도 하에 가할 이라 불리는 정치블록을 창당하였다.


*자유사회당 Liberal Socialist Party (이집트) :

이집트의 정당. 자유사회당(LSP)은 아랍 사회주의 동맹(ASU)내의 우익들의 포럼을 대표하기 위해 무스타파 카말 무라드(Mustafa Kamel Murad)의 지도 하에 1976년 5월에 창당되었다. 자유사회당은 자유 경제 정책과 사기업에 대한 보다 큰 자유를 주장하였다. 또한 이 정당은 ‘알아흐라르(Al-Ahrar, 자유)’라는 주간지를 출판하였다. 11월 총선에서 12석을 획득했으나 1979년 총선에서는 무라드의 재선 실패와 더불어 3석으로 줄어들었다. 이후 두 번의 선거에서 형편없는 결과를 낳았고 이러한 결과는 당의 지도자들로 하여금 1987년 선거 이전 사회주의 노동당과 무슬림 형제단과의 연합으로 노동이슬람연합(LSA)을 창당하게 만들었다. 특히 국회에 의석을 차지하기 위해서는 총 투표의 8%의 한계를 넘어서야 한다는 새로운 요구조건에 자유주의 사회당이 부응할 수 있는 능력이 없게되자 자연히 연합은 신속히 이루어질 수밖에 없었다. 연합의 결과로 노동 이슬람 연합은 60석을 차지하였고 LSP의 몫은 10석이 할당되었다. LSA의 다른 연합 정파들과 마찬가지로 LSP는 정부가 자신들의 요구인 비 정부 조직의 감시 하에 총선을 행하고 비상사태의 해제를 거부하자 1990년 선거를 보이코트 하였다.


*자파리 법학파 Ja'afari Code :

이 이슬람 법학파는 12쉬아파의 6번째 이맘인 자파리 알 사디끄(A.D. 699∼765)를 따라서 명명되었다. 하디스 참조.

* 자카트 Zakat

아랍어로 순수한 것을 의미. 자카트를 하는 행위 그 자체를 의미하며, 꾸란에는 ‘궁핍하고 가난 한 사람들, 노예의 몸값, 하나님의 길 위에 있는 채무자, 여행자를 위해 자유의지로 기부하는 것’이라고 명시 되어 있다. 이 후에는 무슬림의 의무로 규정 되었고 이슬람의 다섯 기둥의 하나로 편입 되었다. 자카트의 바탕에 깔려있는 기본 사고는 무슬림이라면 부를 자신이 속해있는 사회로 환원하여 사회 공공의 목적을 위한 재원으로 소비함으로써 자신이 보유한 부를 정화해야한다는 것이다. 이슬람의 법적 판단인 피끄(Fiqh)를 통하셔 자카트는 종교 구빈세로써 규정되고, 규제되었다. 예를 들어, 사피이 법학파의 경우 곡물과 과일, 가축, 금, 은, 공산품에 대해 자카트를 부여 했는데, 수확물에 대해서는 10퍼센트의 자카트를 금,은, 공산품에 대해서는 2.5퍼센트의 자카트를 부여 하였다. 현대 무슬림 사회에서 부과되고 있는 자카트는 이슬람 국가의 정부나 무슬림 종교-법학 교육기관으로 귀속되며 수집된 자카트의 지출은 샤리아에 의하여 규정되고 있다.

* 자할 Zahal
히브리어로 이스라엘 국방위원회(Zvai Haganah Le Israel)의 약칭이다.
이스라엘의 군사 참고


*자헤디, 파즐룰라 (1880-1963) Zahedi, Fazlullah
이란의 정치가, 수상직 역임(1953-55). 하마단의 한 가정에서 태어난 자헤디는 1916년 테헤란에 있는 군사학교를 졸업했다. 1921년 길란(Gilan)의 소련에 대항하며 성공을 거두고 있던 코사크단체에 참여하였고, 레자 샤 팔라비(Reza Shah Pahlavi)의 재위 기간 동안 육군 소장의 반열에 올랐다.
1941년 영국과 소련은 이란을 점령하였고 레자 샤로부터 자헤디의 친독활동에 대한 증언을 받아냄에 따라 영국은 1943년 자헤디를 친독활동을 명목으로 체포하였다. 1946년 상원 의원으로 선출 된 자헤디는 연립내각의 수상이었던 아프마드 까왐 알 살타니(Ahmad Qawam al Saltane)의 기반을 약화시켰다. 자헤디는 친영 세력인 수상 알리 라즈마라(Ali Razmara)에 반대하는 노선을 취했는데 이와 같은 노선은 국민 전선당(National Front)와 함께 하였다. 1951년 자헤디는 무함마드 무사딕의 첫 정부에서 내무장관직을 수행하였으나, 무사딕이 군주제와 군대의 운명을 함께 하겠다고 결정한 후에는 무사딕에 대해 반기를 들었다.
1952년 자헤디는 퇴직 장교 모임으로 가장하여, 무사딕 정권하에서 은퇴한 군사임원으로 구성된 조국을 구하기 위한 비밀 위원회를 구성하였다. 1953년 7월말 무사딕 정권의 실각을 계획하는 두 세력이 존재 하였는데 하나는 자헤디가 조직한 비밀 위원회였으며, 다른 하나는 미국 중앙 정보기구(CIA)였다. 8월 6일 레자 샤는 이란을 탈출하기 전, 무사딕을 수상직에서 해임하고 자헤디를 수상직에 임명하였다. 3일 후, 무사딕은 이란내의 질서를 회복라는 명령을 군대와 경찰에 하달하였고, 친 군주세력의 병력이 자헤디의 진영에 도착하였다. 이에 자헤디는 무사딕의 본거지에 대한 공격을 직접 지휘하였고, 9시간의 전투 끝에 무사딕을 생포하였다.
자헤디 내각의 3분의 1은 군 장군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샤와 더불어 자헤디는 야당이 제시하는 세 가지 정책을 따랐는데, 이 세가지 정책은 투데당(Tudeh Party)의 폐당 조치, 국민 전선당(National Front)에 대한 탄압, 마지막으로 독자 노선을 선택한 이슬람 성직자들에 대한 감시조치였다. 자헤디는 영국과의 관계를 회복하고, 서양 석유 협력단(Western oil consortium)으로 이란의 석유사업권을 양도하였다. 1955년 4월 샤의 권력이 증가하였다는 증거의 일환으로 자헤디는 수상직에서 해임되었다.

*전쟁에 관한 제네바 협정 Geneva Convention on War (1949) :

국제 협정들이 제네바에서 서명됨. 1948년 8월 스톡홀름의 국제 적십자에 의해 발의되어 1949년 8월 12일 제네바 UN회원국들에 의해 비준된 4개의 협정가운데 마지막 협정은 ‘전쟁시 시민의 보호에 관련된’ 협정의 이름이 붙어있다. 이 협정은 1968년 3월의 465항을 포함하여 몇몇 국제연합안전보장이사회의 결의안에 일치하여 이스라엘과 예루살렘을 포함한 점령 아랍영토에도 적용되고 있다. 이 협정은 점령세력은 보호받는 시민들에게 집단적 징벌과 보복, 개인이나 그룹의 국외 추방, 인질, 고문, 재산의 정당하지 못한 압수, 인종, 종교, 국적이나 정치적 생각을 이유로 하는 차별대우 등을 하지 못하도록 금하고 있다. 47항은 다음과 같이 명시되어있다. ‘보호받는 사람들은 영토의 점령의 결과로 어떠한 변화가 발생되어도 이 협정이 명시한 권리가 약탈될 수 없으며, 점령된 국가의 당국과 점령세력사이에 결정된 어떠한 합의에 의해서도 권리가 박탈되지 않는다.’ 또한 49항은 다음과 같이 명시되어 있다. ‘점령세력은 자기 국민들의 일부를 점령한 영토로 이주시키거나 추방할 수 없다.’


*점령 아랍 걸프 해방 인민전선 Popular Front for the Liberation of the Occupied Arab Gulf (1968~71) :

1968년 9월 사회주의 국가인 남예멘에서 도파르 해방전선(DFL)의 제2차 총회가 개최되었을 때, 이들의 세력을 점령 아랍 걸프 해방 인민전선(PFLOAG)의 이름으로 오만뿐만 아니라 다른 걸프 국가에까지 확장하여야 한다고 결의하였다.
점령 아랍 걸프 해방 인민전선은 제국주의와 신식민지주의, 그리고 독재주의를 배격하고 PFLOAG 위원회는 사회주의 혁명을 성공시키기 위하여 남예멘과 오만을 연결하는 도파르의 중요성을 강조하였다. 남예멘뿐만 아니라 중국도 점령 아랍 걸프 해방 인민전선을 지원하였다. 2년 후 PFLOAG는 도파르의 3분의 2 이상을 장악하자, 이 지역에서 패권을 쥐고 있던 영국은 오만에서 쿠데타를 주도하여 술탄 사이드 이븐 타이무르를 퇴위시키고 영국군을 투입하여 영향력을 확장하였다.
1971년 제3차 총회에서 PFLOAG는 활동 방향을 사회주의 혁명에서 민족 민주혁명으로 변경하는 한편 공산주의자 이외에도 입당 자격을 주었고 명칭을 오만 아랍 걸프 해방 인민전선(Popular Front for the Liberation of Oman and Arab Gulf)으로 개칭하였다.


*점령 아랍 영토 Occupied Arab Territories (1967) :

1967년 6월 아랍-이스라엘 전쟁 동안에 이스라엘은 이집트의 시나이 반도와 1949년부터 이집트 관할구역이었던 가자지구와 1950년 요르단에 의해 병합된 동예루살렘을 포함한 서안지구와 시리아의 골란고원을 점령하였다. 1967년 6월말 동예루살렘의 병합과 1981년 12월 골란고원의 병합은 어떠한 외국 정부나 유엔에 의해서도 공식적으로 인정되지 않고 있다.
1979년 3월, 이집트와 평화협정을 체결한 후, 이스라엘은 시나이 반도를 3단계에 걸쳐 1982년 4월까지 이집트에 완전히 반환하였다. 1974년 11월, PLO가 팔레스타인들의 유일한 합법적 대표기관으로 인정되자 요르단의 후세인 왕은 1988년 7월, 동 예루살렘을 포함한 서안지대를 PLO에게 이양하면서 법률적, 행정적 관계를 단절하였다. 1993년 9월, 이스라엘-PLO 협정은 가자지구와 서안지구 내의 도시인 예리코에 잠정적으로 팔레스타인 자치권 부여와 뒤이어 서안지구의 나머지 지역으로 자치권 확대, 동예루살렘의 미래에 대한 협의와 그에 따른 최종적인 해결을 담고있다. 1994년, 이스라엘-시리아 회담은 1979년 이집트-이스라엘 평화협정을 모델로 하여 골란고원으로부터 완전철수를 이스라엘이 받아들이도록 하려는 시리아의 주장에 집중되어 있었다.


*점령지 Occupied Territories (1967) :

점령지라는 용어는 영국의 위임 통치하에 있던 팔레스타인 지역으로 1967년 6월 아랍-이스라엘 전쟁에서 이스라엘이 점령한 지역을 말하는데 이는 동예루살렘을 포함한 서안지구와 가자지구이다.


*제마엘 바쉬르 Gemayel, Bashir (1947~1982) :

레바논 정치인. 1982년 대통령으로 선출되었으나 암살 당함. 유력한 마론파 가문으로 베이루트에서 출생한 제마엘은 법과 정치학을 성요셉 대학에서 시작하였으나 학업을 끝마치지는 않았다. 팔랑훼당의 활동가였던 제마엘은 레바논 내에 팔레스타인 게릴라들이 활동하는 것을 반대하였다. 1970년대 초 그는 워싱턴의 법률회사에서 일하며 미국의 CIA에 의해 고용되었다.
1975년 4월에 시작된 레바논 내전 때 제마엘은 우익 마론파 정당들과 연합한 레바논 전선의 군대조직인 레바논군 사령관이 되었다. 그는 이스라엘과 오랫동안 유지한 비밀관계를 공식화하였다. 차기 레바논 대통령이 되기 위한 의도로 그는 중대한 라이벌들을 제거하기 시작하여 1978년 6월에는 술레이만 프란지에의 장남인 토니 프렌지를 측근으로 하여금 암살하도록 함으로써 정적 제거의 정점에 달했다. 다음에 그는 카미엘 샤몬 그룹의 군사력을 무력화시켰다.
1980년 12월 그의 주도로 레바논전선의 지도자들은 레바논 통합에 대한 연방제와 연맹제를 선호하는 성명서를 발표하였다. 제마엘은 그의 군에 무기를 공급해주고 훈련을 시켜주는 이스라엘과의 관계를 더욱 긴밀히 하였다. 1982년 6월 이스라엘의 레바논 공격기간에 제마엘군은 베이루트 교외에서 이스라엘군과 동맹하였다. 이스라엘의 공격으로 PLO와 시리아가 베이루트로부터 철수한 것은 팔랑훼당의 입지를 더욱 강화시켜 주었고 제마일로 하여금 대통령직의 성취 기회를 제공해 주었다. 1982년 8월 23일 제마엘은 65명의 의원 가운데 57명의 지지로 대통령에 선출되었다. 그는 9월 1일 이스라엘 수상인 메나헴 베긴과의 비밀회담에서 이스라엘과 대표부의 상호교환에 합의하였다. 제마엘이 대통령에 취임하기 8일 전인 1982년 9월 14일 베이루트의 팔랑훼당 본부에서 폭탄 폭발이 발생하여 그와 26명이 살해되었다.


*제마엘 아민 Gemayel, Amin (1942~) :

레바논 정치인. 1982~1988년까지 대통령 역임. 유명한 마론파 집안으로 베이루트에서 출생한 제마엘은 성 요셉대학에서 법학학위를 받았다. 그는 변호사로 잠시 일하다가 사업에 뛰어들었다. 그는 1970년 보궐선거로 국회에 들어갔고 2년 후, 총선거에서 다시 선출되었다. 그의 동생인 바쉬르와는 다르게 제마엘은 팔랑훼당(Phalange)의 민병대로 활동하지도 않았고 1975년에 발발한 레바논 내전에도 직접적으로 개입하지 않았다. 시리아가 1976년 레바논 내전에서 마론파들을 편들었을 때, 제마엘은 시리아와 접촉하였다. 동생 바쉬르가 1982년 9월 대통령에 선출된 직후, 암살 당하자, 그는 대통령 선거전에 뛰어들었다. 시리아의 지원을 받은 그는 참석인원 78명의 국회의원 가운데 1명을 제외한 모든 사람들의 절대적인 지지를 받았다.
그는 최초로 국내와 해외에서 가장 많은 지지를 받았던 대통령이었다. 미국의 압력으로 1983년 1월, 그는 당시 레바논의 많은 지역을 점령하고 있던 이스라엘과 평화조약에 가조인 하였다. 하지만 그는 국회가 이 조약을 64대 2로 통과시키고 난 이후에도 조약에의 서명을 거부하였다. 이것은 그가 레바논 땅에서 이스라엘의 완전한 철수를 원하고 있음을 보여준 것이었다. 이에 대한 보복으로 이스라엘은 제마엘 정권에 대한 보호를 철회하였다. 이스라엘이 1983년 9월 부분적인 철수를 시작하자 서로 다른 공동체 간의 전투가 발발하였고 결국 무슬림들이 서베이루트를 장악하게 되었고 따라서 제마엘 정부의 힘은 더욱 위축되었다 1984년 2월, 제마엘은 서베이루트의 쉬아파 거주지역에 군대를 배치하여 무슬림들에게 위협을 주려하였으나 실패하였다. 그 결과 오히려 레바논군이 종교적 노선에 따라 해체되고 말았다. 이스라엘이나 서방 등 외부의 보호가 없어진 상황에 처한 제마엘은 레바논-이스라엘 협정을 폐기하기로 결심하였고 시리아의 원조를 구하였다.
1984년 3월 스위스의 라우센(Lausanne)에서 개최된 국가 화해 회의에 따라 제마엘은 정치와 헌법의 개혁을 이행하기 위해 라쉬드 카라미하의 국가화해정부의 구성을 약속했다. 그러나 영향력 있던 아버지인 피에르가 8월에 사망하자, 팔랑훼당에서 그의 위치는 약해졌다. 팔랑훼당 내에서 당권경쟁은 친시리아 민병대들의 지도자들인 나비흐 베리와 왈리드 줌볼라트에 의해 공격받고 있던 제마엘의 위치에 큰 타격을 입혔다. 이러한 상황의 반전을 위해 제마엘은 시리아가 막후 조정하고 베리와 줌볼라트 그리고 레바논군의 엘리흐 베이카가 서명했던 레바논 위기 해결을 위한 타이프협정을 반대하였다.
특히, 이 협정은 현재의 기독교인들에게 우선권을 준 6:5로 분할대신에 무슬림과 기독교들 사이에 국회의원 수를 동등하게 명문화한 것임으로 제마엘과 시리아 대통령 하피즈 아사드 사이에 불화를 더욱 심화시켰다. 하피즈 아사드는 베리와 줌볼라트의 민병 대뿐만 아니라 제마엘의 마론파 라이벌인 술레이만 프란지에도 지원함으로써 제마엘의 권력을 쇠퇴시키려 노력하였다. 새 대통령을 선출하는 국회회기를 막아내기 위해 우파인 마론파 의원들은 회의 정족수를 채우는 일을 거부하였다. 이러한 마론파의 시도는 아사드가 지명하는 사람을 대통령에 당선시키려 하는 계획을 무산시키기 위한 것이었다.
1988년 9월, 대통령직 마지막날에 제마엘은 그의 최고 참모인 미셀 아운 장군을 그의 후계자로 임명하였다. 한달 후, 제마엘은 프랑스로 망명하였고 그곳에서 정치 이전의 원상태였던 사업가로 상태로 되돌아갔다.


*제마엘, 피에르 Gemayel, Pierre (1905~1984) :

레바논 정치인. 비크파야의 유력한 마론파 가문에서 출생한 제마엘은 대학교육을 베이루트와 파리에서 받았고 약사가 되기 위한 교육을 이수하였다. 스포츠 클럽에 흥미를 보였던 그는 1936년 베를린 하계 올림픽과 독일의 나치 청년운동에 깊은 영향을 받았다. 다음 해에 그는 팔랑당을 창당하였다. 하지만 그는 반프랑스 애국운동이나 1943년 위기 때에 어떠한 역할도 거의 보여주지 못했다. 약 10년 후, 카미엘 샤몬이 대통령에 취임했을 때 비로소 제마엘은 지도적 위치에 올랐다. 1958년 5월~7월까지의 레바논 내전에서 그는 범아랍주의 세력에 대항하는 샤몬과 함께 하였다.
1958년 9월 푸아드 샤합이 대통령에 당선되자, 제마엘은 4명의 임시내각의 위원으로 임명되었다. 1960년 국회의원으로 선출된 후 그는 샤합 정부와 샤를 헬로우 정부에서 재무부 장관, 노동부 장관 그리고 보건부장관 등으로 붙박이 장관이 되었다. 1968년 총선에서 그는 샤몬과 레이몬드 에드와 연합하여 삼자동맹을 결성하였다. 이 동맹은 레바논 내에서 팔레스타인 게릴라 부 대원들의 활동이 레바논의 국가안보에 가장 심각한 위협이라고 주장하였다. 1970년 대통령 선거에서 그는 술레이만 프렌지에를 지지하였다.
1975년 내전의 발발과 더불어 마론파 진영이 시리아의 지원을 받고 상대인 레바논 민족운동으로부터 1976~77년에 걸친 직접적인 위협을 극복하였을 때, 팔랑훼당은 비밀스럽게 오랫동안 유지해온 동맹인 이스라엘에 더욱 의지하게 되었다. 1978년 5월, 제마엘은 이스라엘을 방문하였고 무기제공과 군사훈련 협정에 서명하였다.
2년 후, 바쉬르 제마엘이 샤몬의 민병대 제압하기 위해 전사들을 사용함으로 위기가 초래되자, 제마엘과 샤몬 두 지도자는 이 위기를 해결하기 위한 방법으로 함께 하는 정당을 출현시키기로 결정하였다. 12월에 그들은 레바논 통합에 연방제와 연맹제를 선호하는 레바논 전선 성명서를 냈다. 1984년 3월, 라우센의 국민 해 회의에서 제마엘은 몇몇 주로 구성되는 연방제를 실현할 목적으로 샤몬과 동맹하였으나 의회의 지지를 얻는데 실패하였다. 다음달 그는 라쉬드 카라미에 의해 주도되는 국민화해정부에 참여하였다. 7월에 그는 팔랑훼당의 당수직을 사임했고 다음달 사망하였다.


*젯다 조약 Treaty of Jiddah, 앵글로-사우디 (1927) :

1927년 5월의 젯다 조약은 영국과 압둘 아지즈 이빈 압둘 라만 알 사우드와의 관계를 정상화 시켰다. 그 이전에 사우드는 그 자신을 히자즈의 왕, 나즈의 술탄으로 선언하였고, 1926년에 독립을 선언했다. 영국은 압둘 아지즈 알 사우드의 왕권과 영토도 인정했다. 그리고. 사우드는 그 대가로 영국을 오만의 보호자로서, 걸프만에 있어서 주권을 인정해 주었다.

* 조로아스터교와 조로아스터교도 Zoroastrianism and Zoroastrians

조로아스터교는 창시자인 조로아스터, 짜라투스트라(B.C.E. 628-551)의 이름을 따서 명명 된 고대 종교이다. 조로아스터교는 신분 계급이 사제, 전사, 목농업자, 이렇게 세단계로 나뉘는 사회 체제를 가지고 있었던 고대 페르시아에서 발흥하였다. 이런 사회 제도는 조로아스터교에 그대로 반영 되었다. 조로아스터교의 다이바스(daivas, 하늘의 것)와 신은 각각의 계급을 갖는다. 그 중 가장 최고의 신은 아후라 마즈다(Ahura Mazda)로 조로아스터교의 경전 가사에 따르면 그는 하늘과 땅의 창조주 이자 태초의 법을 창시한 신이다. 그는 그의 쌍둥이 아들과 창조의 시작을 함께 했는데 선과 광명의 신인 스펜타 마이뉴(Spenta Mainyu)와 악과 암흑의 신인 안그라 마이뉴(Angra Mainyu)가 그들이다. 이 둘은 대립을 거듭하며 세계를 혼란 속으로 몰아넣었고, 오직 도덕적으로 순결한자만이 새로운 세계의 증인으로 살아 남을 것이라고 한다. 조로아스터교의 우주론 속에서 이와 비슷한 이원론을 찾아 볼 수 있는데, 조로아스터교에 따르면, 우주의 역사는 3000년을 주기로 네 번의 세계가 존재하며 이 세계 속에서 빛을 상징하는 오르마즈드(Ormazd)와 암흑을 상징하는 아흐리만(Ahriman)은 끊임없이 대립을 거듭한다고 이야기한다.
조로아스터교의 가르침은 경전인 아베스타(Avesta)를 기반으로 하고 있다. 이 경전은 아베스타어라고 불리는 고대 페르시아 어로 기록되어 있으며, 아베스타는 여러 권의 책으로 나뉘어져 있다. 그 중에는 야스나(Yasna)를 비롯하여 Yashts, Vendidad와 같은 다양한 경전이 존재한다. 야스나는 조로아스터의 죽음 이후 천년이라는 시간이 흐를 때까지 성문화 되지 않았지만, 조로아스터로부터 언급된 구절들을 포함하고 있다. 조로아스터는 도덕적이고 일상적인 순수성에 대해 깊은 고민을 하였고 불에 대한 고대의 숭배 의식을 유지하였다. 야스나는 주로 불을 숭배하는 의식을 치를 때 암송되었고 하오마 성주라고 불리는 조로아스터교의 신성한 음료를 마셨다.
아후라 마즈다가 세상 만물을 관장한 이래로는 그는 모든 영혼의 아버지 이자 좋은것과 악한것을 관장하는 신으로 이를 숭배하는 조로아스터교는 유일신 사상으로 간주된다. 조로아스터교의 사상은 기독교와 이슬람에 영향을 주었으며 페르시아의 세 계급층 모두 조로아스터를 자신들의 이상향으로 여긴다. 그의 사상은 현재까지도 아프가니스탄과 타지키스탄, 이란과 쿠르디스탄까지 영향을 주고 있다. 조로아스터교는 B.C.E. 550년에서 330년에 존재 했던 아케메네스 시대에 가장 번성하였고, B.C.E. 알렉산더 대왕의 대원정에 이은 그리스 시대의 도래로 그 세력이 점차 약화되며 고통 받았다. B.C.E.247년에서 C.E.226년에 존재 했던 파르티안 제국(Parthian Empire) 말기 그 세력이 되살아나기 시작해서 C.E. 226년에서 C.E.640년에 존재 했던 사산조 페르시아 시대에는 국교로써 사용되었다. 사산조 페르시아의 통치하에서 아베스타는 재구성되고 토착언어인 팔레비어로 번역 되었다. 더하여 조로아스터교의 이원론은 아케메네스 시대부터 고착화 되어 있던 유일신 사상을 대체하기 시작하였다.
이슬람 세력이 페르시아지역과 아프가니스탄 지역에 유입 되자 조로아스터교의 영향력은 약화되기 시작하였다. 조로아스터교는 C.E. 10세기경까지 그 세력을 유지 하다가 인도 서부 해안쪽으로 그 세력이 이동하였고 이들이 현재 파시교도로 알려져 있는 사람들이다. 또 이란 지역에서도 소수 종교 집단으로 살아 남았다. 현대 이란의 헌법은 조로아스터교를 기독교와 유대교와 더불어 소수 종교 종파로 인정하고 있으며 270석의 의회 의석 중 한 자리를 할당 받아 대표자를 배출하고 있다. 1990년 중반 집계에 의하면 이란 내에 약 50,000명의 조로아스터교도가 있다고 추정하고 있다.
조로아스터력은 태양력을 기반으로 하며 1년은 30일씩 12달로 구성되어 있다. 여기에 ‘죽음을 기억하기’라는 이름의 5일내지 6일이 추가된다.

* 종교 기부 / 러스트 Religious endowment/rust
이슬람 기구. 와끄프 참조

* 종교 용어 Titles, Religious(beginning with the highest rank)
(1) 기독교
가톨릭
교황
추기경
총대주교
대주교
주교
사제(신부)
부제
동방정교회
아르메니 정교회
독립 자치 교회의 총주교

총대주교
대주교
주교
신부
부제
그리스 정교회
세계적 원로
총대주교
대도시(Metropolitan)
대주교
주교
대주교원장
신부
다른 정교회들은 한의 체계나 지배층으로 계파분리가 되었다.

개신교
대주교
주교
부제
학장
부주교
성당 참사회원
신부
부제

(2)이슬람
Hazrat (아랍어 : 한계점, 사도로부터 비롯된 단어)
Nabi (아랍어 : 사도, 사도로부터 비롯된 단어)
Marja-e taqlid (아랍어 : 경쟁의 원인)
Ayatollah Ozma(아랍어 : 하나님의 위대한 증표)
Ayatollah (아랍어 : 하나님의 증표)
Hojatalislam (아랍어 : 이슬람의 증거)
Thiqatalislam (아랍어 : 이슬람의 진실)
Mullah (der. Of Mawla ; 아랍어 : 마스터 혹은 배운 사람)
Shaikh (아랍어 : 노인; 연장자에 대한 힘에서 비롯된 단어)
Sayyid (아랍어 : 제왕 혹은 왕자; 사도 무함마드에서 비롯된 남자로 세습되는 것)
Haajj/haji (아랍어/ 페르시아어; 성지순례를 하고 있는 사람)

이 단어들은 수피에는 해당되지 아니함

Hazrat (아랍어 : 한계점, 사도로부터 비롯된 단어)
Qutub (아랍어 : 중심점)
Pir(페르시아어 : 가이드)
Ishan (페르시아어 : 존경의 용어 영적인 인도에서 비롯된 단어)
Murshid(아랍어 : 인도)
Shaikh (아랍어 : 노인, 연장자에 대한 힘에서 비롯된 단어)

이러한 단어들은 상호간에 배제되지 아니함.

순니
Hazrat (아랍어 – 한계점, 사도로부터 비롯된 단어)
Nabi (아랍어 – 사도, 사도로부터 비롯된 단어)
Mahdi (아랍어 : 하나님으로 인도받은 사람)
Mujtahid (아랍어 – 이유를 해석하는데 열중하는 사람)
Shaikh al Islam (아랍어 : 지혜로운 사람)
Mufti al Azan (아랍어 : 파트와와 종교적인 규율들을 전달하는 것)
Mufti (아랍어 : 파트와와 종교적인 규율들을 전달하는 것)
Qadi(아랍어 : 종교적인 판결)
Shaikh (아랍어 : 노인 : 연장자에 대한 힘에서 비롯된 단어)
Maulana./Maulavi(der.of Mawla; Arabic: Master or learned man)
Sayyid (아랍어 : 제왕 혹은 왕자; 사도 무함마드로부터 비롯된 남자 세습의)
Haajj/haji (아랍어 : 핫지를 행한 사람)

이런 단어들은 상호간에 배제되지 아니함.

*줌블라트 가문 :

준블라트(Junblat)로 표기될 수 있다. 이것의 기원은 쿠르드어에서 유래하며 줌블라트인들은 1187년 십자군을 패배시킨 살라딘 아유비의 혈통이라고 주장한다. 처음에 그들은 알레포지역에 정착했으며 쇼우프 지역에 발판을 마련했던 드루즈 통치자인 파크르 알 딘 만(1663년 사망)의 초청으로 레바논으로 이주했다. 그들은 자신들을 두루즈 사회에 동화시켰으며 무크타라 마을에 기반을 둔 중요한 가문이 되었다. 18세기 전환시기에 정권이 만(Mann)인들로부터 쉐하비인들에게로 이양되었을 때, 줌블라트인들은 쉐하비인들에 대하여 투쟁을 하였다. 1840년 쉐하비인들의 추방과 더불어 줌블라트인들은 두루즈인들 가운데 기득권을 다투는 아르살란 가문과 야즈바키 가문과 경쟁을 벌이는 주요 가문 중에 하나가 되었다. 1918 년 오스만제국의 종말에 이어 후계자인 프랑스 위임통치는 두루즈와 같은 종교적 인종적 소수파들의 비위를 맞추려고 하였다. 그리하여 줌블라트인들의 지속된 중요성을 이런식으로 아래에 서명하였다. 1922년 푸아드 줌블라트가 살해된 후에 정권은 그의 미망인인 나이지라에게 넘어갔다. 그들의 아들인 카말은 레바논의 저명한 정치인이 되었다.


*줌블라트, 왈리드 Jumblat, Walid (1949∼) :

레바논의 정치인으로 무크타라 마을의 드루즈 명문가문 출신이다. 줌블라트는 베이루트 아메리칸 대학교에 들어갔다가 그런 다음 파리로 갔다. 그는 진보사회당(PSP)에서 활동적이었다. 그의 아버지인 카칼의 암살에 이어 줌블라트는 그의 가문의 수장으로 진보사회당의 당수로 레바논 민족운동(LNM)의 지도자의 자리를 이어받았다. 그는 신조주의를 종식에 대하여 LNM의 압박을 완화하였으며 시리와의 협력을 시도하였다. 그는 1982년 8월 바쉬르 게마일의 대통령 선출을 비난했다. 1983년 5월 레바논과 이스라엘의 평화 협정이 서명된 후에 줌블라트는 그것을 뒤집기 위해 구성된 동맹에 가담했다. 1983년 9월 쇼푸 지역에서 이스라엘군이 철수한 후, 그의 드루즈 민병대는 이스라엘 점령 덕분으로 그곳에 도착한 마론파군을 추방했다.
3월에 레바논 이스라엘 협정 안이 취소되었다. 줌블라트는 라쉬드 카라미에 의해 구성된 정부의 공공성 장관으로 참여했다. 10월에 그는 게마일 대통령에 반대하는 6개 정당의 동맹구성을 도왔다. 그는 지중해 연안과 베이루트를 내려다보는 언덕과 베이루트 남동쪽의 교외쪽으로 드루즈를 확대하였다. 늦은 1985년 줌블라트는 레바논-시리아관계와 정치적 개혁의 윤곽을 그리는 상세 문서인 ‘레바논 사태를 해결하기 위한 국민협정’에 서명한 3명의 국민군 지도자 중에 하나였다. 그러나 그 협정은 마론파군의 지도자인 엘리 호베이카가 그의 진영을 협정에 서명하도록 설득하는데 실패했기 때문에 처음부터 실패작이었다. 줌블라트는 1989년 9월에 서명한 타이프 협정에 대하여 유보를 했다. 그는 협정을 마론파에게 너무 많은 양보를 하고 것으로 보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는 시리아의 요청에 대한 자신의 걱정을 억눌렀다. 두 달 후에 줌블라트는 살림 호스 정부의 공공성 장관으로 임명받았다. 1990년 10월에 레바논 전쟁이 끝나고 오마르 카라미에 의해 국민 화합정부가 구성되었을 때 줌블라트는 무임소 장관직에 임명되었고 뒤이은 6월에 확대국회의원에 임명되었다. 그의 정당은 1992년 9월에 국회의원 선거에서 경쟁을 벌였으며 국회의원에 선출된 후에 그는 난민 장관에 임명되었다.


*줌블라트, 카말 Jumblat Kamal (1917∼1977) :

무크타라 마을의 한 드루즈 귀족가문에서 태어난 레바논의 정치가로 그는 레바논과 파리에서 법학과 사회학을 공부했다. 그는 1947년에 국회의원으로 선출되었고, 다음 해에 씨족장이 되었다. 1949년에는 진보 사회당을 창당했다. 비록 뛰어난 드루즈 출신이었지만 그 정당은 순니, 쉬아, 기독교들로 구성되어 있으며 국가의 고해성사제도를 폐지할 것을 주장했다. 그는 초기에 대립관계에 있던 아르살란 가문의 여인과 결혼함으로써 줌블라트인들과 아르살란인들 사이에 전통적 경쟁관계를 완화시켰다. 줌블라트는 비샤라 코우리의 지지자로 시작했는데 1952년 여름에 그가 부패로 고소되었을 때 그에게서 등을 돌렸다. 캄밀 샤문과 동맹을 맺고 줌블라트는 사회민족 전선을 설립하고 샤문은 1952년 9월 코우리가 사임한 후에 그를 계승했다.
샤문이 대통령으로 선출되면서 아랍민족주의 프로그램을 포기했을 때에 줌블라트는 1958년 5월에 그에 대항하여 야당 연합을 이끌었다. 그 결과로 레바논 내전이 6월 말까지 지속되었고 줌블라트는 교육부장관(1960~1961)과 내무부 장관(1961~1963)으로 임명되었다. 줌블라트는 봉건적 배경으로 자신을 드루즈에 대하여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게 되었고, 반면에 그의 좌파인 아랍민족주의 견해로 인하여 그는 도시민들인 주류 순니파에게 인기가 있게 되었다. 그는 교조주의의 일관된 반대자로서 1969년에 민족과 진보 전선의 형태로 레바논의 좌파그룹과 팔레스타인 당파들에게 공동의 토대를 제공했다. 1970년 바아스당과 공산당과 같은 그러한 과도 정당을 그가 공인함으로써 전선을 1972년에 처음으로 그리고 1975년에 확대할 수 있게 되었고 줌블라트를 지도자로 하는 레바논 민족 운동(LNM)의 출현을 가능하게 하였다. 1975년 4월에 폭발한 레바논 내전 시에 줌블라트는 레바논 전선이라고 불리우는 우파 마론파 연합인 반대파에 대항하여 LNM을 이끌었다. 줌블라트는 시리아와 절친한 PLO와 함께 동맹을 구성했다. 그러나 LMN-PLO동맹이 1976년 4월에 레바논의 2/3를 점령했다. 시리아 대통령인 하피즈 아사드는 급진 LMN-PLO 동맹에 의한 전체의 승리가 이스라엘군의 간섭과 시리아를 포함한 전 지역을 불안정의 결과로 이어지는 것이 두려워 그의 입장을 수정하였다. 6월에 시리아는 LMN-PLO 진지를 굴욕적인 패배로부터 레바논 전선을 구했다. 9월에 대통령으로서 추천된 시리아 사람인 라일리아스 사르키스를 선출한데 이어 내전이 두 달 후에 끝나고 줌불라트는 사르키스를 대통령으로 받아들였다. 그라나 그가 레바논의 애국자로서 레바논에서 다당제가 유지되는 것을 인정했다 할지라도 그는 시리아의 관력자로 레바논의 평화 파괴자로서의 아사드의 역할을 괘씸하게 생각했다. 1977년 초에 줌블라트가 시리아 아사드 정권을 공격했을 때, 아사드의 유일한 적이 되어 1977년 3월에 암살을 당했다. 상당한 지적인사로서 줌블라트는 여러 해 동안, 베이루트 대학에서 경제사상사를 가르쳤고 레바논 정치에 관한 몇 권의 저서를 저술했다.


*중동 Middle East :

초기 서구의 지리학자들은 동쪽을 근동(지중해로부터 페르시아만 까지 이르는 지역)과 중동(페르시아만으로부터 동남아시아까지 이르는 지역)과 극동(태평양에 면해 있는 지역)으로 나누었다. 그러나 2차 세계대전 동안에 중동이란 용어가 이집트의 영국군 부대에 적용되자 전통적인 정의는 변화를 겪었고 중동은 이전에 근동이라 부르던 지역을 포함하게 되었다. 이후 리비아, 튀니지, 알제리, 모로코의 국가들이 아랍 연맹에 가입하게 되었을 때 중동이란 용어는 이러한 국가들을 또한 포함하는 것으로 간주되었다.
이러한 중동에 대한 개념의 혼동을 벗어나는 가장 좋은 정의는 중동을 중심부와 주변부로 생각하는 것이다. 중심부는 이란, 비옥한 초승달 지역, 아라비아반도와 이집트가 이에 속한다. 중동의 남쪽으로는 수단이 있고 서쪽으로는 북부 아프리카가 있으며 북쪽으로는 터키와 사이프러스가 있다. 중동에 대한 가장 협의의 정의는 단지 중심부만을 지칭하는 것이며, 광의의 정의는 3개의 주변부를 포함하는 것이다.


*중동 방위 기구 Middle East Defence Organization :

소련에 대항하는 군사협력체를 만들기 위해 중동의 여러 국가들을 연결시키기 위한 노력으로 미국의 후원을 받아 영국은 다자간 방위 협약으로 중동 방위 기구를 고안하였다. 중동 방위 기구는 수에즈 운하 지역에 본부를 둔 영국의 중동 방위 부대에 중심을 둠으로써 이집트 민족주의 정부는 1951년 10월 말, 이 기구를 거부하였다. 이를 계기로 영국과 미국은 다국적 방위 협약을 이루기 위해 더욱 노력하게 되었고 그 결과 1955년 바그다드 협약이 실현되었다.

*중동 평화 과정 Peace Process, Middle East :

(1)1948~49년 아랍 이스라엘 전쟁 이후, 아랍 진영과 이스라엘이 정전 협정을 맺었다. 이는 이스라엘을 중동 지역의 새로운 국가로 인정하려는 미국의 노력의 결과로 인식된다. 1949년 3월 미국은 시리아에서 호스니 자임 대령으로 하여금 군사 혁명을 일으키도록 사주하여 약속대로 이스라엘과 비밀 회담은 이루어졌으나, 그 해 8월 전복되었다. 요르단의 압둘라 이븐 후세인 왕은 1951년 암살 당한 이스라엘 지도자와 비밀 회담을 하였다. 이스라엘이 1956년 영국과 프랑스와 협동하여 이집트를 공격한 이후, 이스라엘에 대한 아랍 측의 적의는 커지게 되었다.
1960년대 중반, 이집트의 급진적인 가말 압둘 나세르 대통령과 보수적인 파이살 이븐 압둘 아지즈 왕이 아랍 세계의 지도권을 가지고 경쟁을 하므로써, 아랍 진영은 시온주의에 대항하는 세력 결집이 더욱 어려워지게 되었다.
(2)1967년 6월 아랍 이스라엘 전쟁 이후, 1967년 8월 29일부터 9월 1일 까지 수단 카르툼에서 열린 아랍 정상 회담에서 이스라엘과 평화와 타협은 없다는 이스라엘 배척을 결의하였고, 팔레스타인의 권리를 주장하였다. 특히, 1967년 전쟁에서 이스라엘이 점령한 영토를 영구화하지 못하도록 69년 3월부터 70년 중반까지 국지전을 벌였다. 69년 12월 미국의 국무장관 윌리엄 로저스는 평화안을 제시하였다. 로저스 평화안에는 이스라엘의 팽창주의를 반대하고 상호 안보를 위하여 67년 6월 전쟁 이전의 영토로 복귀하자는 내용이었으나 이스라엘 이집트 양측이 모두 거절하였다.
이집트는 평화 협상의 전제 조건으로 무조건 이스라엘의 점령지 철수를 주장하였고, 이스라엘은 무조건적인 협상을 요구하였다. 1970년까지 국지전이 이어지자, 미국의 로저스는 국제연합안전보장이사회 안건 242호로 휴전과 평화협정을 진행시키고, 국제연합의 거너 제링이 조정자로 나서도록 하였다. 70년 6월 로저스는 이집트, 이스라엘, 요르단에 이 제안을 전달하였으며, 이집트의 나세르는 소련과 협의하여 7월 22일에 받아 드렸고, 요르단은 7월 25일에, 이스라엘은 미국의 리처드 닉슨 대통령의 비밀 확약을 받은 후에 7월 31일에 받아 드렸다. 90일 휴전은 70년 8월 7일 까지 발효되었다. 그 해 9월, 이집트의 나세르가 사망하자, 뒤를 이은 안와르 사다트 대통령은 휴전 협정을 갱신하였으나, 결국 국제 연합의 노력은 수포로 돌아갔다. 이스라엘은 시나이 반도에서 철수하지 않았고, 이집트는 시리아와 연합하여 실지 회복을 위한 군사 작전을 계획하였다.
(3)1973년 전쟁 이후, 1973년 12월 22일 스위스 제네바에서 이집트, 요르단, 이스라엘은 미국과 소련의 중재 하에 국제 연합 평화 회의를 가졌는데, 사다트가 당시 미 국무장관 헨리 키신저를 통한 대화 노선을 선호하였기 때문에 재개할 수 없었다. 이후, 74년 1월 이집트와 이스라엘 간의 시나이 1차 협정이 채결되었고, 74년 6월 시리아와 이스라엘 간 골란고원의 휴전이 이루어졌다. 시나이 2차 협정은 75년 4월에 조인되어 이집트와 이스라엘은 휴전을 3년 더 연장하였다. 당시 이스라엘은 미국이 팔레스타인 해방 기구가 이스라엘에 대한 테러 행위를 중단하도록 촉구하고 이스라엘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는 한 팔레스타인 해방기구와 대화하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거래하였다.
1976년 미국의 대통령 선거로 후속 조치는 중단되게 되었다. 77년 10월 미국의 지미 카터 대통령은 제네바 회담을 재개한다는 미소 합동 선언을 하였으나 이스라엘이 동의하지 않았기 때문에 개최되지는 못하였다. 77년 11월에 이집트의 사다트 대통령이 이스라엘을 극적으로 방문하여 평화를 위한 단계적 일정을 이스라엘 국회에서 발표하였다. 78년 9월 미국, 메릴랜드 캠프 데이비드에서 이집트와 이스라엘이 협정에 조인하였다.
1979년 3월 26일 이집트와 이스라엘은 워싱턴에서 평화 조약에 서명했다. 두 나라가 1980년 2월에 대사를 상호 교환하기까지, 이스라엘은 이미 시나이 반도의 2/3을 이집트에 반환한 상태였다. 그러나 팔레스타인 자치에 대한 협정 날짜인 1980년 5월 26일은 전혀 고려되지 않은 채 지나가 버렸다. 1982년 4월 26일 이스라엘은 시나이 반도의 나머지 부분을 이집트에 반환했다.
1982년 9월 1일, PLO가 베이루트로부터 추방된 이후 뒤이어 미국 대통령 레이건(Ronald Regan)은 국제연합안전보장이사회 결의(UN Security Council Resolution) 242호를 재확인 해주는 하나의 평화안을 제시했다. 이스라엘의 점령 지역에 대한 합병과 주권 즉 통치를 명백히 배제하는 한편, 독립 팔레스타인 국가도 배제하고 있었다. 대신에 요르단과 연계한 팔레스타인의 자치에 관심을 보였으며, 요르단과 팔레스타인이 자치 팔레스타인 당국이 선출되어 이스라엘의 통치를 계승할 수 있도록 1978 캠프 데이비드 협정(1978 Camp David Accords)의 폭을 넓히도록 요구했다. 당시 이스라엘의 수상 메나헴 베긴이 협의한 적이 없다는 이유로 이 제안을 즉석에서 거절함으로써, 레이건안(Regan Plan)은 단명에 그치고 말았다.
1982년 9월 6일 페쓰에서의 아랍 정상 회담(Arab summit)이 8조항 평화안(eight-point peace plan)을 채택하였는데, 이 평화안에는 이스라엘이 1967년 이전의 국경으로 철수할 것, 점령지 내의 정착촌을 철거할 것, 팔레스타인 국가를 새로 만들고, 그 수도를 동예루살렘에 둠으로써 PLO의 감독 하에 팔레스타인의 자결권이 행사되게 할 것, 팔레스타인의 난민들이 고향으로 돌아가거나 또는 배상을 받을 수 있는 권리, 그리고 팔레스타인을 포함하여, 그 지역의 모든 국가들에 대한 국제연합안전보장이사회의 평화 보증 등의 조항이 포함되어 있었다. 시리아는 이 안을 지지했다.
1983년에 시리아 대통령 하피즈 아사드와 관계가 악화된 후에, PLO 의장 야세르 아라파트는 그 다음 해 초 요르단왕 후세인과 회담을 시작했다. 1985년 2월에 그들은 팔레스타인 인이 요르단과 팔레스타인의 연합이라는 테두리 안에서 그들의 자결권을 행사하는 모습과 요르단-팔레스타인의 공동 대표단이 국제연합의 후원 하에 구성되는 평화 회담에 참석하는 현장을 공개하고, 평화안을 발표했다. 이스라엘이 그 제안에 반응을 보이지 않자, 요르단은 PLO와의 외교적인 협력을 종식하였다. 팔레스타인 민족회의(Palestine National Council)는 1987년에 1985년의 협정을 취소했다. 그 동안에 시리아는 이스라엘과의 전략적인 평행선을 유지하는 정책을 추구했다.
1988년 2월에 미 국무장관 조오지 슐츠(George Shultz)가 평화안을 제시하였는데, 그 평화안은 서안과 가자지구에 대한 과도적인 자치 협정의 세부 사항을 이끌어 낼 수 있도록 이스라엘과 요르단-팔레스타인 공동 대표단 사이의 6개월 동안의 회담을 명시하고 있었다. 과도적인 자치 협정은 3년 동안 유효하고, 그 기간에 최종적인 해결안이 협정될 것이었다. 회담은 국제연합안전보장이사회 결의안(Security Council Resolutions) 242 및 338호에 따라, 안전보장이사회(UN Security Council)의 5개상임 이사국(Permanent Members) 및 모든 이해 당사자들을 포함하는, 한 국제 평화 회의(international peace conference)와 동시에 개최하는 안이었다. 슐츠안은 이스라엘의 총리 이츠하크 샤미르가 이 안이 비현실성을 지적하여서, 이 안을 거절되었다. 슐츠안(the Shultz Plan)에는 팔레스타인 국가에 대한 어떤 규정도 없었기 때문에, PLO도 그것을 거절했다. 또한 슐츠안은 막 태동하여 형태를 갖추고 있는 아랍인 봉기(인티파다)의 확대를 저지하기 위한 하나의 전략으로 파악하고 있던 다른 팔레스타인 지도자들 역시 이 안을 거절했다.
후세인 요르단 국왕이 마침내 1988년 7월에 서안(the West Bank)과의 행정적 법률적인 연결 고리를 끊게 되면서, 요르단을 포함한 확대 캠프 데이비드 협정(Camp David Accords)에 개최하려던 이스라엘의 전략은 어렵게 되었다. 다른 한편으로, 팔레스타인 국가위원회(Palestine National Council)가, 1988년 11월에 알지에에서 회기 중에, ‘우리 팔레스타인의 땅’에 대한 독립 선언문을 선포하므로써 폭력과 테러 행위를 포기할 수 있는 길을 모색하였다. 이 후에, 미국은 튀니스에서 PLO 본부와 낮은 수준의 접촉 관계를 수립했다.
1989년에, 소련의 유대인 완화 정책으로 인하여 -이주자들의 총 수를 1988년의 1만 3,300명으로부터 2년 뒤에는 19만 9,500명까지 증가시킴- 소비에트 유대인 이주의 조류가 구축되었다. 1990년 6월에 미국은 PLO가, PLO 계열 조직인, 극렬 팔레스타인 해방 전선에 의한 이스라엘에 대한 공격들을 비난하지 않았을 때 PLO와의 회담을 중지했다. 왜냐하면 팔레스타인 해방 전선의 목표가 군사적이었기 때문이다.
제 2차 걸프전이 발발하기 전의 이 위기 동안에 PLO는 이라크의 사담 후세인을 지지했다. 왜냐하면 이라크가 쿠웨이트로부터 철수하는 것을 이스라엘이 아랍 점령지로부터 철수하는 것과 연결시켰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연계는 미국에 의해서 즉시 제재가 가해졌다.
(4)제 2차 걸프전(the Second Gulf War) 1991 후: 이라크의 패배에 따라 미 국무장관 제임스 베이커(James Baker)는 평화 과정을 소생시킬 수 있는 하나의 동기를 마련할 수 있었다. 이러한 기회는 2000년에 사망한 시리아의 아사드 대통령 이 중동 평화에 대한 국제 회의에 참석하는 것에 대한 아사드의 조건들에 대해 미국 측이 거듭 양보를 하고 나선 1991년 7월 중순에 이루어질 수 있게 되었다. 이제 이츠하크 샤미르에 의해서 이끌어지고 있는 우익 연립 정부에 의해서 통치되고 있는, 이스라엘의 전제 조건들은 PLO를 회담으로부터 제외시킬 것; 요르단-팔레스타인 공동 대표단 속에 점령지 내에 거주하고 있으나 PLO와는 연결되어 있지 않은 팔레스타인인들을 포함시킬 것; 이스라엘의 감독 하에 과도적인 자치기간을 포함시키기 위하여 팔레스타인인들과 어떤 해결이든지 타결할 것; 그리고 어떤 제 3의 국가도 중재자로서 대리하는 일없이, 협상이 쌍무적인 것으로 되게 할 것 등이었다. 그 대신에 이스라엘은 국제연합안전보장이사회 결의안 242호 속에 포함되어 있는 대로 평화를 위해 영토 원칙(principle of land)을 양보했다.
중동 평화 회의는 미국과 소련(후에 러시아)의 공동 사회 하에 10월 30일 스페인 마드리드에서 개최되었다. 예비 접촉을 끝낸 후에, 쌍무 회담이 이스라엘과 시리아, 그리고 레바논과 요르단, 팔레스타인 사이에 시작되었다. 지역 문제들에 관한 두 번째 주제에 대한 다국간의 협상도 제안되었다. 두 번째 주제에는 난민, 물, 경제, 생태 환경, 그리고 지역 안보 및 무장 해제와 같은 여러 가지 문제들이 포함되었다. 시리아와 레바논은 이러한 회담들을 기피하였다. 쌍무 협상이 진행되는 동안에 요르단-팔레스타인 대표단은 둘로 갈라졌다. 더욱이, 4개국 아랍 대표단들은 새로운 라운드의 회담에 참석하기 전에, 종종 다마스커스에서 개최되는, 공동 회의에서 그들이 가지고 있는 전략들을 조정 통합했다. 나중에 이스라엘은 그 협상을 10년 동안 끌려고 계획했었다고 폭로한 적이 있는 이스라엘 수상 사미르에 의해서 이끌려지든 리쿠드당(우익 연합 정당)이 1992년 6월에 패배한 데 뒤이어 노동당에 의해서 이끌려지는 정부가 들어섰지만 쌍무 회담은 거의 진전을 보지 못했다. 또한 미국의 클린턴(Bill Clinton)이 1993년 1월에 미국 대통령으로서 조오지 부시(George Bush)를 계승했을 때에도 상황 변화는 없었다. 1993년 6월~7월 사이에 미국 워싱턴에서 개최된, 제 10차 회담도 이전의 아홉 차례의 회담에서와 마찬가지로 아무런 결과를 낳지 못했다.
이스라엘 정부와 PLO는 1993년 1월에 노르웨이에서 한 노르웨이인에 의해서 구성된 비밀 회담을 시작했다. 이 회담은 결과적으로 8월 하순에 원칙적인 합의를 가져왔는데, 그것은 이스라엘의 외무장관, 시몬 페레스와 PLO의 고위 관리, 아흐마드 크라이에 의해서, 오슬로에서 제안되었다. 미국을 배제한 채 이루어진 이스라엘-팔레스타인 협상에 대하여 미국은 주도권을 갖기 위해 적극 개입하여, 협정에 대한 공식적인 서명은 클린턴(Clinton) 대통령이 입회한 가운데 9월 13일 워싱턴에서 이루어졌다.
(5)1993년 9월, 이스라엘-PLO 협정(Israeli-PLO Accord) 후: 1994년 7월에 미국 워싱턴에서의 한 회합에서 요르단과 이스라엘간의 전쟁 상태를 종식시킨 후에, 후세인 국왕과 이스라엘 수상 이츠하크 라빈은 1994년 10월에 요르단-이스라엘 평화 조약(Jordanian-Israeli Peace Treaty)에 서명했다.
1994년 5월, 카이로에서, PLO와 이스라엘은 팔레스타인 자치당국 (PA)의 감독 하에 가자지구(the Gaza Strip)와 서안(the West Bank)의 소도시 예리코에서 임시로 팔레스타인이 자치를 실시하는 것에 대한 협정에 서명하였다. PA는 7월에 적극적으로 협정 이행을 수행하기 시작했다. 1995년 9월에 PLO와 이스라엘은 PA의 감독 하에 서안에서 팔레스타인이 임시로 자치를 실시하는 것에 대한 협정을 워싱턴에서 서명하고, 이스라엘이 12월까지 일곱 개의 서안(West Bank) 도시들로부터 군대를 철수할 것, 450개의 팔레스타인 촌락들을 팔레스타인 당국(PA)과 이스라엘이 공동으로 관리할 것, 그리고 128개의 유대인 정착촌들을 이스라엘이 계속해서 관리할 것 등을 요구했다.
1995년, 팔레스타인-이스라엘 간 평화회담은 강경 우파 리쿠드당의 네탄야후가 수상에 오름에 따라, 협상은 난관에 봉착하기 시작했다. 더욱이 팔레스타인 원리주의 세력인 하마스와 이슬람 지하드의 대 이스라엘 테러는 이스라엘에게 회담지연의 빌미를 준 한편, 이스라엘의 점령지 내 정착촌 불법건설은 팔레스타인의 저항을 초래했다. 네탄야후에 뒤이은 바라크 노동당 정권은 팔레스타인에게 비교적 많은 양보를 한 듯 보이나 노동당 정부의 정착촌 건설과 도로건설은 서안지역을 갈기갈기 찢어놓음으로써 반환 이후, 팔레스타인 정부가 이 지역을 효율적으로 운영하기 불가하도록 만들어 버렸다. 그래서 아라파트는 바라크의 제의를 수용할 수 없었고 미국의 친이스라엘 편들기 속에서 회담은 무산된 채 극우주의자 샤론 정권이 들어서면서 양측간의 보복은 계속되고 있다.


*중동평회회담 Middle East Peace Conference (마드리드, 1991) :

2차 걸프전 후 미국은 중동평화 회담을 위해 활발히 활동하였다. 시리아 대통령 하피즈 아사드가 평화회담 참여 전제조건을 극적으로 양보함으로써 1991년 7월 18일 미국무부 장관 제임스 베커는 다마스쿠스에서 아사드 대통령을 만날 수 있었다. 9월 30일 팔레스타인 국가 위원회는 회담 참여를 승인하였다. 1991년 10월 30일 미국과 소련(후에 러시아)의 공동 주재하에 스페인 마드리드에서 회의가 개최되었고 이스라엘, 시리아, 레바논, 요르단(요르단의 대표단은 점령지 팔레스타인 인들을 포함한 대표단임)이 참여하였다. 모든 참가 측들은 1967년 11월 국제연합안전보장이사회의 결정 242항인 지역 내 모든 국가들의 평화 공존을 위한 교환조건으로 점령 아랍 영토로부터 이스라엘의 철수 요구에 대한 결정사항을 존중하였고 또한 1973년 10월의 338항인 안전 보장 이사회의 결정 242항의 준수를 관련국들에게 요구한 결정 사항 또한 존중하였다.
마드리드 회담은 이스라엘과 3개 아랍 관련국들과의 쌍무회담을

 
 

Total 14
제   목
<ㄱ> 가쉬미 - 국제연합안전보장이사회 결의안 598
<ㄴ> 나본 - 노루즈
<ㄷ> 다국적군 (레바논내) - 딤미
<ㄹ> 라디노어 - 레바논-이스라엘 평화협정 (1983)
<ㅁ> 마나마 - 무사디끄
<ㅂ> 바그다드 - 베이루트
<ㅅ> 사나 - 샤레트
<ㅇ> 아구다트 이스라엘 - 아랍-이스라엘 전쟁
<ㅈ> 자이드파 - 중동평화회담 (마드리드 1991)
<ㅊ> 천연가스 - 총인민회의(예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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